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진정한 회개로의 부름
본문 : 누가복음 3장 7~14절
설교자 : 최종혁

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0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14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회개’라는 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는 아닙니다. 그것의 사전적 의미는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이런 회개를 보여주는 사람이 점점 적어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못이 있으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그것을 숨기려고 합니다. 숨기다가 들통이 나면 그것에 대해 변명을 하거나 사과를 하거나 유감을 표명합니다. 그런 일은 볼 수 있어도 잘못에 대해 진정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기는 어렵습니다. 뉘우치고 고치는 모습을 보기 힘듭니다.

교회 안에서는 회개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런 회개를 보여주는 사람은 여전히 적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 말씀은 세례 요한이 회개에 대해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외치는 말씀입니다. 그가 말했던 회개는 오늘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본문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3절에서 말한 요한의 사역이 실제로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요한이 했던 일은 죄사함(용서)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곧 사역을 시작하실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 그의 할 일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했고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런 회개의 표로서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7-9절에서는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 선포하며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10-14절에서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서 답하며 진정한 회개가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를 가르칩니다.

먼저 그는 ‘회개가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을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고 너희는 아직 그 심판에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이 세례 요한의 메시지입니다.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7).

요한이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세례를 베풀자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마태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마 3:5)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주변에서 올 수 있었던 사람들은 다 그에게 왔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1:65-66). 세례 요한의 탄생과 관련된 소식이 사람들에게 두루 퍼졌습니다. 그는 탄생에서부터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보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아이가 어떻게 될까 계속해서 궁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1:80). 세례 요한은 3장 전까지 광야에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30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때가 되었을 때 말씀이 요한에게 임했고 요한은 그 말씀에 응답해서 공적인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를 궁금해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몰려들었습니다. 그의 사역이 끝났을 때 누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침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눅 7:29),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눅 20:6). 모든 사람들이 그의 특별함과 선지자됨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자신의 인기를 생각해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만 했을까요? 여러분이 보셨다시피 그는 자신에게 나오는 사람들을 행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참 가혹하고 아무런 사랑이 없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선포했고 그것에 사람들이 반응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의 날이 가까웠다는 것을 선포했습니다. 구약은 그 날을 “여호와의 날”이라고 표현합니다. 구약에서 이 말을 정확히 19번 언급하고 있습니다(사 2:12; 13:6, 9; 겔 13:5; 30:3; 욜 1:15; 2:1, 11, 31; 3:14; 암 5:18[2x], 20; 옵 1:15; 습 1:7, 14[2x]; 슥 14:1; 말 4:5). 또한 많은 선지서들에서 직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날,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모든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으시는 날입니다.

이것은 구약에 예언되었고 메시아가 이 땅에서 통치를 시작하실 때 이뤄집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이제 더 이상 두고 보지 않으시고 공의를 세우실 때가 가까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진노의 날에 대해 선포한 것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요한과 예수님을 비교하면서 요한의 메시지는 ‘심판의 메시지’였고 예수님의 메시지는 ‘구원의 메시지’였다고 말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말은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다른 한편에서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내리시지만, 하나님의 편에 선 사람에게는 구원을 내리십니다. 심판과 구원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리라”(마 3:2).

9절에서는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고 말씀합니다. 장차 올 진노에 대해 나무 뿌리에 놓여있는 도끼라고 말합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으면 찍어낼 준비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심판에 대해 표현한 비유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도끼가 하는 역할은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를 분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아가 이 땅에 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날이 가까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확실하고 임박한 심판을 선포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심판의 대상이 되지 말고 구원의 대상이 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날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나도 심판의 대상이 되겠구나’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해당된다’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들은 자신이 심판의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는 회개가 필요없다 생각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합니다.

독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대적들,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들을 표현하는 비유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대적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의 대상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사탄의 자식으로서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요단강 안에 있거나 강변에 서서 수많은 이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모습은 마치 광야에서 화재가 나 수풀을 피해 강가로 몰려드는 뱀들을 연상시켰을지 모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어쩌면 이 말은 가혹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 자신이 어떠한 상태인지 분명하게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회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회개가 필요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회개가 필요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회개가 필요 없는 자들입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한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죄인이기에 주님의 날에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여전히 은혜를 베풀고 계시지만 세례 요한의 때보다 더 가까이 왔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왔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앞서 우리 모두는 동일하게 ‘죽음’의 날을 맞이합니다. 죽고 나면 회개할 수 없으니 그 때는 이미 모든 기회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개인의 죽음은 곧 심판의 때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진노, 천국과 지옥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 수 있습니다. 요한의 말을 들었던 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에게 가까이 오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그날은 점점 여러분을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요한의 말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1-5).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망했습니다. 회개는 죄인인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말하고 있는 진정한 회개는 무엇일까요? ‘진짜’를 찾기에 앞서 무엇이 ‘가짜’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거짓된 회개 말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7).

제가 학생들에게 ‘누가 청소를 이렇게 하라고 했어?’라고 말한다면, 이 말은 그들의 방법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한 말도 이와 같은 의미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어떤 의식(儀式)에 있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행위가 진정한 의미의 회개는 아닙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착한 일을 하거나 헌금을 하면, 기도하고 금식하며 율법에 따라 제사를 잘 드리면 하나님이 받아주실 것일라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것입니다(롬 10:3).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에 나오고 헌금과 봉사를 열심히 하며, 심지어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어도 그 자체가 회개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8).

