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좋은 교회2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1장 2절 ~ 4절

설교자: 최 종 혁

 

따를 수 있는 본이 있다는 것은 참 좋다. 특히 운동 같은 것은 아무리 글로 읽고 말로 들어도 한번 보고 따라하는 것만큼의 효과를 내기 힘들다. 우리 삶은 어떤가?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처음이다. 그렇다고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실전으로 단 한번 사는 것이 우리 삶이다. 한번뿐인 삶을 사는데 있어서 내가 본으로 삼고 따를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큰 복이다. 그래서 서점에 가면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책들이 많은 것이다.

교회도 그렇다. 교회에 관한 많은 글과 철학들이 있지만 사람들은 실제적으로 ‘잘 되는’ 교회를 찾고 그런 교회를 모방하려고 한다. 그래서 기독서적 중에는 ‘성공한 교회’에 대한 책들이 많다. 어떤 면에서는 도움이 되지만, 많은 책들이 그저 자신들의 기준에서 ‘성공’한 ‘방법’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에 목숨을 걸어라. ~하면 부흥한다. ~교회 이야기”와 같은 제목으로 그것만 하면 교회가 잘 될 것처럼 말하는 책들이 많다.

우리가 원하는 교회를 세우려면 그런 것들이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교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좋은 교회의 원리 뿐 아니라 좋은 교회의 본도 찾아 볼 수 있다. 그 중 데살로니가 교회는 우리가 모델로 삼기에 좋은 교회다.

 

바울은 편지의 시작에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한다(2절). 그들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릴 수 있었다는 말이다. 이 좋은 교회의 특징을 바울은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한다. –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

 

I. “믿음의 역사”

먼저 이 교회의 믿음은 역사했다. 역사하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고 이들은 참된 믿음을 가진 자들로서 그들의 믿음이 그들의 삶에서 역사했다. 그들의 삶을 바꾸었다는 말이다.

누군가 산에 들어가 한달 동안 수행을 하고 큰 깨달음을 얻어 이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데 그 사람의 삶이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이전과 전혀 다르지가 않다면 그 사람이 말하는 깨달음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비록 그 깨달음이 진실이라고 해도 누구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데살로니가인들의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일 수가 없었다. 구원받는 믿음은 역사하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 역사는 기본적으로 ‘믿음’의 역사다.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의 원인이 믿음에 있다는 말이다. 구원받고 새롭게 된 마음에서 시작된 자연스러운 삶의 변화다. 이 변화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 분명한 변화, 성경적 변화

믿음의 역사가 분명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변화가 그들에게 있었다는 말이다. 성경적이었다는 것은 그 변화의 방향, 기준, 경계와 균형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했다는 말이다. 단순히 변화가 눈에 보이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기에 괜찮은 변화가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변화가 성경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변화이어야 한다. 말씀에 따라 마음이 변화되고 그것이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 믿음의 역사다.

모두의 믿음의 역사가 동일하지는 않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 믿음의 역사가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동일할 수 없고, 우리 각자도 서로 다른 믿음의 역사를 나타낸다. 모습은 다르다. 하지만 믿음은 동일하고 그 믿음이 역사한다는 사실도 동일하다. 그들의 믿음이 분명하게 성경적으로 역사했듯이, 우리의 믿음도 그러해야 한다.

 

II. “사랑의 수고”

사랑의 수고는 ‘사랑’ 때문에, 사랑이 동기가 되어 하는 수고들을 말한다. 수고는 앞에서 말한 역사와는 조금 다르다. 둘 다 ‘일’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역사는 일 자체를 강조하고 수고는 그 일을 하게 하는 혹은 하려는 노력을 더 강조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애쓰고 고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의 수고는 나타나는 결과 보다는 그 일을 하는 동기와 노력을 더 강조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고 하셨다. 즉, 사랑을 보이는 것, 나타내는 것 또한 제자됨을 나타내는 일인 것이다. 특별히 예수님은 이것이 새 계명이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라고 말씀하셨다.

이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 중 하나가 바로 사랑이다(요일 4:8). 그래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요일 4:7), 그 사랑의 참 모습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났다.

요일 4:9-10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이 사랑에 대한 반응은 무엇일까?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조금 다르게 말한다.

요일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하나님을 이같이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요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조금 앞선 말씀에서도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마땅한 반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강조한다. 왜 그럴까?

요일 4:19-21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형제를 사랑한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특징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가 누구인가? 믿는 자들이다. 구원 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보이는 형제들, 자매들, 이웃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쉽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사랑으로 그 사랑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진 것처럼 우리의 사랑도 서로를 사랑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이 사랑의 가장 큰 특징은 희생적으로 상대방의 유익을 구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최고의 유익인 죄 사함을 위해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시는 것으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다.

