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본문: 빌립보서 4장 4절
설교: 최 종혁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1-9 말씀을 통해 빌립보 성도들에게 어려움 중에 굳게 설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주 안에 서라”는 명령 아래 6가지 명령이 등장하는데,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2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4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5절),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아뢰라(6절), 이것들을 생각하라(8절), 너희는 내게 배우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9절)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 말씀드린 것이 첫째 명령, 즉 ‘주 안에서 같은 마음(겸손)을 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드릴 말씀은 두 번째로 4절에서 등장하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그 자체가 주제라고 할 만큼 짧고 명료한 말씀이지만,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기뻐하라”는 명령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먼저 ‘기쁨’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의 즐거운 마음이나 느낌’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어떤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마음에 생기는 감정이라는 말인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나의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의 감정입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의 감정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자녀가 잘 되는 것을 기뻐하지만 그것도 나의 바람이기 때문이 아닙니까.
좋은 음식을 먹는 것에 기뻐하는 사람들은 맛집을 찾아다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갖고 싶은 휴대폰이나 자동차 등을 가지게 되었을 때 기뻐합니다. 나의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기쁨을 느낀다면, 반대로 나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는 그런 기쁨을 느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결국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기뻐하라”는 명령은 “네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라”는 말일까요? 원하는 것을 갖고 먹고 싶은 것을 먹으라는 의미일까요? 사실 세상에서는 이런 말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뻐하라”는 명령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기뻐하라”고 명령했다는 것은 우리가 기뻐할 수 있다는 것, 기쁨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현재형의 표현으로, 그것을 계속해서 선택해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누가 기뻐하지 않기를 선택할까요? 누구나 기뻐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상황은 그렇게 잘 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하라”고 말하면서 “내가 다시 말하노니”를 덧붙여 재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나는 또 다시 너희에게 기뻐하라고 말할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빌2:17-18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명했던 사도 바울은, 다시 빌3:1에서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라며 또다시 기뻐하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다시 4장에 와서 두 번 더 반복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어떤 상황이나 조건이 없는 명령인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조건 없이 기뻐하라는 명령은, 현재 뭔가 기뻐하지 못할 만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기뻐할 수 있는 상황이면 굳이 이렇게 명령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사도 베드로도 같은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마 5:11-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고난이 있을 때 오히려 기뻐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왜 이런 명령을 하고 있을까요? 상황이 좋지 않고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기뻐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성경은 왜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이것은 단순히 어려움이 있어도 억지로 웃으면 기뻐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저 낙천적인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 명령의 근거가 어디 있으며 그것은 합리적이고 타당한 것일까요?
이 명령의 타당성은 “주 안에서”라는 말에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 젊음이나 특출난 외모에 기뻐합니다. 승진이나 선물, 자녀들, 손주들 때문에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에 우리의 기쁨을 두면 그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돈은 있다가도 쉽게 없어지고 젊음과 외모도 순식간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명예 역시 작은 실수 하나에 무너져내리고, 귀엽고 예쁘던 자녀들, 손주들은 커가면서 반항하기 시작합니다. 부모를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는 자녀가 있을까요? 그러니 이 “기뻐하라”는 명령은 공허한 말처럼 느껴집니다.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느끼는 즐거운 감정이 기쁨이라면, 우리는 상황에 따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으니 항상 기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의 욕구를 항상 충족시켜서도 안 됩니다. 인간 개개인의 악한 욕구들까지 다 충족시킨다면 세상은 문제가 많을 것입니다. 우리의 욕구는 다 충족시킬 수도 없고 다 충족시켜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쁨을 바라보는 관점, 즉 내가 무엇을 통해 기뻐하고 무엇 안에서 기뻐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나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 세상 안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절대 “항상 기뻐하라”는 명령에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곳에서 ‘주 안’이라는 곳으로 기쁨의 장소가 옮겨진 것입니다. 전에 세상에서 기뻐했다면 이제는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 안에서는 정말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영원하시고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쉽게 변하는 세상의 것들과 달리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 안에 만족과 기쁨이 있다면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주님 안에 기쁨이 없다고 말합니다. 친구들에게 전도를 해보면 ‘교회에 무슨 재미로 나가냐’고 되묻습니다. 일요일에 쉬지도 못하고 놀지도 못하며 술 담배도 못하고, 부담스런 헌금과 전도를 해야 하는 것, 심지어 지루한 설교를 들어야 하는 것들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그 안에 기쁨과 만족이 없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주님 안에 기쁨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충만하게 있다고 말합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 4: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7). 하나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만족이고 기쁨입니다.
