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본문: 시편 104편

설교자: 최종혁

 

시편 104편도 103편과 마찬가지로 찬송시다. 103편이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했다면 104편은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한다. 103편은 하나님의 긍휼을 강조하고 104편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두 시편 모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라고 시작과 끝에서 자신에게 말한다. “송축하라”는 명령은 예배에 대한 명령이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는 것이 그 핵심에 있다. 103편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택을 기억하고 예배하는 것에 대해서, 104편은 하나님의 창조의 은택을 기억하고 예배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를 일깨워준다. 또 함께 드리는 예배이지만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가 진실된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내 영혼”에게 명령하는 것으로 강조된다고 할 수 있다.

104편의 예배 주제는 창조다. 그래서 시편 104편은 창세기 1장에 대한 묵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상응하는 유사점이 많다. 혹자는 시편 104편이 창세기 1장의 구조를 그대로 따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창조의 날들을 순서대로 묵상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그런 면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만 표현의 유사성을 고려해볼 때, 창세기 1장에 대한 묵상이 이 시편의 바탕에 있음은 분명하다.

어떤 사람들은 창세기 1장은 시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으로 보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시편 104편을 읽어 보면 창조에 대한 기록이 진짜 시로 기록되었으면 어떠했을지를 알 수 있다. 창세기 1장에는 시적인 요소가 있지만 분명 사실을 기록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되었다. 시편 104편이 시로서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시편 104편을 전체적으로 보면 과거보다는 현재에 더 초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일이 언급되지만 그 결과, 그리고 계속해서 지금 하시고 계신 일이 강조되는 것이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무신론자라고 하고,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을 유신론자라고 한다. 그런데, 유신론자 중에서도 이신론자가 있다. 이들은 창조주가 세상을 창조하긴 했지만, 창조 후에는 세상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믿는 자들이다. 그래서 창조주는 시계공에 비유된다. 시계공이 정교하게 기계를 조립해서 잘 작동되는 시계를 만들면, 그후 실제로 시계가 작동하는데는 관여하지 않는 것처럼, 세상을 창조한 신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도 실제적으로는 무신론자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참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은 계속해서 세상을 주관하시고 돌보신다. 하나님은 6일의 창조를 마치고 7일에는 안식하셨지만, 그 말이 하나님께서 그 뒤로는 세상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더 이상은 어떤 창조의 활동도 하지 않으셨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다(요 5:17).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일하셨고, 시편 104편은 그런 창조의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그런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래서 시편 104편은 단순히 창세기 1장의 시적 반복이 아니라 오히려 그때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시적 묵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작에서 시편 기자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송축한다.

송축 : 하나님의 위대하심(1-4절)

104: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창조 설화는 고대 문명들에서 비슷하게 찾아볼 수 있고, 특히 시편 104편은 이집트의 태양신 아톤에게 바쳐진 찬양과 유사한 내용이 있어서 그 내용을 차용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 일반적으로 이 세상을 관찰할 때 추론하고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공통점을 찾기는 힘들다. 특히, 성경의 창조에 대한 기록은 다른 설화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분명하다. 다른 설화들은 창조신이 다른 신들과 싸우고 거기서 승리하면서 무언가를 만들어 간다. 패배한 신들은 자기 영역을 빼앗기거나 창조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의 창조에 대한 기록에는 그런 싸움이 전혀 없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오히려 고요하고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대로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지금부터 노래할 대상이 바로 그런 하나님이심을 처음에 분명히 밝힌다. 그분은 여호와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시다. 다른 신과 혼동할 수 없고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은 “존귀와 권위”로 옷을 입으셨다. 성경에서 옷은 속성을 의미할 때가 많다. 흰 옷이 거룩을 상징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로 옷 입을 것을 명령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때로 우리는 오히려 반대로 단점을 가리기 위해(속성을 감추기 위해) 옷을 입는 경우도 많다. 몸집이 큰 사람은 작아보이는 옷을 입고, 키가 작은 사람은 키가 커 보이는 옷을 입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럴 필요가 없으시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위대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입으신 존귀와 권위는 어디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다. 위대한 왕은 화려한 옷으로 자신의 존귀와 권위를 나타내는데, 하나님은 존귀와 권위 자체가 하나님의 옷인 것이다.

이런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을 2-4절은 빛, 하늘(궁창), 물 등이 창조된 창조의 첫째날과 둘째날에 대한 묵상으로 송축한다.

