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본문 : 누가복음 5장 27~32절

설교자 : 조정의

 

오랜만에 누가복음 공부를 다시 시작합니다. 우리가 누가복음의 어디쯤 와 있는지 잠시 말씀드리기를 원합니다. 누가복음의 핵심 주제는 바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인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19:10).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아로서 참 사람이시고 동시에 하나님이신 분입니다. 누가는 처음 4장의 기록을 통해 그분이 진정 약속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하여 입증하였습니다(가브리엘을 통한 계시와 그 성취, 성령충만을 받은 자들의 증언(엘리사벳, 세례 요한, 시므온과 안나), 세례 요한의 선포, 삼위일체 하나님의 증언, 마귀의 유혹을 이기심)  예수님은 그 이후 유대와 예루살렘 지역에서 사역을 하셨고 오직 요한만 예수님의 일 년여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는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을 시작으로 그분의 공적인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은 그분이 태어나신 동네인 나사렛에서 시작되지만 그곳에서 배척을 받으시고(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함(4:29)) 갈릴리 호수 주변의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4:31). 누가복음 9장 51절에는 예수님이 이 갈릴리를 떠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그 전까지 예수님은 계속해서 갈릴리 지역에서 일년 반의 기간 동안 안식일에는 회당에서, 평일에는 산이나 바다에서 잃어버린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때론 병을 고치기도 하셨는데 그 능력은 예수님께서 능력과 권능이 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주었고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확증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43 내가…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도 가버나움에서 있었던 일이며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복음을 전하셨던 장면 중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죄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인을 부르고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 죄인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회개하였지만 또 다른 죄인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일까요?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이 점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두 종류의 죄인과 그들을 불러 회개케 하신 예수님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스스로를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돌아볼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먼저 등장한 죄인의 이름은 레위입니다. 레위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마태였고 알패오의 아들이었습니다(마 9:9-13; 막 2:13-17). 마가복음 2장 13-14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갈릴리 호수로 나가셨고 그곳에 큰 무리가 나왔을 때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발견하셨습니다. 그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세금을 거두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은 세무서에서 일하는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만, 예수님 당시 세리들은 사회적으로 아주 악한 사람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에 종속된 나라였습니다. 세리들은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있는 로마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매국노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방인을 위해 일하다니 민족적으로도 변절자였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백성들에게 돈을 걷어 로마 정부에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로마에서는 일정 지역에 일정한 액수를 할당하고 그 지역에 세금 징수하는 권리를 최고 입찰자에게 팔았습니다. 그 권리를 사는 사람이 세리가 되어 할당된 세금을 연말에 로마 정부에 넘겨주면 되었던 것입니다. 세금징수권을 입찰하기 위해 땅을 팔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 자손의 약속된 땅을 로마 정부를 위해 일하기 위해 판다는 것은 유대인에게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정확하게 얼마의 세금을 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처럼 세금을 정확하게 계산하여 고지서로 보내줄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백성들의 무지를 이용하여 더 많은 세금을 착취했습니다. 당시에는 수많은 세금들이 있었는데 인두세라고 하여 생존한 사람(14-65세 남자, 12-65세 여자)이 무조건 내야하는 세금, 토지세라고 하여 모든 곡물의 1/10, 그리고 포도와 기름의 1/5을 내게 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수입의 1%를 내는 소득세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갖가지 종류의 의무세가 있었는데 주요 도로 사용로, 항만, 시장 사용료, 짐마차의 각 바퀴마다 매기는 세금, 마차를 끄는 동물에 매기는 세금(오늘날로는 자동차세), 구매세(상품 구매시), 수출입세도 있었습니다. 특정 상품에 대한 세금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자를 불러 세워 짐을 풀게 하고 원하는 만큼 상품에 대해 세금을 물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세금을 낼 수 없으면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 세금을 내도록 강요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거의 폭력배와 같죠? 세례요한에게 나온 세리들에게 요한이 “부가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세리들은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 백성들이 가진 것을 갈취했기 때문입니다. 로마 정부에 바칠 일정금액 이외의 많은 것들을 빼앗았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세리만큼 죄인도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과거 친일파를 죄인으로 취급하듯 세리들은 항상 죄인과 같은 부류로 취급되었습니다. 유대인 회당에 들어갈 수 없으며, 법정의 증인으로도 설 수 없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어울리는 사람은 같은 세리들과 죄인들 매춘부들이었습니다. 