주제: 천국생활의 시작
본문: 누가복음 17장 20절~21절
설교: 조 성훈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천국을 생각하면 우리의 마음이 즐거워집니다. 저 역시 언제든 주님이 부르시면 가고 싶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늘나라에 대해 ‘주님의 나라’, ‘하나님 나라’, ‘천국’, ‘그의 나라’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우주가 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정확하게 이 우주가 얼마나 큰 지 알지 못합니다. 새로운 망원경들이 만들어질 때마다 더 먼 곳까지 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 한 이후로 세상은 탄식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보기에 걱정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모든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합니다. 하와이를 ‘500국’이라고 하고 뉴질랜드를 ‘900국’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좋은 곳을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늘나라가 좋은 곳이고 그곳에 가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도 그동안 메시아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다가 예수님이 오시자, 그들의 관심사는 과연 하늘나라가 언제 임하게 되느냐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을 때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한 마디로 온 세상이 다 천국,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명령대로 실행되고 하나님이 다스리고 만물이 그에 순응하는 곳이 천국이니, 당시 세상은 천국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에서 사탄이 반란을 일으키고 그에 동조한 아담과 하와로부터 세상에 악이 시작된 것입니다. 사실은 온 우주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천국이 여기에 있을까, 저기에 있을까’, ‘이 땅에서 천국이 언제 시작되나’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개미 한 마리가 코끼리 등에 올라타서 ‘코끼리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온 우주가 하나님의 나라인데 그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 하는 것은 잘못된 질문입니다. ‘언제 이 세상에 죄악이 없어지고 사탄이 잡히며, 만물이 원래 상태로 회복되느냐’고 묻는 것이 제대로 된 질문입니다. 주님은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답한 것이기 때문에, “너희 안에” 있는 바로 자기 자신(예수님)을 가리키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옳은 해석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11:20).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귀신을 쫓아내는 등)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사단의 지배 아래서 사단이 원하는 대로 세상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도 아직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함께 역사하므로 고통 중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부활한 몸이 되기 전까지는 이와 같은 영적싸움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왕과 주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결혼식에서 신랑 또는 신부가 상대방을 아내와 남편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남편과 아내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아내가 아침밥도 차려줄 생각을 하지 않고 집안일도 전혀 하지 않는다면, 남편 역시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전혀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이젠 됐으니 당신 볼일 보시오”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나의 왕으로서 당신의 통치를 받겠다는 의미입니다. 왕은 우리가 마땅히 백성으로서 순종해야 할 법도를 성경을 통해 기록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과 하늘나라의 법을 순종할 때 하늘나라는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받아들일 때부터 하늘나라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있다”는 말이 바리새인들에게만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 자리에는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왕의 명령이 시작되었고 그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들의 마음속에 이미 하늘나라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천국생활은 언제부터 시작됩니까? 믿는 자에게 있어서 천국생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29).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과 주인으로 영접하면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습니다. 천국의 안식이 우리 안에 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육체가 쉼을 얻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육체는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과 마음이 쉼을 얻는 것,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특징이자 이것이 바로 천국생활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환경이 이 안식을 방해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내게 오는 자는 다 값없이 생수를 마신다”고 하셨고 다시 목마르지 않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다음 영혼의 참 갈증을 해결하셨나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늘나라를 생각하며 그날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는, 참 안식과 평안이 있는 그곳에 빨리 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육체를 떠나 누리겔 될 것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마음의 안식이 이미 우리에게 찾아왔고, 주님께서 주신 샘물로 인해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였습니다. 믿는 자들은 하늘나라의 축복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안식이 하늘나라에 가면 더 큰 안식으로 바뀌게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부활한 몸을 입고 하늘나라에 가면 우리를 괴롭히던 방해꾼들이 사라지는 것 뿐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에게 갈증이란 없습니다. 우리의 갈증은 육체로부터 오는 것일 뿐, 주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면 참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이미 우리의 왕은 우리 안에 계시고 천국의 삶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새로운 몸을 입게 되는 그날에 모든 것이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단으로부터 죄악 때문에 더럽혀진 우주를 불태우시고 만물을 새롭게 회복시키신 다음 우리에게 온 만물을 다스리게 하실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 보시기에 좋았던 그 모습대로 새로운 땅과 세계를 창조하시고 우리는 그곳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이 땅에 있을 때 누렸던 천국이 ‘시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 지금도 주님은 왕이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입니다. 사단이 영원한 불못에 들어가게 될 때 영의 세계가 정화될 것이고, 사단의 영향을 받은 인간으로 인해 더럽혀진 이 물질의 세계도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정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몸을 입게 되면 그 때에는 죄악된 삶을 끝내게 될 것입니다. 현재 우리 믿는 자들을 괴롭히는 것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람들은 신앙생활이 어려운 이유가 환경에 있고, 남에게 있다고 생각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나 자신’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나 자신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몸을 벗고 새로운 몸을 입는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주님처럼 속에서부터 사랑이 흘러 넘칠 것입니다. 목회를 하는 저 역시 성도를 진정으로 사랑하는가 생각할 때 괴로운 것이 사실입니다. 온유함이 뛰어났던 모세도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했지만 때로는 그들로 인해 괴로워서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하늘나라가 시작된 사람은 그 안에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미 시작된 하늘나라가 존재하지만 우리의 육신이 자꾸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천국생활은 주님을 영접할 때 이 땅에서 시작됩니다. 하늘나라의 평안이 거하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법과 주님이 주신 쉼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면 이 땅에 있는 동안에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적으로 쉼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속에는 하늘나라가 존재하고 있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평안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육체적으로 힘들어도 우리 안에서 시작된 천국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평안과 안식, 위로의 천국생활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저는 가끔 혼자 있을 때 빙그레 미소가 지어질 때가 있습니다. 주님과 하늘나라, 그리고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할 때 참 즐겁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정신이 나갔다고 할 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믿는 자들은 이 땅에서 누리는 천국생활을 등한히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동행하시고 왕으로 다스리시는 천국생활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하늘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믿는 사람들 안에는 영적으로 주님이 마음을 지배하시고 하늘나라의 평안과 기쁨이 그 안에 거합니다. 이것은 하늘나라에 갔을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갔을 때 연장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10)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발장에 신발이 몇 켤레 있는지, 옷장에 옷이 몇 벌 있는지 모를 정도로 부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우리의 속사람은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생활이 이미 시작되었는데도 우리의 마음이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어 그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이 삶을 놓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주신 귀한 것들을 이 땅에서 누리면서 즐거움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이 왕으로 계시고 그의 명령과 법이 있으며 그의 축복이 우리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평안과 즐거움, 넉넉함을 감출 수 없는 천국생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날마다 이 축복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