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이 모든 일 전에
본문: 누가복음 21장 10~19절
설교자: 조정의
먼저 우리는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막 13:3),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과 안드레가 예수님께 조용히 물었던 질문은 바로,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였습니다(막 13:4). “이 모든 일”은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지는 것을 포함하고(눅 21:6) 더 나아가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 일어날 모든 일을 가리킵니다(마 24:3).
예수님은 먼저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속이는 거짓 예수를 주의하라고 말씀하셨고(8절), 그다음으로는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9절). 주 오심과 세상 끝이 오기 전에 난리와 소요가 먼저 있어야 하지만, 아직 끝은 아니기 때문입니다(마 24:6).
재난은 어떤 의미에서 주가 오신다는 것을 알리는 분명한 징조가 됩니다. 하지만 절대로 주가 오시는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섣불리 추측하거나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주 오심의 징조인 “난리와 소요”의 구체적 내용이 나옵니다(10~11). 또 주 오심의 또 다른 징조가 나옵니다. 오늘은 주 오심을 알리는 두 가지 징조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이 징조를 보며 반응해야 할지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1. 징조1: 재난(10~11절)
10절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11절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이것은 지난주에 살펴본 종말의 첫 번째 징조, 재난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여기서 예수님이 묘사한 여러 가지 재난은 특별한 징조이기보다는 현상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던 당시에도 있었고, 예수님 승천 이후 교회 역사 가운데 항상 있어왔으며,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자주 발견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로마 제국은 주변 국가들과 크고 작은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갈리아, 북아프리카, 브리타니아, 아르메니아). 유대 국가에도 내전과 종족 분쟁이 있었습니다. 64년 로마 수도에 큰 화재가 일어났고, 곳곳에 지진(로마, 폼페이, 소아시아, 크레타), 기근(로마, 유대), 전염병(역병, 바빌로니아, 로마)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지난 이천년의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듯, 이러한 현상은 계속해서 우리 주변에 있어 왔습니다. 오늘날에도 기근, 지진, 전염병, 전쟁이 끊이질 않습니다. 이러한 재난이 주의 재림과 세상 끝이 오기 전에 반드시 일어날 현상입니다. 이 현상을 볼 때마다 우리의 마땅한 반응은 “주가 오실 날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오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4:8; 막 13:8). 이러한 현상이 주가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재난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산모가 느끼는 진통의 초기 증상과 같은 것이죠.
진통의 마지막 증상, 재난의 끝은 어떨까요? 다시 말해 예수님의 재림 그 직전에 일어날 재난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것은 11절 후반에 잘 나옵니다.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이는 25~26절에 기록된 것으로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기 전에 일어날 재난입니다. 일월성신, 바다와 파도에 징조가 일어나고, 사람들은 무서워함으로 기절할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말에 따르면, 예루살렘 멸망 직전에도 불가사의한 조짐이 많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성 위에 화염검이 나타났고, 열두 달 동안 혜성이 나타났습니다. 제단과 성전 사이에 한 시간 반 동안 대낮처럼 빛나던 빛이 있었고, 하늘에서 마차와 무장한 기병들이 싸우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이 있었습니다. 오순절 성전 안으로 들어갈 때 많은 사람이 “이곳을 떠나자”고 외치는듯한 함성과 소리를 제사장들이 들었습니다. 이런 신비로운 징조에 대해서 로마 역사학자 타키투스도 기록하였습니다.
이와 유사하지만, 더 무서운 징조가 예수님이 임하시기 전, 세상 끝이 오기 전에 일어날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계시록 6장에서 19장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곱 봉인과 일곱 나팔의 재앙입니다. 일부만 찾아 읽어보겠습니다.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덜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며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 장군들, 부자들, 강한자들,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과 바위 틈에 숨어 진노의 날에 두려워 떤다”(계 6:12~17)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월성신의 징조, 두려워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런 “주의 날” 전에 있을 재난에 대한 기록은 신약뿐만 아니라 구약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때와 기한을 알고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 이미 “주의 날” 전에 있어야 할 일에 대해 선지자를 통해 수백 년 전에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전쟁: 겔 38:19~22; 기아: 사 5:13~14; 지진: 13:13; 기근: 14:30; 지진: 학 2:6; 일월성신의 징조: 요엘 2:30~31). 예수님은 여기서 아버지의 뜻을 재 확증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이 경험한 것처럼,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는 여러 가지 재난 소식을 보고 듣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재난의 끝에는 창세로부터 보지도 듣지도 경험하지도 못했던 징조가 있을 것입니다. 이 현상을 볼 때마다 우리의 마땅한 반응은 “주가 오실 날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오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물을 보며 그 만물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신성과 영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눈을 뜨면 보이는 만물이 증인이기 때문에 누구도 “하나님이 없는 줄 알았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롬1). 마찬가지로 이 땅에 일어나는 여러 재난을 바라볼 때, 우리는 “주 오심이 더딘 줄 알았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그 재난을 통해 그날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은혜가 아직 주어졌을 때, 회개할 수 있는 이때, 멸망을 피할 수 있다는 좋은 소식을 사랑하는 이에게 알릴 수 있을 이때, 주 오심을 증거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정확한 때에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오실 것에 대해 계속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눈을 뜨고 바라보십시오. 귀를 열고 들으십시오. 주가 오실 것이라는 징조가 날마다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2. 징조2: 핍박(12~19절)
12절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13절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12절부터 예수님은 두 번째 징조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일 전에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그 두 번째 징조를 소개하시는데, “이 모든 일”은 예수님 오시기 직전에 일어날 모든 무서운 재난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기 전에 제자들이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될 일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12절부터 19절까지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신 “핍박”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세상에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이 재난이었다면 “그때” 일어날 또 다른 현상은 바로 성도에 대한 핍박입니다(마 24:9).
