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주님 말씀하시면…
본문 : 시편 12편
설교자 : 최종혁
시 12 [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2]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3]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4]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5]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7]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8]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
오늘 본문은 말에 대한 말씀입니다. 말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모든 사회에서 강조하고 있고 성경에서도 여러 차례 말씀하신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 18:21), “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잠 13:3),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잠 21:23).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실 때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 15:18)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이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공부했던 야고보서 말씀에서도 말이 그 사람의 경건함을 측량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 1:26). 아무리 스스로 경건하다고 말하고 하나님을 섬긴다 해도 그 사람의 언어생활이 경건하지 못하고 자신의 언어를 통제하지 못한다면, 그의 경건은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약 3:6-8에서 보면 자연 상태의 말, 죄악된 말에 대해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6-8)고 말합니다. 혀가 우리의 몸을 더럽힐 뿐만 아니라 삶의 수레바퀴, 즉 사회와 역사까지 불사를 정도로 강력한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인간의 힘으로 이 혀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또한 예수님은 이에 대해 더욱 강력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 사람이 무슨 말을 했든지 그 말에 대해 심판날에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많은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을 사용할 능력을 주셨고 그것을 통해 감정, 생각을 겉으로 표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속에 있는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것 뿐 아니라 그것은 다른 사람과 소통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관계를 맺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말이 없다면 관계를 맺어가기 힘들 것입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에서도 말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3-15). 믿고 구원받은 것도 말로서 전해줬고 그것을 듣고 믿은 것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가 생깁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말이 본래의 기능을 잃고 모욕당하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관계 맺고 의사소통하기 위한 말이, 다른 사람을 속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에서 말했던, 말이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는 상황’입니다. 시편 11편에서 살펴보았던 ‘터가 무너진 상황’입니다.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1절),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8절). “경건한 자들”, 곧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한 사람들과 말씀에 따라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마치 끊어진 것처럼, 하나도 남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입니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악인들 뿐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나가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알에게 무릎 꿇고 자신만 남았다고 말하던 그 때와 같습니다(왕상 19:10). 이것은 믿는 자들이 한번 쯤 경험하는 감정입니다. 믿는 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이 아닌 좁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악인들만 가득하고 나만 이 길을 가고 있지 않은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다윗이 왜 하나님께 나와서 도우심을 구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다윗은 두 개의 말을 듣습니다. 하나는 악인들이 하는 말이고(“그들이 말하기를”),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여호와의 말씀에”)입니다. 다윗은 그 두 말에 대해 다르게 반응합니다.
악인의 말에 대한 의인의 반응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2절).
그들은 거짓을 말한다
악인들은 서로서로 거짓을 말합니다(“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여기서 “거짓”은 사실이 아닌 것 뿐만 아니라 ‘가치가 없는 것’, ‘헛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가치 없고 의미 없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가치 없는 것을 가치 있다고 말합니다. 정치인들은 중요한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관심이 다른 곳으로 돌려지면 그 중요한 문제들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처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을 숨겨두고 가치 없는 것을 가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전도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없이는 모든 것이 헛된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어도 세상에는 의미 있는 것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꿈을 이루고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 나의 가족과 이웃을 돌아보는 삶, 돈, 명예, 권력을 의미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좋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그 모든 것들은 이 땅에서 끝나버리는 헛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거짓, 헛된 것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아첨한다
또한 사람들은 아첨하는 말을 합니다(“아첨하는 입술”). “아첨하다”는 매끈하고 부드럽다는 의미입니다. 아첨하는 입술은 상대방이 듣기에 거칠 것이 없는 말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상대방이 듣기 좋은 말, 듣고 싶어하는 말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상대를 통해 뭔가를 얻기 위한 의도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 듣기를 좋아합니다. 옳고 그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들었을 때 내가 좋다 싫다가 중요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들어서 좋으면 거짓말이어도 상관없는 것입니다.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들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라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너희는 바른 길을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사 30:9-11). 사람들은 선견자들에게 선견하지 말라고 하고 선지자들에게 옳은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저 잘 될 것이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잘 될 것이다’, ‘너는 소중하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다른 사람에게 아첨하는 말입니다. 정치인들도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실을 말하지 않고 절대 진리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교회 안에도 들어와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거리낄 만한 것,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빼내고 복음을 전합니다. 죄의 문제, 심판, 회개, 치러야 할 대가를 빼내고 ‘예수님께서 너를 사랑하셔서 다 해 주셨으니 믿기만 하라’고 합니다. 아첨하는 말로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강하게 전해지는 말씀은 사라지고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이려는 음악만 남습니다. 눈물은 참된 회개가 아닌, 자신의 잘못에 대한 후회와 안타까움에서 그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모두 아첨하는 말을 교회가 따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속인다
“두 마음으로 말한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마음과 속마음이 다른 것, 속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속고 속이는 것은 낯설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법을 만들어 그것을 어길 때 처벌을 합니다. 그러나 법은 속고 속이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속이려는 사람은 언제나 법보다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사기도 문제지만 드러나지 않는 속임도 많습니다. 사람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진짜 의도를 숨기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미안해”라는 말을 난감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자녀에게 공부를 시키면서 “다 너를 위한 거야”라고 말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두 마음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남을 속이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을 속이기도 합니다.
