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죄인이 죄를 지을때
본문: 사무엘하 11장~12장
설교자: 최종혁
어떤 시가 기록된 상황을 아는 것은 그 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본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 뿐 아니라 그 생각의 흐름과 감정의 깊이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시편에도 이렇게 상황을 정확하게 기록한 시들이 있는데 51편이 그 중 하나다.
특히 시편 51편은 참회의 시로서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편이다. 그런데 이 회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어떤 죄에서 돌이키는지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아주 구체적으로 시편 51편이 기록된 상황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
이 시는 다윗의 시이고 그 상황은 다윗이 밧세바와 동참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다. 이 상황은 사무엘하 11장부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우리가 흔히 “다윗과 밧세바” 사건이라 부르는 사건이다.
다윗을 생각해 보면 대부분 크게 두 개의 사건을 기억해낼 것이다. “다윗과 골리앗”이 하나이고 우리가 오늘 살펴볼 “다윗과 밧세바”가 다른 하나이다. 이 두 사건은 매우 흥미롭게 대조된다. 다윗과 골리앗 사건에서 우리는 두려움에 맞서는 믿음의 용사 다윗을 만나게 되고 다윗과 밧세바 사건에서 우리는 죄의 유혹에 무너진 한없이 연약한 인간 다윗을 만나게 된다. 한 설교자는 이 두 사건을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첫번째는 다윗이 거인을 무너뜨린 사건이고 두번째는 다윗이 거인에게 무너진 사건이다. 다윗이 무너뜨린 거인은 눈에 보이는 거인이었지만 다윗을 무너뜨린 거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거인이었다. 모두가 두려워하여 싸우고 싶어 하지 않았던 거인과의 싸움에서 다윗은 믿음으로 승리했다. 하지만 모두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욕망이라는 거인과의 싸움에서 다윗은 처절하게 패배했다. 다윗은 죄인이 죄를 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이 사건을 통해 제대로 보여주었다.
시편 51편은 단지 한 사람의 죄와 한 사람의 회개를 기록한 것은 아니다. 이 시편은 인도자를 따라 회중이 함께 부른 회개의 노래이기도 하다. 그만큼 다윗이 범한 죄 그리고 그로부터의 회개는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시편 51편의 회개를 보기에 앞서 사무엘하에 기록된 죄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죄를 짓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회개가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있다.
사무엘하 11장과 12장에 걸쳐서 기록된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죄인이 죄를 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3개의 질문을 통해 살펴볼 것이다.
- 죄인은 언제 죄를 지을까?
- 죄인은 어떻게 죄를 지을까?
- 죄인은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할까?
I. 죄인은 언제 죄를 지을까? (1-2절)
먼저 이 질문에서 전제로 삼고 있는 것이 있다. 성경이 여러 구절에서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은 모두 죄인이라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이 죄를 선택한 이후로 모든 사람들은 죄인으로 태어난다. 모두가 하나님의 바른 길에서 떠나 선을 행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그래서 다윗도 자신이 죄악 중에 출생하였다고 고백했다(시 51:5).
이 말은 잘못 들으면 죄에 대한 책임이 각 개인에게 없다는 의미로 들리기도 한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그렇게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것은 죄의 보편성이다.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죄인인 우리가 실제로 죄를 범하는 것으로 증명된다.
다윗도 다르지 않다. 사무엘서에서 그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여기까지 그는 위대한 믿음의 영웅으로 그려지지만 그렇다고 죄가 없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계속해서 추구했던 사람이었지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 역시 죄인이고 그래서 죄를 지었다.
그럼,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죄인은 언제 죄를 지을까? 다윗이 죄를 범하게 된 상황을 살펴보자.