유대교의 전통적 가르침 중 하나인 탈무드는 “언제든 원하면 세리를 속이거나 거짓말할 수 있다”고 말하며 유대인 문서에서는 ‘세리가 회개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들이 용서받는 것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오늘도 레위(마태)는 세관에 앉아 세금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많은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를 향한 경멸과 분노 비난의 눈길로 그를 봤을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우리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쳐지나가며 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깊게 자세히 보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인을 향한 주님의 동정심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항상 죄인을 향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마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수님은 모두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했던 세리 마태를 불쌍히 지켜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자기 자신을 위해 살던 삶에서 돌이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라고 부르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회개입니다. 자신이 살던 삶의 방식에서 돌이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레위에게 회개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레위는 아마도 예수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회당엔 들어가지 못했을지라도 바다에서 산에서 거리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을 듣거나 예수님을 통해 고침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분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바로 결단합니다. 기존의 삶을 청산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원합니다. 그의 회개는 아주 분명했습니다. 28절을 보면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세금징수권을 사기 위해 가진 것을 팔았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비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견뎠던 것은 세리로서 그가 누렸던 권력과 특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다시 세리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가 가진 특혜를 다 포기하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와 형제들도 배와 그물을 버렸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돌아가서 고기를 잡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한번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세리가 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레위는 그 모든 것을 완전히 잃는다 해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이 더 가치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의 모습입니다. 자신이 가던 길에서 완전히 돌이키는 것입니다. 자신이 추구하던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예수님이 제시한 그것을 더 사모하여 그것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회개한 레위는 예수님을 위해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29절). 보통 이런 식사를 통하여 교제하면서 영적 대화를 나누곤 하였는데 레위는 자신을 불러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과 같은 죄인의 삶을 살고 있는 세리들과 다른 사람을(죄인들-마태,마가) 많이 초대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하늘나라에 홀로 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잃어버렸던 영혼이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것을 혼자 간직하고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레위는 자신이 받은 회개의 부르심을 동료들과 나누기 원합니다. 그래서 큰 잔치를 열었고 예수님을 초대하였습니다. 마가복음은 그러한 자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랐다고 합니다(막 2:13-17). 예수님은 그들에게도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두 번째 종류의 죄인들은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입니다. 세례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받으러 나온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하였습니다(마 3:7). 예수님은 그 어떤 죄인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강력하게 비판하셨습니다. “화 있을 진저”라고 꾸짖으시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외식과 탐욕에 대해 회개할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예수님 입에서 나온 가장 심한 말은 거의 이 바리새인들에 대한 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레위와 그 동료들이 모인 잔치 주변에 어슬렁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차마 그 모임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어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눅 11:38). 그들 스스로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았겠지만 적어도 세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경건하고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 그들은 밖에서 이 잔치를 들여다보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 더러운 죄인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에 격분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마태복음에 따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이라고 책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직접적으로 묻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따르는 선생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너희가 따르는 선생이냐?”라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를 이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율법의 학자였던 이들은 전도서 7장 20절의 말씀을 몰랐을까요?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백성을 대표하여 기도했던 것을 모르고 있었을까요?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열왕기상 8:46) 그들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종류의 죄인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남들과 비교하여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과 자신들을 분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어느 정도 경건하고 의로운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31-32절)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 건강하다면 의사는 쓸데없습니다. 