또 한 가지 속이는 말은, 성경에서 죄라고 하는 것을 다른 말로 바꾸는 것입니다. 죄가 아닌 어떤 문제, 병, 또는 취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동성애에 대해 성경은 분명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예전에는 이것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병’으로 본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한 술 더 떠서 ‘개인의 취향’의 문제로 봅니다. 그것은 취향의 차이이고 나의 취향이 존중받기 원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취향도 존중해야 하는 관용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낙태는 어떻습니까? 법적으로는 낙태가 금지되어 있지만 빈번하게 행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유럽의 많은 국가가 낙태를 허가합니다. 과거에는 생명을 죽이는 일이라 하여 반대했지만 오늘날에는 여성의 선택권,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이유로 낙태를 허용합니다. 좋은 말로 속이는 것입니다. 교만, 분노, 원망, 불평은 성경에서 죄라고 규정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죄를 살인, 간음과 같은 수준의 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누구나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문제로 생각합니다. 화를 내지 않으면 병이 된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의 욕도 좀 하고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죄라고 말하지 않고 다른 말로 바꿔서 사람들을 속이고 나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세상이 하고 있고 우리가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랑한다
3-4절을 통해 악인들이 자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자랑하는 혀”). “자랑한다”는 것은 큰 것을 말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4절). 그들은 자신들이 혀로 이길 것이라고 말합니다. 헛된 말, 아첨하는 말, 속이는 말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강력한 무기이고 아무도 그것을 건드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를 통해 높은 자리에 오르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자랑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말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의인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다윗은 이들의 말을 따르지 않습니다. ‘세상이 그러니 나도 적응하며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로 향했습니다. “여호와여 도우소서”(1절). 시편 전체 말씀을 통해서 “도우소서”라는 말이 가장 먼저 나온 것이 69편과 이곳 뿐입니다. 크신 하나님을 대상으로 명령형을 먼저 사용한 것입니다. 다윗의 마음에 다급함을 보여줍니다. 무엇을 도와달라고 하는지 구체적인 내용 없이 그저 도와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윗이 도우심을 원하는 것은 자신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5절). 여기서 “가련한 자들, 눌림과 궁핍한 자들”은 충성스러운 자들, 아첨하는 말에 피해를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3절). 이것은 요청하는 말입니다. 공의로우시고 진리 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담대히 요청하는 것입니다. 말이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는 이 사회에서, 믿는 자로서 우리도 그들과 똑같이 그들을 용납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나에게 있다면 버려야 하고 다른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인의 반응(5-8절)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5절).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언급한 경우는 처음입니다. 다윗이 직접 계시를 받은 것이거나 다른 선지자를 통해 들은 계시일 수 있습니다. 아무튼 다윗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이제 일어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전까지는 하나님께서 마치 앉아계시거나 누워계신 것 같은 상황이었는데 이제는 무언가를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가련한 자의 탄식 때문입니다. 악인의 득세 때문이 아니라 가련하고 불쌍한 사람들의 탄식이 하나님의 귀에 들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일어나서 그들이 원하는 안전한 곳에 두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1절에서 “도우소서”라고 했던 기도에 대한 응답니다.
이제 6절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6절).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하는 것은 가장 철저하게 순수한 은을 만들어내는 과정입니다. 모든 찌꺼기는 불에 타고 순수한 은만 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와 깉이 순결하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말은 때로는 진리를 말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거짓을 말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나 진리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만 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시 19:7),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들은 영원하리이다”(시 119:160),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 이유는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진리이시기에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도 진리이신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이방이 능히 당하지 못하느니라”(렘 10:10),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요 3:33),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딛 1:2),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5). 하나님에게 있어서 거짓은 조금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약간의 어둠도 함께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하나님의 속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7절).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 확신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하신 그대로 약속을 지키실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고, 헛된 것이 가치가 있는 세상, 악인이 날뛰는 세상, 악한 자가 잘 되는 것 같은 절망적인 세상을 보고 있지만, 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어떤 전문가가 말한 것이 아니라 경험 많은 어떤 사람이 말한 것이 아니라 진리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세상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세상의 다수가 하는 말을 듣고 다윗도 그와 같이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방법을 따라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 의인을 지키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경건한 자가 없는 상황에서 충실하고 경건한 자로 남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두 번째 것을 선택했습니다. 사람들의 말은 아첨하는 말, 속이는 말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온전한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다윗과 비슷한 상황에 있습니다. 우리도 세상이 하는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세상에서 신뢰할 만하다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조언해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에 따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