104:2–4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3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4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여기서 시편 기자가 관심을 두는 것은 창조의 순서는 아니다. 땅에서 사는 사람과는 다른 하늘의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시적으로 묘사할 뿐이다. 하나님은 빛을 입으신다. 빛을 내는 태양은 마치 빛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이 빛의 근원이셔서 빛을 입으신다. 창세기 1장에서 태양이 있기도 전에 어떻게 지구에 빛이 있을 수 있느냐고 오류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답이 여기에 있다. 또한 계시록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빛이 있기 위해서 반드시 태양같은 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빛을 비출 수 있으시기 때문이다.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하늘도 만드셨다. 마치 휘장을 치는 것처럼 간단히 그렇게 하셨다. 그리고 물에(3절, 궁창 위)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셨는데, 그곳에 하나님의 처소(궁전)를 지으셨다는 말이다. 구름은 마치 왕이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돌아다니기 위해 타고 다니시는 수레와 같고 바람은 그 수레를 움직이는 동력과도 같이 묘사되어 있다.

4절 말씀은 히브리서 1:7에 따르면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들에 대한 묘사다.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천사들은 바람과 같이, 번개와 같이 빠르고 강력하게 일한다. 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사신이고 사역자일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기에 강하고 위대해 보이는 것들조차도 자기 아래 두시고 섬기게 하는 진정한 왕이시다.

사실 고대의 우상들을 생각해 보면 많은 면에서 궁극적으로는 ‘천사 숭배’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사역자로 두시고 일하시는데, 사람들은 바로 그 천사를 형상화하여 우상으로 섬겼던 것이다. 하늘의 많은 것들이 사람들의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유일한 예배의 대상은 그 모든 것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제 시편 기자는 그 하늘의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과 관련하여 어떤 일을 하셨는지 또한 하시는지를 묘사한다.

삶의 터전을 주심(5-9절)

104:5–9 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6옷으로 덮음 같이 주께서 땅을 깊은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로 솟아올랐으나 7주께서 꾸짖으시니 물은 도망하며 주의 우렛소리로 말미암아 빨리 가며 8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신 곳으로 흘러갔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 9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창조의 셋째날에 있었던 일을 묵상하고 있다. 셋째날에 하나님은 물을 한 곳으로 모으셔서 물과 뭍을 나누셨다. 모인 물을 바다라고 하셨고, 그렇게 드러난 뭍을 땅이라고 하셨다.

고대 사람들은 특히 바다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그래서 그들의 창조 설화를 보면 바다가 강력한 존재로서 묘사되고 창조신은 그 바다와 싸워 이기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방금 읽은 말씀에서도 약간은 그런 뉘앙스를 느낄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물을 꾸짖으신다거나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신다거나 하는 표현들이 그렇다. 상상력을 발휘하면 바다가 호시탐탐 육지를 침범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성경은 하나님이 바다와 싸우신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하늘을 그냥 휘장 같이 펼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왕으로서 명령하셨고 모든 것은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사람들이 아무리 강력한 존재로 여기고 그래서 두려워하는 바다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5-9절이 강조하는 것은 사실 바다가 아니라 땅이다. 하나님께서 땅에 기초를 놓으셔서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5절). 하나님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셨기에 다시 물은 땅을 덮지 못한다. 사람을 비롯한 생물이 사는 땅은 그렇게 하나님의 보호 아래 안전하다. 하나님께서 모든 생물에게 삶의 터전을 주셨고 그 터전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굳건히 놓여있다.

역사상 단 한번 이 원칙이 깨진 적이 있다. 이 역시 이신론이 말하는 하나님이 틀렸음을 알 수 있는 사건이다. 하나님이 세상에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이 원칙은 절대 깨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 이후로 역사 상 딱 한번 물이 땅을 덮었던 때가 있다. 바로 노아의 대홍수 때였다. 하나님은 사람의 죄가 땅에 가득했을 때, 물로 그들을 심판하셨다. 하나님께서 한 곳에 모아두셨고 경계를 정했던 그 물들이 쏟아져나와 땅을 덮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창조에 대한 고대 설화가 많듯, 대홍수에 대한 설화도 많다. 이것이 역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설화는 물론 사실에 대한 왜곡된 기록이고, 온전한 기록은 성경에만 있다. 대홍수 이후 하나님은 처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물을 한 곳으로 모으시고 그 경계를 정하셨다. 그리고 다시는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다.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으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다시 한번 이 견고한 땅이 흔들릴 날에 대해서 말한다. 사실 흔들리는 것 이상이다.