하지만 병든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은 의사입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의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영적 의사입니다. 영적으로 병든 자, 죄인을 찾아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오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겐 내가 필요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건강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의인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말합니다. 바리새인의 문제는 그들이 의인이라서 예수님이 필요 없었던 것이 아니라 죄인임에도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탐욕과 외식으로 가득차 나병환자처럼 병의 심각성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죄인 중의 죄인이었지만 자신은 아주 건강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대답을 듣고서 “저도 건강하지 못합니다. 저도 의인이 아닙니다. 저를 불러주십시오. 저도 회개하고 싶습니다”라고 해야 했습니다. 베드로처럼 “주여 저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를 건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죄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남들에 비하여 심각한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저 더러운 세리나 죄인들고 비교해서 말입니다. 자신들이 하고 있는 경건한 삶으로 어느 정도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부르심을 거절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두 종류의 죄인을 만났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었습니다. 한 죄인은 세상의 비난을 받는 죄인 중의 죄인이었습니다. 매국노에 변절자에 탐욕스러운 죄인이었습니다. 모두가 그를 비난하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예수께서 찾아오셔서 그를 불쌍히 바라보시고 부르셨을 때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떠나 예수를 따랐습니다. 진정한 회개를 하였습니다. 또 다른 죄인은 사회적으로는 존경을 받는 무리였습니다. 경건한 삶을 살기도 하고 종교적으로도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었습니다. 외식과 탐욕으로 가득한 자들이었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 비하면 자신은 그렇게까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회개하라고 하셨을 때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여긴 그들은 참된 의사이신 예수가 필요 없었습니다. 한 죄인은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겸손히 인정하고 회개하여 따랐습니다. 또 다른 죄인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교만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예수님의 부르심이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쪽은 겸손했고 다른 한 쪽은 교만했습니다. 한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 앞에 자신의 영적 가난과 비천함을 알아 겸손히 자신을 낮추었지만 다른 한 쪽은 스스로 교만하여 하나님 앞에서 권세를 부리고 영적으로 부하다고 자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겸손한 자에게 임했습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문안하면서 성령에 감동을 받은 엘리사벳의 찬가를 듣고 이렇게 노래합니다(눅 1:49-53)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 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솔로몬은 잠언에서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고 하였습니다(잠 18:12).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세상에 의인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입니다. 그분의 의의 기준은 하나님처럼 온전한 것입니다(마 5:48). 그 누구도 하나님처럼 자신이 완벽하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풍성한 긍휼과 넘치는 자비로 그 아들 예수를 보내주셔서 회개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죄인을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은 두 가지 입니다. 겸손히 그 음성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교만하게 나의 의를 내세울 것인지 이 둘 중 하나입니다. 겸손한 자는 죄가 아무리 많아도 죄가 아무리 심각해도 허다한 사랑이 그 죄를 덮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돈을 빼앗은 강도도 예수님의 자비를 맛보았습니다. 교회를 핍박하여 성도를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죽이는데 일조한 자도 하나님의 자비를 맛보았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배신하고 백성의 가죽을 벗겨먹던 세리도 자비를 맛보았습니다. 겸손히 죄인임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회개하여 돌이켰을때 그에게 구원이 임했습니다. 교만한 자는 스스로 죄가 아무리 적다고 느낀다해도 하나님의 용서를 맛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거스른 죄에 대해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보고 자신이 죄인임을 알았는데도 교만하게 그 것을 거절한다면 용서받을 길이 없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31)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32절)

아직까지 예수님을 따르지 아니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당신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당신의 삶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떠나 잃어버린 자처럼 방황하는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 삶에서 돌이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따르고 계신 분들은 어떻게 부르심을 받았는지 기억해보시기 바랍니다. 마치 내가 의인이라서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것처럼 정치인이나 죄인들, 세상 친구들을 비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더 낫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마태처럼 내가 만난 자비의 하나님을 소개하기 위해 그들을 초대하는 사람이 되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그들을 불쌍히 바라보고 그들에게 진리를 접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자들이 되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회개하여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마땅한 삶입니다. 우리가 받은 자비를 그들에게도 전해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