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이제는 아들
본문: 갈라디아서 3장 26절-4장 7절
설교자: 이병권
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변화들을 경험합니다. 어려서는 사춘기를 겪으면서 여러 변화를 경험하고 어른으로 성장합니다. 진학을 하거나 취업을 하면서 환경적인 변화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결혼과 출산은 어떤 것보다 큰 변화를 가져오는 일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까지 경험한 것 중에서 나에게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무엇입니까? 단순히 생각만으로,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나의 인생을 가장 크게 변화시킨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만난 것,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것이 아닐까요? 물론, 사람마다 그 변화에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교회 배경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 구원 받은 후에 겪는 변화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던 사람이 겪는 변화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과 미래까지 생각한다면,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변화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바뀌는 것,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생명을 얻어서 이제는 진짜 인생을 살아가는 것, 그것은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어떤 변화들보다 크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에 대해서 다양한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또 다른 측면에서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유일한 복음에 대해서 자신의 간증을 통해서, 구약의 말씀과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서, 믿음과 율법을 대조하면서, 약속과 율법을 대조하면서, 다른 복음이 아닌 진짜 복음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복음을 믿은 결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26)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하고 당연한 표현이라서 별 감흥이 없을 수 있는데, 이 편지에서 바울이 믿는 자에 대해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바울은 믿음의 결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으로 말했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는 것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으로 성령을 받는 것으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바울은 처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측면에서 믿음의 결과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럼 첫 번째 질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까? “믿음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아들이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율법의 행위로 된 것이 아니라, 내가 뭔가를 하고 내가 노력하고 수고해서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자들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가 남자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에 여러 다른 성경에서는 “아들”로 번역하지 않고 “자녀”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그렇게 번역해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당시 배경에서 생각하면 아들이라는 말은 상속자라는 개념이 함께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 “아들”이라는 말은 단순히 남자인 자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는 상속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아들”라는 말과 “유업을 이을 자”라는 말이 계속 반복됩니다. “아들”이라는 말과 “유업을 이을 자” 모두 ‘상속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질문입니다. 누가 아들이 되었습니까? 26절은 “너희가 다” 모두를 말합니다. 27절은 “누구든지” 28절에는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28)
그래서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누가 아들이 되었습니까? “누구든지”누구든지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인종의 차별이 없습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 출신이 어디든 관계없습니다. 피부 색깔에 따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안 되고,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종이든 자유인이든, 사회적 위치나 경제 수준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관계없습니다. 남녀 차별이 없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혁명적인 것인지 지금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날마다 자신이 이방인이 아닌 것과 노예가 아닌 것과 여자가 아닌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여자들은 모든 면에서 남자보다 열등하다”라는 기록했습니다. 사람을 셀 때, 여자는 그 수에 포함되지도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자에게도 과연 영혼이 있을까’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합니다. 이런 시대였는데, 하나님 말씀은 남자든 여자든, 관계없이 모두 다 하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충격적인 도전이 되었을까요? 복음은 인종의 차별도 계층의 차별도 성별의 차별도 모두 무너뜨립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 하나라는 말은 모두가 똑같다는 말이 아닙니다. 무조건 하나로 통일해야 하고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개성이 있기에 서로가 다릅니다. 다 다릅니다. 성격이 다르고 취향이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다름을 두고 평가하거나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가 되었습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27) 하나 됨의 근거는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 된 것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말씀에서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라고 나오는데, 침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말입니다. 침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자는 모두 하나라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없는데, 당시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침례 받지 않은 성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믿으면 즉시 침례를 받았고 침례는 믿음의 증거였습니다. 침례는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당시에는 침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침례 받은 사람을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침례를 통해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옷은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주기도 합니다. 전 오늘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왔습니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기준에서 제가 설교자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은 나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 그리스도와 같이 보시고 나를 받아주십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수치를 가려주심으로 하나님이 나를 완벽한 자로, 흠 없는 자로, 깨끗한 자로 보십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기준을 만족시키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29) 여기서 세 번째 질문입니다. 어떻게 유업을 이을 자가 되었습니까? “약속대로”하나님이 “약속대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상속자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소유로 삼으셨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복을 허락하셨고 그 모든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들이 되어 유업을 이을 자가 된 것은 하나님 측면에서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가지 질문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까? “믿음으로”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습니까? “누구든지” 어떻게 유업을 이을 자가 되었습니까? “약속대로” 우리가 어떻게 “이제는 아들”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 “누구든지”, “약속대로” 그래서 우리가 “이제는 아들”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바울은 유업을 이을 자를 설명하면서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신 두 가지 일을 언급합니다.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1-2)
바울은 두 시기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표현대로 하면, “어렸을 동안”과 “아버지가 정한 때”입니다. 쉽게 말하면, ‘어렸을 때’와 ‘성인이 되었을 때’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가령, 많은 재산을 가진 주인에게 어린 아들이 있습니다. 법적으로 어린 아들은 상속자이고 모든 것의 주인입니다. 하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아들의 신분은 효력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는 1절에 말씀하는 것처럼 종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성인이 될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습니다. 아들이지만 보호자와 관리인의 지배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3) 여기 나오는 “이 세상의 초등학문”이라는 말은 몇 가지 견해가 있는데,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결정하기에 어려운 표현입니다. 무난한 것이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모든 종교적 경험이나 우상을 따르던 삶, 헛된 철학 등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정한 때가 되기 전에는 우리도 그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헛된 것에 매여서 종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아들이 성인이 되면 토가를 선물로 주었다고 합니다. 토가는 로마 시민이 몸에 둘러 입었던 긴 겉옷을 말합니다. 토가를 입으면 이제는 아들로서 그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표시였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비유를 통해서, 아들이 때가 되었을 때 자신이 종이 아니라 아들임을 알고 회복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생각나는 이야기들이 있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는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다가 때가 되어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이야기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자주 사용되는 이야기입니다. 라이온 킹에서 어린 사자, 심바는 자신이 누구인지 잊고 지냅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 무파사가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Remember who you are.” “네가 누구인지 기억해라. 넌 내 아들이고 진정한 왕이다”
성경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상황은 어땠습니까? 종으로 살았습니다. 애굽에서 종노릇하며 그 지배 아래에 있었습니다.