예수님은 제자들이 박해를 받고 회당과 옥에 넘겨지거나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려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회당에서 매질을 당하고 환난에 넘겨지며 심지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4:9; 막 13:9).
누가가 두 번째로 기록한 책, “사도행전”을 보면,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사도들이 회당에 넘겨지고(베드로와 요한, 행 4:1~22), 매질을 당하고(사도들이 채찍질을 당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함, 행 5:40) 환난을 받으며 죽임당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스데반, 행 7:54~60; 사울을 통한 투옥과 순교, 행 8; 야고보, 행 12:2).
예수님이 먼저 그런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회당에 끌려가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으셨고(눅 22:66~71), 예루살렘을 다스리던 로마의 권력자 빌라도 앞에 서셨습니다(눅 23:1~7), 또 헤롯 왕 앞에서 희롱을 받기도 하셨습니다(눅 23:8~12). 주님은 매를 맞으셨고(눅 22:63~65),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으셨으며(눅 23:21~25), 결국 죽임을 당하셨습니다(눅 23:44~4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요 15:20)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 참고. 요일 3:13).
제자들이 원래는 세상에 속한 자들이었지만, 예수님께서 그들을 세상에서 택하여 자기의 사람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세상이 그들을 미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19).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지만, 세상은 독생자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 1:10), 그분을 보지도 못하였으며(요 14:17), 예수님이 제거되자 기뻐하였습니다(요 16:20).
이 세상은 악하고 패역한 세대며(눅 9:41; 11:29; 행 2:40), 이 세대는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엡 2:2~3).
그러므로 이 세대가 끝날 때까지, 이 세상의 마지막이 오는 그날 전까지는 세상이 미워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 이 세상에 살아가지만, 세상 풍조를 거스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대적하는 자에게는 핍박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끝이 다가올수록,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올수록 핍박은 더욱 거세질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순교자의 피로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초기 사도들과 성도들의 많은 수가 순교를 당했고, 교회가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을 받았던 중세시대 수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종교개혁이 일어난 16세기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한 연구가 데이빗 바렛트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예수님 이후 지금까지 기독교 순교자의 수가 약 7천만 명이 이른다고 합니다(나치-100만명, 러시아 공산주의 체제-1500만명, 중국 공산당-70만명).
또 2017년 미국 고든-콘웰 세계기독교연구센터에서 보고한 “박해받는 크리스천에 대한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2005년부터 2015년까지 매해 약 9만 명의 크리스천이 목숨을 잃어 10년간 약 90만명이 순교했습니다. 이 보고에 따르면 2016년에는 6분마다 한 명의 크리스천이 신앙을 이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선진국은 다를까요? 기독교 배경을 가진 미국과 유럽은 핍박이 덜할까요? 한국은 안전할까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물론 폭력과 죽음의 공포는 피부로 느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미국과 유럽에서 시작된 교회의 탄압과 핍박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동성애자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 성경의 견해를 밝혔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사업이 망합니다. 수많은 사람의 미움과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심지어 교회 강단에서 성경대로 낙태와 동성애에 대한 설교를 하다가 감옥에 끌려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의 절대 진리를 외치다가는 편협하고 꽉 막히고 자기만 맞다고 주장하는 이기적인 광신도라는 소리를 듣기 딱 좋은 시대와 환경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온유하고 겸손한 태도로 무장해도 말입니다. 기독교 정신으로 학교를 세워도 성경을 가르칠 수 없게 하고, 기독교 가정에 아이를 입양해도 아이에게 예수님을 소개하지 못하게 막으려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살고자 한다면, 크고 작은 핍박을 충분히 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말과 행함으로 증거하며 살아간다면 말입니다.
가령 학교에서 내 아이에게 잘못된 성교육을 받게 한다면, 자녀 양육에 관해 엄마들과 모여 이야기 할 때 반성경적인 자녀양육법을 거의 정답처럼 모두 수긍하며 받아들이고 있을 때, 회사에서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하나님이 금하신 거짓, 속임수, 뇌물을 권장할 때, 회식자리에서 술을 강요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세상 사람이 융통성이라고 말하는 것,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죄라고 말하는 것에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세상 사람들 속에서 그들과 비슷하게 살아가며 타협하는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들의 비난과 조롱을 감수하며 예수님이 선이라고 말하는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예수를 따라 사는 제자들은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특별히 12절과 17절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반복해서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입니다. 주 오심이 가까이 올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이유로,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기 때문에, 핍박을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로 인해 핍박을 받을 제자들에게, 그것이 도리어 나를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3절). 무엇때문에 우리가 핍박을 당하는지,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주 오심이 가까이 올 수록 우리가 경험하게 될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도에 대한 세상의 핍박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살아가는 자에게는 핍박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핍박의 자리에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것입니다.
