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전도의 지혜
본문 : 사도행전 17장
설교자 : 조정의
전도에 지혜가 필요할까? ① 교통사고 합의 조건 전도 ② 예수 천당 불신 지옥(지하철 전도, 방문 전도) ③ 개(dog), 거꾸로 하면 하나님(god) ④ 전도 폭발 훈련 질문(오늘이라도 이 세상을 떠나신다면 천국에 갈 확신이 있으십니까?) ⑤ 교회를 싫어하는 자녀를 교회 오게 하는 것이 지혜로울까? ⑥ 교회를 오고 싶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구도자에게 편안한 환경으로 바꾸는 것?
전도는 원래 “미련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무식하게 전해도 결과가 좋으면 그만. 바울이 고린도 교회 쓴 편지에 보면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하지 않았나?(고전 1:21). 하지만 이 말씀은 전도의 내용이 세상 지혜로 볼 때 미련해 보인다는 말이지 전도의 방법이 미련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고전 1:18-20).
또한, 같은 편지에서 바울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라고 썼다(고전 2:4-5). 이 역시 전도의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지, 전도할 때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전도엔 지혜가 필요하다. 물고기를 낚는 어부에게 지혜가 필요하다면 사람을 낚는 어부에겐 당연히 지혜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오늘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전도의 지혜를 가르쳐주시길 바란다.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시길(엡 1:8) 원한다. 그래서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칠 수 있게 하시길(골 1:28; 3:16), 그래서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세상 사람이 우리 전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에 굴복하고,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를 감사와 기쁨으로 얻게 하시기를 기도한다.
1. 무례히 행하지 않는 지혜
바울은 ‘사랑은…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이라 말했다(고전 13:5). 전도는 최고의 사랑이다.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고,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기 때문이다(약 5:20). 그러므로 전도는 무례할 수 없다. 전도의 내용이 상대방을 불편하게 할 수 있지만, 전도의 방법이 불편을 줘선 안 된다.
수년 전 인터콥 선교단체 소속 청년 몇 명이 인도 불교 사원에 가서 ‘땅 밟기’ 기도를 하여 큰 이슈가 된 적이 있다(신 11:24). 큰 소리로 찬송하고 통성기도를 하자 사원에 거하던 사람들이 즉시 중단하고 떠나 달라고 간청했지만, ‘구원받지 못한 이들이 불쌍해서 하나님을 전하는 것뿐’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뭐가 문제인가? 복음이 문제가 아니라, 무례한 방식이 문제다. 이런 무례한 방식의 전도를 바울이 먼저 보여줬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과 그의 복음 동역자들은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한 가지 분명히 드러난 특징은 무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각 성에서 자기의 관례대로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 들어갔다(2, 10, 17절).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처럼 회당장의 요청에 따라 바울은 청중에게 권할 말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것이다(13:15-16). 바울은 그들이 읽는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다(2절). 회당에서 성경의 뜻을 푸는 것처럼 뜻을 풀어 그리스도를 증언했다(3절). 전도의 방법에 있어서 청중을 불편하게 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예의 없는 말투와 태도로 전도한 것도 아니다. 불편하게 여긴 이들은 바울이 무례해서가 아니라 그가 전하는 그리스도를 시기했기 때문에 떼를 지어 소동을 일으켰다(5, 13절).
아덴은 주민보다 우상이 더 많은 도시였다. 바울은 장터에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했는데,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을 좋아하는 아덴 사람에게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덴 사람들은 바울을 모시고 아레오바고, 종교를 설명할 수 있는 공적인 장소에 가서 이런 요청을 했다.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19-20절).
22-31절까지 기록된 바울의 전도는 무례하지 않았다.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한 상태였지만(16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22절, 인정),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 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23절, 접촉점), 친절하게 소개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신을 섬기는 거냐, 이 우상숭배자들아, 이 딴 신들 다 버리고 참 하나님만 섬겨라’라고 말하지 않았다.
우리가 배워야 할 전도의 지혜가 여기에 있다. 전도는 무례해서는 안 된다. 복음이 담고 있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 불편하게 들릴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는데도 하는 건 무례한 것이다. 지혜가 없는 전도다. 우리는 들을 귀 있는 자에게는 말하고, 들을 귀 없는 자에게는 발에 먼지를 털어버리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때론 종교 탄압이 있는 곳에서 법을 어기면서 전도해야 할 때도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기로 결심한 가족에게 포기하지 않고 전도할 필요도 있다. 하나님께 전도에 필요한 모든 지혜를 구하라. 그리고 무례히 행하지 않는 지혜도 함께 달라고 구하라.
2. 성경을 아는 지혜
베드로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씨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다(벧전 1:23). 전도에 필요한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서 편지하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라고 말했다(골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면, 우리는 모든 지혜로 가르칠 수 있고 전도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사마리아 여인의 말을 인용하며 “와서 보라” 이 한 마디로 전도가 가능하다고 하지만(요 4:29), 사실 그건 복음을 들으라는 요청이지 복음 자체는 아니다. 믿음은 아무 들음에서 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롬 10:17). 전도엔 성경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철저히 성경을 아는 지혜에서 나왔다. 데살로니가 회당에서 그는 성경을 가지고 강론할 때, 그 뜻을 풀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언했으며, 예수님이 곧 그리스도라고 선포했다(2-3절).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및 열한 사도에게 모세, 선지자, 시편 등 모든 성경으로 자기를 설명하신 것처럼(눅 24:27, 44-45).
