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주가 하셨다
본문: 사사기 4장 1절 ~ 5장 31절
설교자: 이병권
여러분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을 자주 하십니까? 어떨 때 쓰게 되십니까? 어떤 일을 했는데, 그 결과가 좋게 나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칭찬합니다. 그럴 때 ‘제가 노력한 결과로 얻은 거예요.’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아니면 ‘제가 한 건 없고 운이 좋았던 것뿐이에요.’ 어떻게 들리십니까? 믿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주님이 도우셔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하거나, 주님이 함께하신 결과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게 들립니다. 그래서 그런 의도로 ‘주님이 하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정말 ‘주님이 하셨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때도 있습니다. 상식으로 설명이 안 되는 일들,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 그럴 때 우리는 ‘주가 하셨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경험이 있지 않으십니까? 진심으로 주님이 하셨다고 고백했던 경우가 있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바라는 것은 ‘주님이 하셨다’는 나의 진심이 담긴 고백이 내 삶에 끊이지 않고 계속 되는 것입니다. 단지 과거의 좋았던 추억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주님이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싶은 겁니다. 내 삶에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 속에서 어떤 결과가 있든지 주님께 감사하며 결과를 받아들이며 진심으로 ‘주님이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 ‘주가 하셨다’는 고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로 주가 하셨다는 고백은 주님이 허락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은 기록된 순서로 네 번째 사사인 드보라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시작은 사사기의 반복되는 주기와 같습니다.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1) 사사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은 또 악을 행합니다. 이스라엘이 또 타락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번에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이스라엘을 넘겨주십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철병거입니다.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3)
야빈 왕에게는 당시 최첨단무기라 할 수 있는 철병거 900대가 있었습니다. 이 철병거 때문에 이스라엘은 20년 동안 심한 학대를 당합니다. 원문의 표현대로 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는 이유가 철병거입니다. 그만큼 철병거가 어려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야빈의 철병거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였을까요?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강한 존재, 고통은 극심했고 고통은 계속되었습니다. 철병거는 2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이스라엘을 억누르며 압박합니다. 철병거라는 존재가 정말 크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옛날이야기에서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무서운 존재가 호랑이로 소개되었다면, 이 시기에 이스라엘에는 철병거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너 자꾸 울면 철병거가 나온다’ 백성들에게 철병거는 정말 큰 문제로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괴로워하는 이스라엘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삶의 문제들을 있습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우리 삶을 무겁게 하는 철병거 같은 존재들이 있습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빠지기도 하고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에 두려움과 걱정에 사로잡힐 때도 있습니다. 답이 없는 가족 문제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자녀는 있어도 문제고 없어도 문제입니다. 때때로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살면서 이런 다양한 문제들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런 문제들 때문에 진짜 문제를 보지 못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일은 한 걸음 물러나서 문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문제들이 사실은 문제가 아닐 때가 많습니다.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세속적인 가치와 문화들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우리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다른 가치를 가지고 말씀을 좇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려움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미 각오한 일이며 예상한 일이며 주님 만날 때까지 계속되는 일입니다. 수고와 슬픔은 인생에서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 어려움에 우리 시선이 빼앗겨서 진짜 문제를 보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문제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고 있지 않습니까? 내 삶이 왜 이렇게 무기력하지? 내 삶에 어려운 일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까? 기다려 보지만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문제를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것을 답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철병거야! 저 철병거만 없으면 아무 문제없이 살 수 있을 거야!’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의 문제가 야빈과 그의 철병거 900대일까요? 철병거를 없애버리면 문제가 해결되는 걸까요? 사실 철병거가 900대가 있든지 9천대가 있든지 관계없습니다. 문제는 철병거가 아닙니다. 철병거는 주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왜죠? 그들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게 하시려고 허락하셨습니다. 문제는 철병거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 악을 행한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의 길에서 돌이켰고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문제는 철병거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이 문제였습니다. 문제는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나에게 문제는’ 우리 남편이야! ‘나에게 문제는’ 자식들이야! ‘나에게 문제는’ 직장이야! ‘나에게 문제는’ 저 인간이야! 아닙니다.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나에게 문제는”이 아니라 “문제는 나에게”입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습니다.