삼하 11:1-2 [1]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2]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겨울이 지나 봄이 되자 이스라엘은 10장에 이어서 암몬과의 전쟁을 계속했다. 이 전쟁에 다윗은 직접 참여하지 않고 요압을 주축으로 군대를 보냈다. 10:7에서도 다윗은 직접 전쟁에 나가지 않았었고 그것이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여기서도 다윗이 출전하지 않은 것 자체가 그의 교만이나 나태함을 보여준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왕들이 출전할 때” 다윗 왕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라고 기록하여 다윗이 치열한 전쟁터가 아닌 평온한 자기 왕궁에 거하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2절의 말씀은 이런 평온한 분위기를 한층 돋운다. 다윗은 저녁이 되어 잠자리에 들려다가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을 거닐었다. 전쟁이 걱정되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단순히 잠이 오지 않아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충분히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뜻밖의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한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이 여인은 아마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목욕을 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다윗에게는 눈에 가장 잘 띄는 상황이 되었다.
여기까지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 여인이 매우 아름다운 매력적인 여인이었다는 것도 충분히 의도치 않게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다. 다윗이 의도적으로 그런 사람을 훔쳐보려고 옥상에 올라건 것도 아니었고 이 여인이 의도적으로 다윗을 유혹하기 위해 눈에 잘 보이는 곳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던 상황도 아니었다. 충분히 우연찮게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다.
다윗이 죄를 지은 상황은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일상적인 상황이었다. 목욕하던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처음 그곳에서 목욕을 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일상적인 상황이 다윗에게는 죄를 짓기 좋은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죄인이 죄를 짓기 위해서 어떤 특별한 상황이 필요하지 않다. 특별한 때에만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죄 짓기 더 쉬운 상황이 있기도 하지만, 그저 매일의 일상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다. 가장 경건한 것 같은 일을 하고 있을 때도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있다. 하나님과 성도를 위해 봉사하면서 동시에 불평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다.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서 그렇지 않은 누군가를 정죄할 수도 있는 것이 우리다. 우리가 죄인이어서 그렇다. 죄인은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이든 관계없이 죄를 지을 수 있고 또 죄를 짓는다. 죄인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죄를 짓는지 보자.
II. 죄인은 어떻게 죄를 지을까? (3-4절)
이 “어떻게”에 대해서 가장 잘 요약한 말씀은 바로 야고보서 1:14-15다.
약 1:14-15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즉, 죄인은 어떤 상황이든 자신의 욕심에 끌려서 미혹되고 죄를 범한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도 어떤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를 범하게 되지 않는다. 자신은 불가항력이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결국 자기 욕심, 욕망,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욕구를 따라 행하여 죄를 짓는다는 말이다. 다윗의 경우를 보자.
앞의 상황에서 다윗은 그냥 이 이야기를 끝낼 수도 있었다. 그저 하나의 해프닝이 있었던 날로 그 하루를 마무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그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기 시작한다. 1-2절은 다윗의 의도와 관계없이 벌어진 상황이었다면 3-4절은 다윗이 분명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스스로 만든 상황이다.
3절에서 먼저 그는 사람을 보내서 이 여인이 누구인지를 알아본다. 11장에서 꽤 중요하게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여기 “보내다”는 단어다. 대부분 다윗이 주어다. 다윗이 주도적으로 이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강조한다. 다윗은 이 여인이 누구인지를 알아오게 사람을 보냈다.
이 여인이 누구인지 왜 알고 싶었을까? 혹시 그 여인이 모르고 그곳에서 목욕을 하다가 또 다른 사람에게 보일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다윗은 그런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마 그 자신도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몰랐을 것이다. 단지 어떻게든 그 여인에게 접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지금 자신의 정욕을 따르고 있다.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죄가 되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다윗이 그것을 알고자 하는데 숨겨진 의도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어떻게든 그 여인에게 가까이 가고자 하고 있다. 정욕에 이끌리고 있는 것이다. 다만 아직 드러낸 행동은 죄가 아닐 뿐이다.