벧후 3:6–7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이 땅은 불에 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노아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그렇게 될 것이다. 노아 때와 다른 것은 그 날은 심판의 날이자 멸망의 날이다. 단순히 땅 위의 생물들의 멸망이 아니라 땅도 멸망하게 된다. 삶의 터전을 주시고 돌보시던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끝내시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창조하셔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뜻대로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살고 있는 이 터전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있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 수 있는 환경을 주시고 계속해서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붙들고 계시다는 말이다. 시편 기자는 이제 삶의 터전 뿐 아니라 우리 삶 자체를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심을 말한다.

삶을 주심(10-32절)

여기서 채소와 나무는 창조의 셋째날, 해와 달을 비롯한 광명체는 넷째날에 대한 묵상이다. 짐승과 사람에 대한 묵상도 함께 있는데, 이는 여섯째날에 해당된다.

104:10–23 여호와께서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11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12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도다 13그가 그의 누각에서부터 산에 물을 부어 주시니 주께서 하시는 일의 결실이 땅을 만족시켜 주는도다 14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 15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16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 17새들이 그 속에 깃들임이여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는도다 18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함이여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 19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때를 알도다 20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나오나이다 21젊은 사자들은 그들의 먹이를 쫓아 부르짖으며 그들의 먹이를 하나님께 구하다가 22해가 돋으면 물러가서 그들의 굴 속에 눕고 23사람은 나와서 일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

하나님은 물을 주셔서 각종 동물들이 갈증을 해소한다. 동물과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풀과 채소가 땅에서 나서 자라는 것도 하나님께서 물을 주시기 때문이다. 나무, 산, 바위 등을 하나님은 짐승들의 거처로 주기도 하셨다. 그런 것들이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라 각각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해와 달도 그렇다. 각각의 역할이 있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보고 있는 자연 현상들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돌보고 계심의 증거인 것이다. 가끔씩 밭을 보면 여러 채소들이 씨만 뿌리면 알아서 자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농부의 손길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작은 것들 하나하나 모두 관심을 가지고 돌보고 계신다. 그렇게 모든 것들이 살아가는 것이다.

단지 생존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을 부족하게 주지 않으신다. 특히 시편 기자는 15절에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포도주와 기름과 양식을 주시는 것을 언급하면서 그것으로 인해 사람의 마음이 기쁘고 얼굴이 윤택하게 되고 그 마음이 강해진다고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인해 만족하며 기뻐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시편 기자는 죄가 개입된 모습은 배제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짐승들의 평온한 삶이 아니라 처절한 생존을 보고 있지만, 그것이 본래 창조의 모습은 아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는 것은 창조의 뜻이다. 하지만 그것이 수고와 고통이 된 것은 죄의 결과다. 죄가 없다면 우리는 일을 통해 더욱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맛보며 즐겁게 살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질서 있게 또한 생명력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돌보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여기까지 기록하고 시편 기자는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감격에 겨워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한다.

104:24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과학은 성경의 적이 아니다. 과학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이 창조에 깃든 놀라운 지혜를 조금이나마 더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이 이 땅에 가득하고 우리가 그것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더 알 수 있는 것이고, 그 결과로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밖에 없다. ‘대자연의 놀라운 신비’에 감탄할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의 지혜에 감탄해야 한다.

시편 기자는 잠시 격앙된 감정을 추스리고 이어서 바다를 언급한다. 이는 창조의 다섯째 날에 대한 묵상이다.

104:25–26 거기에는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는 생물 곧 크고 작은 동물들이 무수하니이다 26그 곳에는 배들이 다니며 주께서 지으신 리워야단이 그 속에서 노나이다

두려움의 대상인 바다도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그 안에 있는 크고 작은 동물들도 다 하나님께서 두신 것들이다. 특히 ‘리워야단’이 여기서 언급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들이 있지만 사람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거대한 바다 동물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우리의 맥락에 맞게 의역을 한다면 대왕고래 정도일 것이다. 여튼, 그 리워야단 조차도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바다 속에서 즐겁게 놀고 있다. 하나님으로 인해 살고 만족하는 것이다.

땅에 있는 것이든 바다에 있는 것이든 모두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하나님께서 풍성히 먹이신다. 그래서 피조물들은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아가고 또한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하고 기뻐한다.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이 결론이다.

