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인생의 문제를 만날 때
본문 : 누가복음 8장 40~56절
설교자 : 이병권
오늘 본문은 하나의 사건이 진행되는 중에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야이로의 이야기 속에 혈루증 여인의 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사건은 함께 어우러져,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문제, 질병과 죽음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모두 해결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문제 앞에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자신이 어찌 할 수 없는 질병과 그 고통에 대해서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절정은 죽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생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해답이 되십니다.
오늘 말씀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때 어떻게 반응해야 될까요? 다시 말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가르쳐주면서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혈루증으로 열두 해 동안 고생하다 나음을 얻은 여인과 회당장 야이로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외동딸, 이 두 개의 사건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그럼 그 믿음을 살펴보기 위해 오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돌아오셨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거라사인의 땅에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고 다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갈릴리 지역으로 돌아오십니다. 예수님이 돌아오셨을 때, 거라사 지역과 대조적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으십니다. 이 지역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도착하신 곳이 어디인지 기록되진 않았지만, 아마도 이 지역은 갈릴리에 있는 가버나움이었을 것입니다.
그 때 야이로라는 이름의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야이로는 회당장이었는데, 그 지역에 있는 회당의 책임자입니다. 그 지역의 지도자 역할을 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에 일이 벌어집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와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 오시기를 간구합니다. 야이로는 자신의 지위와 관계없이 예수님 앞에 자신을 낮추며, 그분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하나뿐인 딸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절박했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 아닐까요? 지금 딸이 죽어가고 있는데 무엇이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회당 지도자로서의 지위와 체면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야이로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직접 나아가 엎드렸습니다. 때때로 인생에서 만나는 문제는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이끌어줍니다. 인생에 있어서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야이로가 그러한 시련 가운데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이제 열두 살 된 하나뿐인 딸이 죽음의 문턱에서 고통 받고 있습니다. 회당장인 야이로가 뭔들 안 해봤겠습니까? 하지만 다 소용없었습니다. 결국 이 시련은 야이로를 예수님께 나아와 그 앞에 엎드리게 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님은 야이로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와 함께 가십니다. 그런데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은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실 때 사람들이 밀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밀려들다’는 단어는 숨을 못 쉬게 할 만큼 누른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예의를 갖추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보디가드들의 안전한 호의 속에서 예수님이 이동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기다렸던 예수님을 보기 위해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서로 밀어대는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이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한 여인이 야이로와는 다른 방법으로 예수님께 접근합니다.
누가는 이 여인에 대해서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고 있고,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했다고 소개합니다. 이 여인은 야이로의 딸이 살아온 세월만큼 무려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혈루증은 여성이 계속해서 하혈을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여인은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해봤지만, 아무도 병을 고쳐 주지 못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막5:26) 이 여인은 지금까지 많은 의사들에게 많은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진 재산도 모두 다 써버렸습니다. 하지만 여인의 병은 낫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화되었습니다. 누구도 이 여인을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이 비참한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때에는 요즘처럼 빈혈약이 있거나, 철분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여인의 건강상태가 어땠을까요? 또 생활하는 데는 얼마나 불편했을까요? 이런 상태로 12년을 보냈다는 것은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고통은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 여인의 병은 부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정상적인 관계 속에서 살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여인과 접촉하게 되면, 그 사람까지도 부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여인은 정상적인 종교 생활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사람들에게 밝힐 수 없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예수님께 공개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슬그머니 예수님의 뒤로 다가옵니다. 가능하면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댑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 여인의 병이 곧바로 낫게 되었습니다. 혈루증이 그 즉시 그쳤습니다. 열두 해 동안 있었던 아픔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계속되었던 출혈과 어지러움, 떠나지 않던 고통과 불편함,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어 느끼는 외로움과 수치심 그리고 죄책감, 그 모든 문제가 예수님께 손을 대는 순간 끝나버린 것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 손을 댄 행동은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45절) 사람들은 모두 ‘아니라’고 부인하며 말합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누구나 알고 있는 분명한 사실을 언급합니다.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이 말은 ‘주님,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밀고 당기고 있는데 누군들 주님을 안 만졌겠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예수님은 단지 사람들이 떠밀려서 자신을 만지는 행위가 아니라, 병 낫기를 바라고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만진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능력이 자신에게서 나갔다는 사실을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을 만진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다. 지금 몰라서 묻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스스로 사람들 앞에 나와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경험한 것을 고백하게 하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여인은 더 이상 숨기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밝힙니다. 두려움으로 떨며 사람들 앞으로 나아와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이 손을 댄 이유와 즉시 낫게 된 것을 말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냥 모른척하셨다면 어땠을까요? 이 여인이 병은 나았지만, 사람들이 알지 못한 상태로 끝났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녀의 모든 필요와 슬픔을 아시고 그녀의 상황을 이해하셔서, 그녀를 사람들 앞으로 나오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녀가 완전히 나았음을 모두들 앞에서 증거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녀는 지금 예수님이 자신에게 하신 일을 공개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그녀는 간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을 만났다면 분명하게 이야기할 것들이 생깁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은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분이십니다.
두려움으로 자신의 간증을 마친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48절) 혹시 이 말씀이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이 말씀은 예수님이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했던 말씀과 같습니다(7:50).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그녀는 자신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분에게 나아왔고, 그분을 향한 믿음으로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올바른 믿음의 대상에게 나아감으로 영원한 회복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평안히 가라”는 축복의 말로 그 여인을 보내셨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을 만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고,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감격스러운 사건이 진행되고 있을 때, 여기 한 사람만은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야이로입니다.