그리스도인들의 사랑도 이렇다. 희생적이고 이타적인다. 사랑 때문에 수고하는 것이다. 사랑이 동기가 되어 움직이는 사람은 대강하거나 소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의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 의무적으로 하는 일에 대해서 우리는 소극적이 된다. 꼭 해야 하지 않으면 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더라도 꼭 필요한 만큼만 하려고 하지 더 이상은 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의 수고는 다르다. 사랑은 수고한다.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대상에게 어떻게 하는지 생각해 보라.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 이상을 하려고 한다. 할수만 있다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더 하려고 한다. 능력의 한계로 어떤 상황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한다. 적극적으로 하려고 하고 최대한으로 하려고 한다. 그것이 사랑의 수고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구원받은 자의 특징 중 강력한 하나로서 제시한다. 베드로도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벧전 1:22)라고 말한다. 즉, 구원받은 자라면 이런 사랑이 그 안에 자연스럽게 있어야 한다. 그것이 얼마나 잘 드러나는지는 신앙의 성장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그 씨는 이미 그 안에 있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런 사랑의 수고가 있는 교회였다. 먼저는 바울과 그 동역자들이 이런 사랑의 수고의 본을 보였다.

살전 2:8-9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바울은 그 교회를 사랑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삶과 생명까지도 주기를 기뻐했다. 그의 사랑이 그들을 위해 수고하게 했던 것이다. 특히 바울은 경제적으로 그들에게 폐를 끼치기를 원하지 않아서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살후 3:8-9 [8]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이 그렇게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본을 보이려는데 있었다. 일하기 싫어하고 게으르며 일만 만드는 자들에게(살후 3:10-11) 일하라고 가르치면서 그에 합당한 본을 보이기 위해 수고했던 것이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하지 않았다. 복음 전하는 일하는 자로서 그에 합당한 값을 받을 권리가 바울에게 있었다. 특히 그는 사도로서의 권위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성도들이 보고 따라올 수 있는 본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좋은 본을 보이기 위해 그는 불필요한 일을 했던 것이다. 이것이 사랑의 수고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떠했을까? 그들도 그렇게 했을까?

살전 4:9-10 [9]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10]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그들은 서로 사랑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의 마음에 부은 바 되어(롬 5:5) 그들은 사랑할 수 있었고 그렇게 사랑했다. 자신들의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마게도냐 지역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이 사랑을 베풀었다.

특히 고린도후서 8장을 보면 바울은 이들이 어떻게 경제적인 측면에서 이런 사랑의 수고를 했었는지를 말해준다.

고후 8:1-5 [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 교회의 경제적인 필요를 마게도냐에 있는 교회들이 도운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빌립보와 함께 마게도냐에 속한 대표적인 교회다. 바울은 이들이 했던 일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던 것임을 먼저 밝힌다(1절). 이들은 풍성한 연보(헌금)을 드렸다. 바울은 그들이 넘치도록 하였다고 하고 힘에 지나도록 드렸다고 말한다(2, 3절). 그들 자신도 환난과 시련 가운데 있었다. 가난한 자들이었다(2절). 하지만 그들은 기쁨으로 드렸고 오히려 이 일에 참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자원하며 간절히 구했다(2-4절). 어쩔 수 없이 가난한 성도들이 있으니까 도와야지하는 마음으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의 이런 모습은 바울이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5절). 그들이 했던 모든 것은 그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먼저 드렸기 때문이고 그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에게 자신을 준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성도들을 사랑한 바로 그 모습이다. 의무감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 수고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사랑이 진실하다는 것을 증명했다(8절).

고후 8:8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도 이렇게 할 것을 촉구하며 그렇게 하여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르게 말하면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렇게 했던 것은 그들의 사랑이 진실하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랑의 수고는 반드시 돈으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수고는 무엇을 통해서든 가능하다. 돈이 될 수도 있고 가지고 있는 재능이 될 수도 있다. 육체적인 강함이 될 수도 있고 섬세함이 될 수도 있다.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젊음이 될 수도 있고 나이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해 우리는 사랑의 수고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의 수고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성도가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통해서든 그 사랑이 흘러나올 수 있다. 그 사랑의 수고를 통해 우리는 서로 균등하게 된다.

고후 8:13-14 [13]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14]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특별히 바울은 여기서 경제적인 부분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무엇이든 마찬가지다.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필요 이상으로 가진 것들이 있고 그것으로 사랑의 수고를 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필요’ 이상을 가지고 있으면서 여전히 그것을 ‘필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금만 더 나눠주기를 생각하고 너그러운 자가 된다면(딤전 6:18), 우리가 조금만 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임을 생각한다면(고전 4:7), 우리가 조금만 더 사랑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해서든 사랑할 수 있다. 최소한이 아니라 최대한으로, 소극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사랑의 수고이고, 데살로니가 교회의 사랑은 이렇게 수고했다.