혹시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까? 그것이 배우자가 될 수 있고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웃이 될 수 있고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관계에서 어려움을 느낀다면, 그 관계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없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문제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거울이 되어 줍니다. 나의 상태를 보게 합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 나의 문제를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나의 배우자는 자신의 역할을 잘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녀들은 정말 누구도 따라할 수 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해서 부모의 성숙을 위해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정말 주님을 향한 열정으로 뜨거울 때,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정말 온 마음으로 고백할 때,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강렬함이 있었을 때, 그럴 때는 눈에 보이는 어려움들은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할 때, 주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으로 가득할 때 다른 현실적인 어려움은 문제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상황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상황에서 ‘주가 하셨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문제의 원인이 다른데 있지 않고 나에게 있음을 알고 나를 살피며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주가 하셨다’는 고백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둘째로 주가 하셨다는 고백은 주님이 역사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철병거를 거느리고 이스라엘과 대결합니다. 바락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는 다볼 산에 있었고, 시스라가 이끄는 철병거는 다볼 산 아래에 기손 강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군대가 산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공격합니다.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 주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하는지라 이에 바락이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에서 내려가니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14-15)
누가 먼저 싸우십니까? 하나님이 앞서 나가 싸우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셔서 그들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시스라는 어떻게 합니까? 그의 자랑이었던 병거에서 내려 도망합니다. 이 장면을 요즘으로 비유하면, 군인이랑 탱크랑 싸우는데 탱크가 더 이상 이길 수 없어서 탱크를 버리고 도망가는 겁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우리는 5장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 아마도 이 시기는 비가 오지 않는 건기였을 것입니다. 시스라의 군대는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해 기손 강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엄청난 비가 내려 강이 범람했고 온통 진흙탕이 되었습니다. 철병거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시스라도 병거를 버리고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큰 승리를 허락하셨습니다. “…시스라의 온 군대가 다 칼에 엎드러졌고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었더라”(16)
겨우 혼자서 몸을 피한 시스라는 여인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야엘의 장막에 이른 시스라는 그녀로부터 우유를 얻어먹고 잠에 빠집니다. 재미있는 것이 야엘이라는 이름인데, 그 뜻이 산염소입니다. 산에 사는 염소라는 뜻인데 시스라는 산염소, 야엘로부터 우유를 얻어먹고 최후를 맞습니다. 왼손잡이 에훗이 왕을 암살했던 것처럼 야엘은 시스라를 암살합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둡니다. 무시무시한 철병거 900대를 보기 좋게 격파하는 놀라운 승리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승리가 사사기 다른 이야기와 구별되는 것은 전쟁의 주인공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쟁을 지시하며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사사 드보라가 있었고, 직접 전쟁터에서 군사들을 이끈 장군 바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망간 시스라를 잡은 이방인 야엘이 있었습니다. 세 명의 주인공이 만들어낸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에서 여자들의 활약은 특별한 것입니다. 드보라는 유일한 여자 사사였습니다. 시스라를 잡는 영광도 여자인 야엘에게 돌아갔습니다. 세 명의 주인공, 그리고 주목할 만한 여자들의 활약, 그러면 이 전쟁에서 진짜 영웅은 누구일까요? “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신지라”(23)
전쟁의 진짜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병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약을 주신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능력을 베푸셨고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것은 큰 특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영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셨으니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셨다는 것은 영광을 주님께 돌린다는 고백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가 하셨다’는 고백은 이와 같습니다. “문제는 나에게, 영광은 주님께” 여러분이 처한 현실 속에서 어려움이 있다면 그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이김으로 주님께 영광돌리시기 바랍니다.
이어지는 5장은 4장의 사건을 또 다른 관점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4장은 역사적인 사실이고, 5장은 그 사건에 의미를 담아 부르는 노래입니다. 전쟁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시적으로 표현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5장에서 드보라가 백성들과 함께 승리를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주가 하셨음을 노래합니다.
우리 삶에 ‘주가 하셨다’는 고백이 계속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찾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주가 하셨다는 고백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찾는 것입니다. 삶에서 주님을 찾으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섬기며 주님과 함께 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시선이 5장이 아니라 4장에서 멈출 때가 많습니다. 주님을 경험한 개인적인 고백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로 그칠 때가 많습니다. 나에게 있었던 일들, 내가 경험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단순히 그로 인해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 나에게 어떤 유익이 있었는지, 그렇게만 사건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함께 하신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 그 속에서 나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그분의 메시지를 읽어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어두워져있고, 하나님의 세심한 손길을 느끼지 못할 만큼 마음이 무뎌져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사건을 통해서 누군가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찬양하는데, 누군가는 나에게 어떤 이득이 있는지 이해관계를 따지는 일에만 몰두하며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땅만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며 내 삶에서 주님을 찾으며 주가 하셨다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상황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으로 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러기 위해서 찾으십시오. 우리가 경험하는 작은 일들, 우리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주위의 일어나는 작은 일들, 스쳐지나가는 일들, 찬양의 가사들, 하나님 말씀들, 짧은 묵상과 기도,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인도하심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마치 숨은 그림을 찾는 것처럼 찾으시기 바랍니다. 숨은 그림은 답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그림이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것 같지만, 눈을 크게 뜨고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눈을 뜨고 있다면 하나님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주님이 함께 하시는 손길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삶의 작은 순간에도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내 삶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주님이 허락하셨음을, 주님이 역사하셨음을 고백하며 계속해서 그 선하신 손길에 내 삶을 맡겨 드리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참여하는 것입니다. 참여 하십시오. 계속해서 주가 하셨다는 고백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내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시간을 드리고 나의 힘을 드리고 나의 물질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일에 다양한 방법으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앞서서 가실 때 나도 그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드려서 주님을 섬길 때, 우리는 주님께서 준비하신 승리와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주님의 일에 뒤로 물러나며 주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기보다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이 된다면, 운동장에서 뛰는 선수가 아니라 관중이 된다면,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과는 관계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누군가는 주님의 일에 관련 없는 사람이 되고, 누군가는 은혜의 가장자리에서 겉도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교회가 공적으로 하는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그 일은 여러분이 주가 하셨다 고백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며, 주님이 하시는 일을 경험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선하신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일에 동참하든지 불참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들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5:23)
여기 저주를 받은 메로스라는 지역이 나옵니다. 메로스는 전쟁이 벌어졌던 곳과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그 지역의 주민들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가까이서 놀라운 승리를 경험할 수 있었는데,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두고 성경은 여호와를 돕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대로 모든 일을 성취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 일에 동참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참으로 축복된 일입니다. 반면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축복을 놓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주입니다. 축복과 저주를 선택하는 것은 나의 몫이고, 언젠가 반드시 그 결과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주님을 위한 일에 참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삶을 주님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열린 마음과 겸손한 태도로 주님을 찾으며 주님을 위한 일에 참여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삶에 역사하시는 주님을 경험하며 주님을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삶을 힘 있게 하고 우리 삶을 뜨겁게 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시간을 때우는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사는 것처럼 살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가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