사실 핍박은 두렵습니다. 누가 미움받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따돌림을 사랑하겠습니까? 조롱과 배척을 즐거워하겠습니까? 모두가 나를 대적하고 비방할 수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 우리 믿음을 증언할 수 있겠습니까? 심각한 경우 나의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 담대하게 죽을 것을 각오하고 그리스도를 외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가지 약속을 주셨습니다.
1) 첫째 약속: 구변과 지혜를 주리라(14~15절)
14절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회당에 잡혀갔을 때,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려갔을 때, 뭐라고 말할지 “미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3:11). “미리 궁리하다”는 단어는 포르멜레텐인데, “연설을 미리 연습하거나 암기한다”는 전문용어입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죠?
15절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예수님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내가 너희에게 입과 지혜를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홀로 두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며, 담대히 말할 수 있는 입, 그리고 나를 증언할 수 있는 지혜를 내가 직접 줄것이다” 이런 약속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마땅히 할 지혜로운 말을 주실 것입니다(막 13:11).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할 수 없고 변박할 수 없도록 말입니다. 스데반이 돌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들 앞에서 성령이 충만하여 보고 외쳤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보좌에 서계신 예수님을 보았고, 그 예수님을 증언했으며, 그 예수님의 마음으로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외쳤습니다(행 7:55~60).
우리도 이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주를 증거할 기회를 만나거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물론 성령이 성경을 통해 이미 증언한 예수님에 대해 잘 알아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님을 잘 말해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하였습니다(벧전 3:15).
혼란스럽죠? 베드로는 항상 준비하라고 하고 예수님은 미리 궁리하지 말라고 하시고… 키포인트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소망의 이유되신 예수님을 증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그분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을 따른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을 때 염려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때도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입술을 통해 지혜롭게 예수님을 증언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첫 번째 약속입니다.
2) 둘째 약속: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16~19절)
예수님은 두 번째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16절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 몇을 죽이게 하겠고 17절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18절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대상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심지어 나를 낳고 길러준 부모, 함께 자란 형제, 친척, 가까운 친구가 나를 고소하고 죽이는데 넘겨줍니다. 정말이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약속하여 주시기를,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18절).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제자 중 머리털 하나가 아니라 머리가 잘려 죽은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에 대한 약속일까요? 19절이 이 약속의 의미를 명확하게 밝혀줍니다.
19절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그들이 잃어버리는 것은 머리털뿐만 아니라 머리 자체일수도 있습니다. 이 땅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결코 잃어버리지 않고 얻게 될 것은 그들의 영혼입니다. 그 어떤 것도 그들의 영혼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합니다(마 10:28). 우리 영혼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게 하지 못하도록 그리스도께서 지키십니다.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위험, 칼, 모든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롬 8:35).
“성도의 인내”의 결과가 바로 “영혼을 얻는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 성도가 인내할 때, 예수님은 영혼을 얻을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계시록 말씀에서 성도들의 인내가 무엇인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모든 핍박 속에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에게는 영혼을 얻는 구원이 상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가리켜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이라고 부릅니다(벧전 1:9).
어떤 면에서 핍박은 우리 믿음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회며, 우리 믿음의 결국인 영혼의 구원을 확증하는 복된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들도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습니다(행 5:41).
그래서 어쩌면 우리 삶에 활력이 없는 이유, 영혼 구원을 얻게될 기쁨으로 충만하지 않는 이유, 확신에 차서 살아가기 보다 방탕함과 생활의 염려에 마음이 둔해져 살아가는 이유는, 주 오심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분을 증거하는 삶,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삶을 살아가지 않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J. C. 라일은 “장래 일과 현재의 의무”라는 소책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언제라도 그리스도가 오실 것처럼 사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 마지막인 것처럼 하십시오. 무슨 말을 하든 마지막인 것처럼 하십시오. 성경 어느 장을 읽든 다시는 읽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읽으십시오. 기도할 때마다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기도하십시오…이것이 그리스도의 두 번째 나타나심을 잘 준비하는 길입니다.”
여러분 오늘이 바로 그 날이라고 생각하며 삽시다. 우리가 사랑하는 주를 만나는 그 날입니다. 지금 주가 오셔도 부끄럽지 않게 살아갑시다. 우리 믿음을 확증하며 살다가 주를 만납시다.
주가 우리를 맞아주실 때 그 손에 우리를 위해 핍박받은 흉터를 우리에게 보여주실 때, 우리는 그분께 무엇을 보여드릴 수 있을까요? 그분을 위해 당한 핍박, 그 가운데 더 확실하게 빛난 우리의 믿음, 그분게 보여드릴 우리의 사랑, 그것을 오늘 준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