 

III. “소망의 인내”

그들의 믿음은 역사하였고 사랑은 수고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소망은 그들로 하여금 인내하게 하였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처음 바울이 전도를 해서 교회가 세워질 때부터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았다. 큰 권력이나 부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사는게 힘든 세상 속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교회는 거기에 더해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이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나면서 그들에게 큰 어려움이 계속해서 있을 것에 대해서 그들에게 경고를 해줄 필요도 있었다(살전 3:4). 4:13에서 언급한 “자는 자들”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죽은 성도들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특별히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로서 환난 중에 죽거나 죽임을 당한 자들을 언급하는 말일 수도 있다. 그만큼 그들의 상황은 쉽지 않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들은 인내했다. 그들의 믿음을 버리지 않고 사랑의 수고를 계속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근간에 있는 것이 바로 소망이다.

첫째로 이 소망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강림, 다시 오심에 대한 소망이었다(4:13-5:5).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지금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그에게 속한 자들을 데려가셔서 영원히 그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라는 소망이다(살전 4:13-17). 또한 이 소망은 그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교회를 핍박한 자들에 대한 피할 수 없는 공의의 심판에 대한 것이다(살전 5:2-3). 극심한 환란 때문에 그들은 이 소망을 지나치게 붙들어 잘못된 교리에 빠지기도 했지만 (살후 2), 그들은 그 소망을 가지고 살았다.

둘째로 이 소망은 인내하는 소망이고 인내하게 하는 소망이다. 바울은 그들이 환란 가운데서 인내할 수 있을까 걱정을 했었지만(3:5) 그 걱정은 오히려 기쁨으로 돌아왔다(3:6). 데살로니가 교회는 오래되지 않은 어린 교회였지만 그들은 고난 중에 넘어지지 않고 그들의 믿음을 지켜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다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소망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불확실한 미래에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좋은 것이 있을거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 그냥 좋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소망은 확실한 것이다. 정해진 것이다. 반드시 올 것이다. 다만 지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라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이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의 약속이 확실하고 그 약속을 하신 그리스도가 확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죽음 전에도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다시 오실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요 14:3). 승천하실 때 천사들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실 것에 대해 말해주었다(행 1:11). 계시록 끝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도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였다(계 22:20).

이 소망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 인내는 수동적이지 않다. 인내는 고난 가운데 견디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현재의 어려움이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어떻게든 견디고 버텨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소망으로 그들 현실의 어려움을 인내했을 뿐 아니라 서로 격려하며 계속해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를 했다. 그래서 바울도 그들에게 서로 위로하고 격려할 뿐 아니라 더욱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8)라고 명한다.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거룩한 그분의 백성들로서 드러나기를 구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은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면서 오늘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면서 오늘을 투자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볼 것이다(계 1:7). 누군가에게는 기쁨의 소식이고 누군가에게는 절망의 소식이다. 믿는 자라면 기쁨 가운데 그리스도의 오심을 소망한다. 여기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러했다. 우리도 그런 소망 가운데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

 

도전

다시 바울의 감사로 돌아가 보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며 그들에게서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기억했다. 이들이 보인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했던 일들이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3절)

한글 번역에서는 “기억함이니”를 수식하는 말로 사용되었지만, 앞의 역사, 수고, 인내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우리의 믿음과 사랑, 소망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 이 땅에서 그 열매들은 사람을 향한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하는 일이다. 그 일들이 참된 구원의 열매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4절)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통해 분명해 진 것은 그들이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자였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것”으로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셔서 택하셨고 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정도 이런 열매를 드러낸다. 믿음이 전혀 역사하지 않고 사랑의 수고가 전혀 없으며 소망 중에 전혀 인내하지 않고 있다면 그런 사람을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구원받은 자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이런 열매들을 맺는다.

좋은 교회는 교회의 각 지체가 이런 특징을 더욱 분명하게 그리고 풍성하게 나타내는 교회다. 우리 교회가 궁극적으로 좋은 교회가 되려면 교회에 돈이 많아야 하거나, 건물이 더 크고 좋거나, 영향력 있는 사람이 많아지거나, 좋은 프로그램을 도입하거나 하는데 있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바로 교회의 한 지체로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성도 한 사람 한사람의 역사와 수고와 인내가 한 교회의 역사와 수고와 인내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도들이 하나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면 그 교회가 좋은 교회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열매들이 교회의 여러 사역 가운데 나타날 것이다.

좋은 교회에 다니길 원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좋은 교회가 되라. 개인의 삶에서 계속해서 말씀에 순종하며 변화되어 가라. 이것이 믿음의 역사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적극적으로 최대한으로 나에게 주어진 것을 나누라. 이것이 사랑의 수고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하는 가운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라. 그것으로 힘을 얻고 그것으로 자극을 받으라. 그것이 소망의 인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런 교회가 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 받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