어떤 혈통도 회개를 보장해주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이 혈통의 문제가 요한이 가장 담아두고 있었던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내가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왜 심판을 받느냐’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좀더 직역하면 ‘우리 조상이라는 말을 시작하지 말라’, 좀더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우리 조상이라고 말할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혈통과 영혼의 회개의 문제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문헌을 보면, 유대인들이 삶을 엉망으로 살아도 진노의 날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때문에(아브라함을 봐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돌들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혈통적인 것이 영혼의 문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누린 유익들이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나 영혼의 문제에 있어서 핵심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영혼의 문제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아닌 누구의 의도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회개는 개인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일대일의 문제입니다.

단지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회개는 아닙니다. 물론 회개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또한 회개의 감정 역시 그렇습니다. 감정이 복받쳐 오르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도 그것이 회개는 아닙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부흥회나 콘서트에 가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 뿐입니다. 뜨거운 감정이 회개가 아니고, 회개의 고백도 전정한 회개는 아닙니다. 지적인 깨달음이나 뜨거운 감정, 회개의 고백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그것은 회개의 결과이지 회개 자체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회개는 무엇일까요?

세례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열매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말합니다. 열매가 회개는 아니지만, 회개는 합당한 열매를 맺습니다. 회개와 열매는 다른 것이지만 분리되지는 않습니다. 사과나무는 사과 열매를 맺습니다. 또한 사과 열매를 보면 그것이 사과나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무와 열매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행동이라는 것은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교회에 나가고 구원받지 않은 사람도 교회에 나갑니다. 그러니 교회에 가는 것으로 그가 구원받았다 아니다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가끔씩 그리스도인보다 더 그리스도인 같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회개한 사람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단지 행동이 아니라 행동이 나온 동기, 마음의 자세입니다. 교회를 저주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고 성도와 교제하고 싶어서 교회에 나가는 것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 아내에 대해서 그저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말씀에 따라 아내를 더 사랑하고 싶고 그러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것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를 배우고 나서 그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 요한이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합니다. 회개했다고 말한다면 그 회개가 진정한 회개라는 것을 삶의 열매로 보이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회개의 열매’는 눈에 보이게 나타납니다. 열매를 보면 회개의 본질이 보이는 것입니다. 요한이 말하는 진정한 회개는,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마음의 변화, 삶의 방향을 바꾸는 태도의 변화입니다. 마음이 변하면서 삶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우리는 진정한 회개의 실제적인 예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10).

여기서 무엇을 ‘한다’는 단어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의 ‘맺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곧 그들은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합니까?’라고 물어본 것입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11). 세례 요한은 어떤 의식이나 종교적인 행위를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세례를 받으라고도 하지 않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실생활에서 특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것입니다. 그들의 부족함을 보면 도와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큰 계명 두 가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12-13).

세리와 군인은 유대인들이 싫어하던 그룹입니다. 로마의 세금제도는 ‘도급제’였는데, 세금을 통치자가 걷어오는 것이 아니라 세금의 징수권을 어떤 사람이나 단체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역 범위가 넓기에 그들은 다시 다른 사람들을 고용합니다. 그들이 바로 세리들입니다. 그런데 이들도 일을 다 할 수가 없어 다른 사람을 고용합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유통구조와 같습니다. 유통구조가 길어질수록 소비자의 부담이 커집니다. 당시 세금 제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남기기 위해 통치자가 원했던 것 이상을 거둬들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혐오했겠습니까.

유대인들은 그들을 강도라고 했습니다. 로마인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그렇게 했기에 더욱 정죄했을 것입니다. 그런 세리들이 요한에게 나와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어본 것입니다. 요한의 대답은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입니다. 요한은 세리 일을 그만 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세리로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금을 부당하게 징수하지 않는 것, 권리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14).

당시 군인들은 육체적인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어 그 힘으로 돈을 빼앗았습니다. 그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거짓으로 고발해서 금전적인 유익을 취하는 것도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당연시 되는 일들이었습니다. 힘이 있던 그들에게 유혹이 많았던 것입니다. 요한은 ‘너희가 회개한 자라면 너희에게 있는 힘을 너희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 같지만 그들에게는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마음의 변화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요한은 죄를 멈추고 돌아서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죄를 지으면서 누리는 유익을 포기해야 하는 일입니다. 차라리 성전에 가서 희생 제사를 드리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라고 했다면 쉬웠을지 모릅니다. 그러한 일을 하면서 내 삶이 변하고 있다고 기뻐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죄를 지으면서 다른 무언가를 하라고 명령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죄를 멈추라는 것입니다. 그들 주변의 사람들은 여전히 같은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해야 했습니다.

요한은 세리와 군인에게 일을 그만 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의 목적은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 있으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진정한 회개의 열매는 다른 어디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합당한 회개의 열매를 맺습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그 열매를 맺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마음의 태도가 변했기에, 삶에 진정한 변화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죄를 멈추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얘기를 하고 있을까요?

이 놀라운 회개를 아직 경험하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하나님 앞에 나오십시오.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계십니다. 자신이 회개가 필요한 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은혜의 하나님께 나오시기 바랍니다.

이 놀라운 회개를 경험하신 분이라면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지금 여러분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삶에서 맺고 계십니까? 죄를 버리고 선을 향하여 걸어가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질문하십시오. ‘내 삶에서 맺어야 할 회개의 열매는 무엇입니까’라고. 말씀에 질문하시고 그 말씀에 따르십시오. 지금 그 자리에서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회개하게 하신 목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