죄는 이렇게 시작된다. 정욕에 이끌릴 때 처음부터 죄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죄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힘들 때 위로해주려고 안아주는 것이 뭐가 나쁜가. 차가 없어서 태워준 것이 왜 잘못인가. 개인 교제가 필요하다고 해서 해준 것 뿐이다.” 이런 얘기들을 성적 범죄를 저지른 목사들이 한다. 당연히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가 문제다. 그런 일들을 자신의 정욕에 이끌려 하고 있었음을 그들은 몰랐거나 알면서도 애써 부인했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정욕을 계속 따라 갔을 때 마음의 죄가 행동의 죄로 드러난 것이다.
우리는 다를까? 그렇지 않다. 우리의 죄도 그렇게 시작된다. 아무런 해가 없어 보이는 생각, 결정 속에 나의 정욕이 자리잡고 있으면 결국 그 작은 것이 우리를 큰 죄로 이끈다. 하와에게 뱀은 “하나님께서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고 아주 단순한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을 생각해 보게 된 것이 결국 인류의 첫 범죄로 이어졌다.
다윗의 호기심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음은 이어지는 사건이 증명한다. 그는 그 목욕하던 여인이 자신의 충신의 아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럼 거기서 끝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정욕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일단 자신의 정욕을 따르기 시작하자 나머지 일들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다윗은 다시 사람을 보내 우리아의 아내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동침했다. 그리고 여인을 돌려보냈다. 단순한 간음을 넘어선 권력형 성범죄라고 할 수 있다. 우리아의 아내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다윗의 입장에서 그는 자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행사했다. 하나님 앞에서 명백한 죄다.
여기서 한가지, 사무엘하의 저자는 4절에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다”는 문장을 추가하였다.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그 여자가 월경을 끝내고 정결하게 하는 의식을 행한 상태에서 다윗과 관계를 가졌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관계 후에 레위기 15:18의 말씀에 따라 몸을 씻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이 문장의 위치상 후자가 좀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이 삽입구는 두 가지를 분명하게 강조한다. 하나는 이후에 5절에서 그 여인이 임신한 아기는 의심의 여지없이 다윗의 아기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다윗이 이렇게 범죄하는 과정에서도 율법의 계명을 신경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죄인이 죄를 지을 때는 모든 죄를 다 짓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원하는 그 죄를 위해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더욱 완벽하게 하려고 한다.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던 당시 종교인들을 보라. 그들은 한 사람을 죽이려고 애쓰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계명을 지키기위해 애썼다. 유월절을 지키는데 문제가 없게 하려고 일을 빨리 진행하기도 했고, 이방인인 빌라도의 집에 들어가서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빌라도를 찾아가서도 안에 들어가지 않는 모습도 보인다. 어찌보면 소름돋는 일이지만 우리는 죄를 지을 때 그렇게 한다. 다른 선한 일로 이 죄를 보상할 수 있을 것처럼 합리화를 하기도 하고 그 선한 일로 자기 죄를 덮으려고도 한다. 다윗이 지금 그렇게 하고 했다.
또 하나 여기서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그동안 다윗이 조금씩 드러냈던 그의 연약함이다. 다윗이 살았던 시대는 일부다처제가 용인되고 있었지만 다윗은 분명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러 아내를 두는데 있어서는 주저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도 나발이 죽자마자 자신의 아내로 취하였다. 그 외에도 아히노암, 마아가 등 여러 아내들을 두었고 공식적으로 왕이 된 후에도 예루살렘에서 처첩을 더 두었다고 성경은 말한다(삼하 5:13).