언제까지요?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하나님이 정하신 때까지 이스라엘은 애굽에 종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때가 되어서,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종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하셨습니다.
때가 되었을 때, 모세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하나님이 때가 되었을 때, 그 정하신 완벽한 때가 되었을 때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4)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섭리 가운데서 완벽한 때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단 하루도 이르거나 단 하루도 늦게 오시지 않은 것입니다. 주석가들은 예수님이 오신 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때는 로마가 강력한 군사력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고 로마가 전 제국에 평화를 주었던 시기였다. 로마가 도로를 정비해서 어느 때보다 여행을 신속하고 안전하게 할 수 있었고, 헬라 문명이 남긴 언어는 공용어가 되어서 사용되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메시아를 열렬히 기다리고 고대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에 하나님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4-5)
예수님이 여자에게서 나셔서 사람이 되셨고 율법 아래 나셔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키셨습니다. 여기 속량이라는 말은 종을 값 주고 사서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종인 우리를 구하기 위해, 죄의 종인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노예시장에 나온 노예는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나쁜 주인을 만나면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인정 많기로 소문난 한 부자가 와서 거금을 내고 노예를 삽니다. 그리고는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다면서, 너에게 자유를 주고 싶다면서 노예증서를 찢어버립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노예라는 신분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입니다. 이제는 자유입니다. 이제 자유인이 된 노예는 자신에게 자유를 허락한 부자에게 정말 감사함으로 울면서 엎드려 절합니다. 그런데 그 부자가 엎드려 있는 그에게 다가와서 손을 잡으며 말합니다. ‘이제 자유가 된 너를 내가 아들로 삼고 싶구나!’ 이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노예에게 자유를 허락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아들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입니다. 그 아들을 보내셔서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를 더 보내셨습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6) 하나님은 그 아들뿐만 아니라 그 아들의 영을 보내셨습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사랑받는 아들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아버지를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이렇게 친밀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친밀한 관계로 그분과 대화하며 그분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계셔서 그 일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종이었는데 자유인이 되었고, 뿐만 아니라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냥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에 있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두 가지 일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고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는 아들”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아버지와 친밀한 아들”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마지막입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7)
7절에 새로운 내용은 없습니다. 앞에서 했던 말을 정리하며 마무리 하는 것 같습니다. 종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것, 아들이니 유업을 받을 자라는 것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우리를 위해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7절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습니다. 바울은 이 마지막 말을 누구에게 하고 있습니까? “네가” 바울은 지금까지 너희가 혹은 우리가 라고 말했었는데, 여기 마지막에서는 “네가”라고 합니다. “당신”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당신”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누구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당신은 이제 아들입니다. 종이 아닙니다. 죄에 매여 죄의 종노릇하며 지냈던 종이 아닙니다. 당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유업을 이을 자입니다.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모든 유업을 이어 받을 자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누구입니까? “Remember who you are.” 당신은 아들입니다. 당신이 아들이 되기 위해 할 일은 없습니다. 지켜야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아들이 되기 위해서 기다려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아들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이미 아들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했던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인생에서 나를 가장 크게 변화시킨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복음이 맞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건이 맞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 겁니까?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겁니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영향을 주고, 내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는 일이 아닙니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 때, 분명 나의 말과 행동은 나의 생각은 달라질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기억하고 나에게 주어진 특권과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유업을 생각할 때, 나의 삶이 이전과 같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그분과 친밀하게 교제하며 그분의 임재 가운데 있을 때, 나의 삶이 이전과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들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니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과 은혜를 놓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시고 아들답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