‘예수님이 집으로 오시게 되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면 죽어가는 어린 딸을 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되도록 빨리, 얼른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예수님이 갑자기 멈추어 서셨습니다. 웬 여자 하나가 나타나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야 하는데,‘ 야이로는 불편한 마음으로 발을 동동거리며 기다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아직 말씀하실 때에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옵니다. 결국, 야이로가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하나뿐인 딸이 숨을 거둔 것입니다. 소식을 전하는 자가 말합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49절) 야이로는 자신의 딸을 고칠 수 있는 시기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 올 이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딸을 살리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병든 것과 죽은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야이로는 분명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의 딸을 내버려두시고 이름 없는 여인에게 시간을 낭비하신 것에 대한 원망이 생겼을지 모릅니다. 그 여자는 당장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기다릴 수 있었을 텐데.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말을 거시려고 굳이 멈춰 서실 필요가 있었을까? 왜 걸음을 멈추시고 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 계셨을까? 서둘렀다면 분명 죽기 전에 집으로 갈 수 있었을 텐데. 그의 겸손한 요청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지막 기회까지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합니다. 너무 늦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늦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슬퍼하는 야이로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50절)
그럼 예수님은 야이로가 무엇을 믿기를 원하셨을까요? 그것은 그가 처음에 예수님께 나아오면서 가지고 있었던 믿음을 말합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이 자신의 딸을 고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야이로가 그 믿음을 계속 가지고 있기를 바라십니다. 딸이 죽었다는 사실 때문에 예수님의 계획이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딸이 병들어있든지 죽어있든지, 예수님께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는 죽음을 이기는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병이든 죽음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결과는 동일합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이 자기 집으로 가는 것을 막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이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제 드디어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에 이르렀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그리고 아이의 부모만이 함께 들어갈 수 있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하시면서 세 명의 제자들만 특별히 함께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경우가 있는데, 지금이 그 첫 번째 경우입니다. 때때로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또한 때때로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만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 중에 일부만 가르치십니다.
야이로의 집은 이미 사람들의 슬픔의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상식 밖의 말로 시끄러운 소리를 잠재우십니다.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52절) 야이로의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사람들은 비웃음으로 반응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음의 대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울며 통곡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는 자로, 자는 것과 죽은 것도 구별하지 못하는 무지한 랍비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열두 살밖에 안 된 어린 아이가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죽음을 확인하고 함께 애통하며 슬퍼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하는 말이 ‘죽은 게 아니라 잔다’라는 겁니다. 누군가 장례식장에 와서 유가족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가장 좋게 들을 수 있는 대답이 ‘당신 말대로 정말 자는 거였으면 좋겠네요.’ 정도가 될 것입니다. 잘못하면 욕을 얻어먹을지도 모릅니다. 야이로의 집에 왔던 사람들은 모두 딸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비웃음으로 반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웃음을 놀라움으로, 슬픔을 즐거움으로 바꿀 수 있는 분이십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너무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병을 고치는 일과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은 차원이 다른 일입니다. 사람에게 죽음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죽음은 잠과 같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 마치 자는 사람을 깨우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잔다’라는 말을 통해서 그분의 능력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일깨워 주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생명을 주관하는 권세와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팔을 뻗어서 아이의 손을 잡고 마치 잠을 깨우는 것처럼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아이야 일어나라”(54절) 예수님이 말씀하시자마자 아이의 영이 돌아와 아이가 즉시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잠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죽음에서 깨우십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하십니다. 다시 살아난 아이는 유령이나 환상 같은 것이 아닙니다. 먹을 것을 필요로 하는 온전한 생명이었습니다.
아이가 다시 살아나자 그 부모는 몹시 놀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사건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올바른 관심을 갖게 하려는 것입니다. 놀라운 기적들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핵심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오해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보다, 기적을 바라고 따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경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고 때로 침묵을 명하시기도 하십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8장에서 누가가 연속해서 기록한 네 개의 기적도 마무리됩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행하신 네 번의 기적을 연속해서 기록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풍랑을 잔잔하게 하셨고, 둘째, 귀신 들린 자를 고치셨고, 셋째, 혈루증을 고치셨고, 넷째,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누가는 네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풍랑을 잔잔케 하시며, 귀신을 명하여 통제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사람의 질병을 다스리시며, 죽음까지도 주관하십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절대적인 권위와 그 능력을 점점 더 뚜렷하게 보여주며 그 절정의 모습으로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시는 예수님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이 질병은 물론, 죽음까지도 다스리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사건에서 풍랑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이 서로 말합니다. ‘그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답을 하듯이, 둘째 사건에서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예수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니 그분의 능력과 권위를 본 사람들의 합당한 반응은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분의 초청에 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으로 말하면,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상황이 어떻든 관계없이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께 나아가면 해결될 거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장애와 어려움 속에도 끝까지 그분을 믿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나를 돌보시는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권위와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믿는 자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시며, 그분의 방법대로 그 뜻을 이루십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들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이미 예수님을 믿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무엇으로 인생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삽니다. 그분이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문제의 해답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그분을 보는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그분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끝까지 그분을 바라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음으로 삽니다.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사십시오. 주님을 신뢰하며 사십시오. 그분께 우리의 인생을 맡겨드리며, 매일매일 그분을 향한 믿음으로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묵상 질문
- 오늘 본문에 기록된 두 사건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어떤 능력을 볼 수 있습니까?
- 야이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예수님께 무엇을 요청했습니까? 그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 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녀의 행위에 대해서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에 대해서 잔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왜 그렇게 반응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합니까?
- 왜 예수님은 아이의 부모에게 이 일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 당신이 경험하는 인생의 문제들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결하기를 원합니까? 그 문제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교훈하고 있습니까?
- 당신에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 당신은 일이 당신의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주로 어떻게 반응합니까? 당신이 더 노력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