다윗의 이런 모습은 그가 다른 면에서 온전함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던 모습과 대조된다. 그는 그가 사로잡은 말들 중 병거 100대의 말을 제외한 나머지 말은 발의 힘줄을 다 끊어버렸다(삼하 8:4). 또한 그가 얻은 금과 은은 사유 재산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께 드렸다(삼하 8:11-12). 이런 일들은 일반적이지 않다. 하지만 다윗은 신명기의 말씀에 따라 병마를 늘이거나 재산을 쌓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는 말씀에는 그가 순종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성적인 부분에서 다윗이 연약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그 부분에 있어 욕망이 더 많고 강했다는 의미다. 자기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을 버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쓰레기를 버리는 것은 어렵지 않고 짐을 내려놓는 것도 어렵지 않다. 좋아하지 않고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자기가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버리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다윗에게 재물이나 병력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내려놓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성이라는 것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그가 가지고 있던 연약함이었고 그 정욕이라는 이름의 연약함은 적절한 상황이 되었을 때 다윗을 미혹하여 그를 넘어뜨렸다. 정욕이라는 이름의 거인이 다윗을 넘어뜨린 것이다. 심지어 다윗의 도움을 받아서 그렇게 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죄인은 어떻게 죄를 짓는가? 죄인은 자기 욕망에 따라 행함으로써 죄를 짓는다. 자기 연약함, 자기 욕심, 자기 정욕에 미혹되어 그것을 얻는 것을 최우선의 목적에 두고 의지적으로 행동한다. 그리고 그것이 죄가 된다. 그 과정에서 자기 합리화를 하고 선을 행하기도 한다. 결국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그렇게 한다. 다윗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우리도 같은 방법으로 죄를 짓는다.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이 아닌 그 하나를 얻기 위해 그 순간 최선을 다한다.
III. 죄인은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할까? (5-27절)
죄는 언제나 그 결과를 가져온다.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 죄는 없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 자신을 설득하려고 하고 사탄도 그것을 이용하지만, 거짓말이다. 죄는 반드시 그 영향력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이 결과에 대해 죄인은 어떻게 반응할까?
다윗에게 문제가 생겼다. 우리아의 아내와 동침하는 것으로 그가 원하는 것을 얻었고 다윗은 어쩌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녀가 임신을 한 것이다(5절). 다윗의 보이지 않던 죄가 그 결과로 인해 드러나게 된 상황이다. 왕이었던 다윗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다른 것보다 수치스러운 것이 가장 큰 문제였을 것이다. 우리아의 아내의 경우는 생사의 문제이기도 했다.
이에 다윗이 보인 반응은 죄에 대해서 죄인이 보이는 반응의 전형이다. 다윗은 죄를 감추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을 위해 또 다른 죄를 짓는다.
먼저 다윗은 기막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자기 아이를 우리아의 아이로 만드는 것이다. 이대로만 되면 아무도 다치지 않고 이 일은 잘 마무리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름이 아니라 가능한 빨리 우리아를 불러 그 아내와 잠자리를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럼 태어나는 아이를 우리아는 당연히 자신의 아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고 우리아의 아내는 굳이 친부가 누구인지를 밝혀서 자신의 죄를 드러낼 이유가 없으니 이 문제는 깔끔하게 해결될 것이다.
다윗은 이 순간에 죄를 회개의 문제가 아니라 해결의 문제로 생각하고 있다. 자신이 해결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있고 그 방법은 잘 감추는 것이었다.
문제는 우리아가 충성스러운 군인이었다는 것이다. 우리아를 불러 무의미한 안부를 물은 후에(7절) 다윗은 우리아를 집으로 보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집에 가지 않았다. 충성스러운 우리아는 다윗에게 이렇게 말했다.
삼하 11:11 우리아가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 하니라
참 눈물겨운 충심이지만 다윗에게는 애가 타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술을 마시게 하고 집으로 보내려고 했지만 그 역시 실패하게 된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할까? 포기하고 자신의 죄를 자백할까? 그렇지 않다. 지금 다윗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또 다른 계략을 세운다. 우리아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우리아가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에 그는 우리아를 죽일 계획을 세운다.
이 살인 계획도 다윗은 왕의 위치를 이용해 어렵지 않게 실행할 수 있었다. 그는 우리아의 손에 요압에게 보내는 편지를 들려 보낸다. 그리고 그 편지에는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라고 적혀 있었다(15절). 결국 우리아는 그렇게 죽음을 맞이 하게 되고 다윗은 계획대로 우리아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는다.