문제는 죄가 이러한 진실을 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피조물이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진정한 만족을 주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자신에게 만족이 되는 다른 것들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닌 어떤 것으로도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기쁨은 오직 주님 안에만 있습니다.
이것을 발견한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빌 3:7). 사도 바울은 ‘유익하다’는 말과 ‘해가 된다’는 말을 사용해 손익계산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있는 육체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들을 유익하다고 여겨왔습니다(빌 3:4-6). 그러나 이제는 그것들을 해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자신의 의를 세워왔던 사람, 그것을 옳은 것이라 믿고 삶을 투자해왔던 사람입니다. 그것이 유익이 된다고 굳게 붙들었던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때부터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지금껏 기쁨과 만족을 주던 것들을 모두 해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다 잃어버리고 심지어 배설물로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최고의 기쁨을 찾은 것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죽는 것을 유익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가 당할 수 있는 해(害) 중에 가장 큰 것이 죽음인데 그는 죽음마저도 유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유익과 기쁨이 세상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주님 안에서 참된 가치를 발견한 사도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을 때 그를 시기하던 자들이 밖에서 더 열심으로 전도하던 일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꼼짝 못하고 있을 때 더 많이 전도를 하면 그가 괴로워할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만일 그들의 생각처럼 사도 바울의 기쁨이 비즈니스적인 복음 전파에 있었다면 감옥에 갇혀 있는 현재 상황이 참 답답했을 것입니다. 더 많이 복음을 전해서 자신의 이름을 높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를 통해 복음을 전해지고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기쁨은 주님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 2:17).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빌 4:10) 그는 자신의 희생을 기뻐했고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의 실천으로 기뻐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그는 어떠한 형편과 상황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합니다. 언제나 기뻐할 수 있는 법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13절의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은 원하는 것을 모두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 안에서 비천이나 배고픔 등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기뻐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 12:7,8). 여기서 말하는 ‘육체의 가시’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사도 바울은 그것이 떠나가기를 세 번이나 기도했을 정도로 견디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9). 육체의 가시를 없애달라고 기도했는데 주님은 ‘은혜가 충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9,10).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있어도, 능욕과 궁핍, 박해, 곤고가 있어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가장 큰 만족을 주님 안에서 발견했고, 그것을 계속해서 자신의 기쁨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 있으면 기뻐할 이유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신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사랑, 성령님께서 지금 여러분을 위해 하고 계시는 일들,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영적인 선물들을 세어보시고,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서 어떻게 역사하고 계시는지, 그리고 다가올 영광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명령입니다. 아직 이 진정한 기쁨을 모르고 세상의 만족을 찾아 헤매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속히 주님 안으로 들어오셔서 참 만족과 기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인류 역사상 실존했던 모든 사람들이 실패했던 그 길을 굳이 왜 따라가시려고 합니까. 주님 안으로 들어오셔서 참된 기쁨과 만족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 기쁨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그것을 제대로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뻐하지 않고 불만을 표하며 상황에 따라 기쁨이 달라진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입니다. 여러분들이 주 안에서 기뻐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기쁨은 세상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죄입니다.
또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이 명령은 주님 안에서만 기뻐하라는 의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것들을 좋아하고 추구하다가 더 이상 기뻐할 것이 없어지면 주님께로 나옵니다. 세상에서 기뻐할 상황이 없어지면 주님을 찾아와 위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모든 기쁨은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어떤 책의 저자는, 우리가 너무 작고 하찮은 것에 쉽게 만족하고 기뻐해서 큰 기쁨, 진정한 만족을 포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영화나 게임을 하면 그 순간은 정말 재미있고 즐겁습니다. 술 마시고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것도, 돈을 모으고 쓰는 것도,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존경받는 것도 물론 즐거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작고 사소한 기쁨을 누리기 시작하면 주님 안에 있는 진정한 기쁨은 찾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소한 것에 만족하고 큰 것을 포기하시겠습니까, 큰 것을 위해 사소한 것을 내려놓겠습니까?
세상은 이 사소한 기쁨에 만족하라고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하고 무한하신 하나님 안에 우리의 참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이 진정한 기쁨, 영원히 쇠하지 않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자 특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