104:27–30 이것들은 다 주께서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28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29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30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이것이 모든 피조물들의 일생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다가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돌아가는 것들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다시 호흡을 주시는 것들이 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그렇게 창조를 반복하셔서 세상을 새롭게 하신다. 계속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들은 그렇게 지나간다. 하지만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지나가지 않고 영원히 계신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 모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계속해서 이 땅 가운데 선포되고, 창조 때 그 지으신 것들로 인해서 만족하고 기뻐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 피조물들로 인해서 즐거워하신다.

104:31–32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 32그가 땅을 보신즉 땅이 진동하며 산들을 만지신즉 연기가 나는도다

창조주는 피조물로 인해 즐거워하고, 피조물은 창조주로 인해 즐거워한다. 32절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자신을 드러내실 때 종종 함께 언급되는 현상이다. 지진과 연기다. 이는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신 위엄의 왕이시다. 하지만 자기 멋대로인 왕이 아니다. 오히려 그 권위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을 세심하게 돌보고 그들의 필요를 풍성히 채운다. 이 위대하며 선하신 왕께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반응(33-35절)

찬양하리로다(33절)

104:33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당연히 가장 먼저 할 일은 찬양하는 것이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평생토록, 살아 있는 동안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한다. 이것이 창조주, 주권자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다짐도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허락하신 시간 동안 다른 것이 우리 삶의 우선 순위에 있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명령했다(고전 10:31).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고 또한 삶에서 만족하고 행복한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다. 하나님이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시다.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하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하나님께로 가면 된다. 그러니 더 많은 것을 가져야겠다거나 더 즐겁게 살아야겠다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지 말라. 이상형을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 좋은 집이나 좋은 차를 사는 것,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재밌는 일을 하는 것 등, 그런 것들을 삶의 목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할 것은 평생토록 여호와를 노래하고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 안에 모든 만족과 기쁨이 있다.

즐거워하리로다(34절)

104:34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

다음으로 즐거워해야 한다. 여기서 ‘기도’는 무언가를 바라는 간구의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묵상이나 생각을 의미해서, 지금까지 시편 104편에 기록된 모든 말을 포함해서 33절에서 다짐한 평생의 찬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을 다짐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서 즐거워하겠다는 말이다. 우주가 아무리 광활하고 하늘이 아무리 아름답고 산맥이 아무리 장엄하고 바다가 아무리 경이롭다고 해도, 그 모든 것들은 결국 하나님의 존귀와 권위를 조금씩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한없는 영광의 매우 일부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보면서 그것으로 만족한다면 우리는 코스 요리의 애피타이저만 먹고 메인 요리를 버리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추는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계시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드러난 것을 통해 하나님을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 하나님으로 인해서 즐거워해야 한다. 은혜는 하나님이 아니다. 우린 계속해서 하나님을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즐거움이 오락가락하지 않는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늘을 통해 하나님을 봐야 한다. 우리가 즐기는 모든 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봐야하고,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즐기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곧 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만 즐거워하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해야할 일이다.

기대하리로다(35절)

104:35 죄인들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들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시리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

끝으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내리실 심판에 대해서 언급한다. 하나님의 창조를 묵상할 때, 우리는 지금의 죄로 인해 오염된 모습도 볼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의 말처럼 피조물들은 지금 탄식하며 고통을 겪고 있다. 시편 104편이 아름답게 묘사한 그 모습은 멀리서 볼 때만 그렇게 보인다. 가까이 가면 피조물들의 모습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노아의 때에 그러하셨듯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날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회복시키실 날이 있다.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실 날이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다시는 죄가 들어올 수 없는 더 온전한 세상을 하나님은 만드실 것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들이 들어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의롭다함을 얻은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평생, 아니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기 원하는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그런 자들에게 천국이 천국이다. 구원받은 자들은 그 날을 기대하며 살아야한다. 계속해서 할렐루야를 부르며 여호와를 송축하며 기대 가운데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도전

주위를 둘러보라.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것을 제대로 보고 알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것들을 통해 결국 하나님을 보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가을에 단풍을 기다리고, 겨울에 눈을 기다린다. 봄이 되면 꽃을 기다릴 것이다. 그것들이 주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피조물들로 인해서 기뻐하신다. 우리도 그 피조물로 인해서 기뻐하지만, 그 궁극적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어야 한다. 이 땅에 가득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을 보고, 하나님을 보라. 그분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라. 우리의 예배와 삶은 그런 만족과 기쁨의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