첫번째 계획의 실패로 약간의 위기는 있었지만 모든 일은 잘 해결되었다. 다윗은 수치를 당하지 않았고 우리아의 아내도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아가 속임을 당하여 죽었을 뿐이다. 다윗의 죄는 그렇게 숨겨졌다. 최소한 다윗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죄인은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할까? 숨기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또 다른 죄를 범한다. 다윗의 간음의 죄는 거짓과 모략의 죄로 이어졌고 이제 살인죄가 되었다. 그것을 다윗은 죄 문제의 해결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죄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똑 같은 생각을 한다. 어린아이가 이불을 뒤집어 쓰면 자기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는 죄가 드러나지 않으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쩌면 사실이다. 죄가 인간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면 그렇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죄는 그렇지 않다. 죄는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그래서 모든 죄는 십계명의 제 1계명을 어기는 일이다. 다윗이 자신의 욕망을 일순위에 두고 좇을 때 그는 하나님 외에 자신의 욕망을 자기 앞에 두고 좇았던 것이다. 성경이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말하는 이유도 동일하다.
죄 문제는 숨기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님께는 어떤 죄도 숨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죄는 당사자들끼리의 합의로 해결될 수도 없다. 하나님도 당사자이시기 때문이다. 죄 문제는 숨기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다. 오히려 죄는 드러내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한다. 그 모든 죄를 하나님은 보시고 하나님은 그 죄를 악하다고 하시기 때문이다(27절).
그런데 이것이 정말 쉽지 않다. 죄인이 가장 원하지 않는 것이 바로 죄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죄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죄를 드러내는 일이다. 다윗을 사랑하셨던 하나님은 이제 다윗의 죄를 드러내셔서 그가 회개를 통하여 진정 죄 문제의 해결을 경험하게 하신다.
지금까지는 다윗이 계속해서 사람들을 보내 죄를 주도했다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단을 보내셔서 그의 죄를 드러내시고 회개하게 하신다(1절). 다윗의 죄를 드러내고 책망하실 때 하나님은 먼저 다윗 스스로가 죄의 심각성을 알게 하셨고 결정적으로 그 모든 일에서 그가 “여호와”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긴 것임을 알게 하셨다. 이런 하나님의 책망에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12:13)고 반응하였다. 이 짧은 고백의 깊의 의미를 다윗은 시편 51편에 기록해 두었다.
도전
가끔은 내가 어떤 것을 아는 것이 부끄러울 때가 있다. “내가 이런 건 왜 알고 있는거야”라며 자책하게 될 때가 있다. 다윗이 죄를 범하는 이 과정을 묵상해보면서도 그랬다. 다윗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다윗이 왜 넘어졌는지를 이해하는데 많은 고민이 필요 없다. 나도 그렇게 넘어지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상황에서 죄를 범하고 유혹에 미혹되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살려고 하고 내 죄를 숨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전혀 낯설지 않다. 너무나 익숙하다. 내 안에도 나를 무너뜨리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거인이 있다. 즉, 이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하는가?
다윗의 경우든 우리의 경우든 죄인이 죄를 지을 때 나타나는 근본적인 특징이 하나있다. 바로 자신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11장에서 다윗이 그랬다. 우리 관점에서 어떤 죄는 죄가 아닌 것 같다. 어떤 행동은 죄와 관계가 없는 것 같다. 그러니 내가 원하는 그것을 해도 별 해가 될 일은 없을 것 같다. 어떤 죄의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굳이 이것을 드러내서 문제를 크게 만들 이유가 없을 것 같다. 이렇게 저렇게 하면 잘 해결될 것 같다. 실제로도 잘 해결된 것 같은 경우들도 많다. 하지만 이것은 죄의 문제를 우리 시각에서 본 것 뿐이다.
일단은 이런 생각을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각에서 봐야한다. 다윗은 나단을 통해 자신이 했던 모든 일을 자기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서 바로 볼 수 있었고 바르게 판단할 수 있었다. 지금 만약 이런 죄의 문제를 겪고 있다면 자신의 상황에서 한걸음 물러설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옳다”고 진심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회개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회개가 정욕에 미혹되어 죄에 빠진 우리를 구원하여 회복으로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