아덴에서 바울은 성경을 한 구절도 인용하지 않았다(청중이 모르니까). 오히려 세속 시인의 글귀 두 개를 인용했다(28-29절). 그럼에도 바울의 전도는 철저히 성경을 아는 지혜를 따랐다.
-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24절) – 창조주, 통치자 하나님
-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24절) – 무한하신 하나님
-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25절) – 자족하신 하나님
-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25-6절) – 자존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주권
-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27절) – 하나님의 자기계시, 편재하심
-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28절) – 하나님의 자존하심/피조물의 의존
-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29절) – 십계명 1-2 계명
-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30절) – 죄, 회개
-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실 날을 작정하시고(31절) – 심판(우주적), 심판주
-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31절) – 심판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믿음의 요청
성경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성경의 핵심 내용을 풍성히 담고 있다. 우리의 전도가 이처럼 성경을 아는 지혜로 빚어져야 한다.
최근에 구도자의 수준과 입맛에 맞춰 전도의 내용을 수정해야 한다는 인본주의, 세속주의 운동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죄는 빚진 것으로, 심판은 우리가 느끼는 불행으로, 구원은 자아실현,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상관없는 자기 행복으로 바꾼다. 하지만 이런 복음을 전하는 건 절대로 지혜 있는 전도가 아니다. 삼키기 힘들까 봐 껍질을 까서 알맹이를 입에 넣어주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껍질과 함께 알맹이도 내버리고 영양가 하나 없는 걸 주는 셈이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반드시 성경을 아는 지혜의 영양가가 풍부한 복음이어야 한다.
열린길 9-10월 호에 필리핀 딱빌라란 교회 제롬 형제 간증이 실렸다. 그는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성경을 읽고 미사에 참석하며 구원이 선행에서 비롯된다는 거짓을 믿고 있었다. 그런 그가 복음의 진리를 발견한 것은 선교사와 함께 한 성경공부를 통해서였다. 로마서 3장 23-24절 말씀을 읽으면서 이제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가 이미 치르신 죄 값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했다.
말씀이 영혼을 거듭나게 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는 전도가 말씀을 아는 지혜로 가득 차게 하라. 늘 말씀을 읽고 들어온 믿지 않는 가족(자녀)에게 계속해서 말씀을 열어 그리스도를 증언하라. 성경을 잘 모르는 이에게 성경의 지혜가 담긴 말로 전도하라. 성경을 아는 지혜로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벧전 3:15).
3. 복음을 믿는 지혜
아는 것을 말하는 것과 믿는 것을 말하는 것엔 큰 차이가 있다. 가보지 못한 곳을 설명하는 것과 가본 곳을 설명하는 것, 맛보지 못한 음식을 소개하는 것과 먹어본 음식을 소개하는 것의 차이라고 할까? 나는 바울이 전도할 때 얻은 영혼들(4, 12, 34절)이 온전히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때문이라고 믿지만, 바울이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진짜 믿는 사람처럼 전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한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데살로니가에 편지한 바울은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라고 말했다(살전 1:5).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들이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고, 자신들을 선대한 야손과 형제들을 괴롭힐 때도 바울은 낙심하지 않았다. 그들이 베뢰아까지 원정을 와서 소동을 일으켜 바다까지 도망쳤지만 바울은 담대함을 잃지 않았다. 아덴에서 수많은 우상과 우상 숭배자들 앞에서 복음을 전할 때(이슬람 메카에서 전한다고 상상해보라), 바울은 단호했다. 복음에 대한 확신,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대한 믿음이 굳건했다. 아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믿는 사람처럼 전했다.
베드로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말했다(벧전 3:15). 누군가 물어볼 거라는 말이다. 왜? 우리가 세상이 알 수 없고 그래서 의지할 수도 없는 분께 우리 믿음을 두고 소망을 품고 살기 때문이다.
특별히 베드로는 여러 가지 시험 중에 있는 성도에게 이 말을 했다. 시험, 고난, 환난은 우리 믿음이 더욱 빛나는 순간이다.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께 믿음을 둔 우리만이 그 모든 시험과 고난과 환난 중에 소망을 품을 수 있다. 그래서 세상 사람이 묻는 것이다. ‘어떻게 당신은 소망을 품을 수 있나요?’ ‘도대체 어디에 믿음을 두길래 이런 상황에도 소망을 가질 수 있나요?’
싱클레어 퍼거슨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자신의 믿음을 표명하고 전달할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도 여전히 사실이다.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변화된 삶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 깊은 확신과 진정한 기쁨이 우리의 삶의 특징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먼저 질문하게 되는 것이다”(<우리가 교회다>, 275p).
그러므로 단순히 복음을 아는 지혜가 아니라 믿는 지혜를 구하자. 복음의 능력에 관하여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맛본 사람으로 전도하자. 어떤 지혜로운 질문으로 구도자에게 접근할까 고민하는 것도 좋지만, 구도자가 우리에게 질문하도록 소망에 가득 찬 삶을 사는 게 진짜 필요하다. 복음을 믿는 당신의 삶이 이 세상에서 소망이 없어 방황하는 구도자를 당신 곁으로 끌어당긴다. 그들이 물으면, 무례히 행하지 않는 지혜와 성경을 아는 지혜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라. 모든 지혜의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죽은 영혼을 살리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