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때
본문 : 베드로전서 3장 13-15절

설교자 : 조정의

13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5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이제 한국 사회에서도 부모가 아이들을 체벌하면 법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이미 미국 사회는 그러하여, 저의 미국인 친구는 자녀를 매로 징계할 때 커튼으로 가린다고 합니다. 체벌하는 것이 이웃에게 알려지면 경찰에 신고하여 부모와 자녀를 분리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아이들을 징계하고 싶어도 법적으로 어려워지는 세상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한국은 이미 간통죄가 폐지되었고, 얼마 전 미국에서는 한 목회자가 동성애자의 결혼식 주례를 거부했다가 징역 1년을 구형받았다고 합니다. 한국은 빠른 속도로 미국과 유럽을 따라가고 있고 이제 정말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에 따라 살고자 할 때 핍박받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오늘 저는 본문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의를 위해 고난을 당할 때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먼저, 의인에게 고난은 이미 예견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을 마치시고 겟세마네로 가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 의인에게 고난은 당연하고 자연스럽습니다(벧전 4:12).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 이 세상의 주관자(사탄)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불순종의 자녀들 속에서 역사하는 영입니다. 그들이 이 세상의 풍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흐름과 방향은 하나님을 점점 대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세상으로부터 당하는 핍박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그러한 우리가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할 때’ 생각해야 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선을 행한다고 무조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13). 선을 열심히 행할 때 아무도 너희를 해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적인 약속은 아닙니다. 항상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우리 속담 중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가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자동차 사고가 났을 때 친절하게 말한다고 늘 상대방도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선을 열심히 행할 때 아무도 해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앞에서 선을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왔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회 제도, 법과 규율을 잘 지킵니다. 직장 상사에게도 주님께 하듯 충성스럽고 비방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는 아내를 귀하게 여깁니다. 교회에서는 겸손히 성도를 사랑하고 한 마음을 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그에게 선을 행합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누가 그에게 악으로 대할까요? 그리스도인들이 선을 열심히 행한다면 고난을 적게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우리가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들이 사실 상 우리가 악을 행해서 당하는 것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과속을 하면 벌금을 물게 됩니다. 게으르거나 불성실하면 상사의 질타를 당할 수 있고 직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가정에서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지 못하면 갈등이 찾아옵니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을 때 그로 인해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는 우리가 선을 행했다면 겪지 않아도 되는 어려움들입니다.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에서 ‘열심히’는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이 유대교에 심취해 있을 때 그리스도인을 잡아다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가 자신이 유대인의 전통에 열심이었다고 말할 때 바로 이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열심당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력을 통해서라도 유대 국가의 독립을 이뤄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디 2:14).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을 힘입어 구원의 목적에 따라 열심히 선을 행하며 산다면, 우리는 죄로 인해 당하는 고난을 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내가 당하는 고난이 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내가 열심히 선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인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길거리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큰소리로 전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쥐어줍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냉대를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귀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분은 의를 위하여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봅시다. 그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조용한 아침 시간에 자신을 방해하는 무례함 때문일까요? 그들이 싫어하는 것은 복음의 진리가 양심을 찌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가 억지로 무언가를 내밀기 때문일까요? 그것이 복음을 위한 일이더라도,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가 하는 것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선을 행한다고 무조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열심히 선을 행한다면 고난을 당하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아닌, 정말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복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의인이 받는 고난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세상에 살기에 당연히 고난을 받습니다. 세상의 주관자인 사탄은 성도를 시험하고(고전 7:5), 거짓에 속게 하며(고후 2:11), 참소합니다(계 12:10). 또한 그들은 성도를 올무에 빠뜨려 계속해서 넘어지게 만듭니다(딤전 1:7). 이 사탄과 귀신들에 의해 돌아가고 있는 세상의 가치관은 하나님의 법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사단이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말합니다(벧전 5:8). 오늘날도 사탄이 두루 다니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백성이 의로 인해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복된 일입니다. 고난을 받는 것이 어떻게 복이 될 수 있을까요. 베드로는 그것을 어디서 배웠을까요? 마태복음에는 이에 관해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모세는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한 위대한 사람이었지만, 백성들은 모세의 권위에 도전했습니다. 엘리야도 홀로 바알 선지자와 대적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간 일도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타락하는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지만 결국 웅덩이에 갇힙니다. 참 빛이셨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보여주셨지만 정작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이와 같이 과거에도 의인들이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여러분이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한다면, 이들과 동일하게 이 계보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도들은 공회에 잡혀서 채찍질 당하고 풀려났을 때 예수님을 위해서 이런 고난을 당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심에 감사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난에 참여할 자가 된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공부할 때 학비와 생활비 등으로 생활이 빠듯하여 늘 고민이었는데, 한 친구는 돈이 넘쳐났습니다. 그는 군인으로서 과거 아프가니스탄에서 일했는데 전장에서 일하면 그것을 참작하여 학비와 생활비 등의 다양하고 넉넉한 지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참 부러워 전쟁터에서 무슨 일을 했느냐 물었더니 그는 행정병이었다고 합니다. 별로 큰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엄청난 특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그런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전쟁터에서 사탄의 권세를 이미 끊으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고 우리에게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지만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모든 승리를 이뤄내신 상태에서 우리는 이 전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이미 승리를 향해서 가고 있는데 우리로 하여금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시련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연단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전사들이 한 소년에게 깃발을 함께 들고 행진하게 하는 것을 생각해봅시다. 소년은 전혀 전쟁에 참여한 적이 없지만 그 모든 칭찬과 영광을 함께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루신 모든 승리를 가지고 그 능력을 힘입어 모든 시련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모든 특혜를 주고 계십니다. 주님이 오실 때 놀라운 영광과 기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고난을 당한다면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이것이 정말 우리의 축복이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고”(14). 우리는 이 축복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축복을 온전히 누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또다시 ‘두려워하라’고 명령합니다.

우리는 핍박을 당할 때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나의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에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핍박이 근심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러지 말라고 말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사람들과 영향력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근심하는 것도 믿을 만한 구석이 없을 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통장에 잔고가 많다면 근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근심하지 말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모든 환경을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참새보다 더 귀하지 않냐, 머리칼도 다 세신 바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내 머리카락 하나 떨어지는 것도 통제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두려워할 필요도 근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완벽히 하나님이 통제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한 표현과 같은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 구약에서는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사야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대제국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침략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창과 검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마땅히 두려워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한 내용입니다. 고난을 온전한 축복으로 누리려면 절대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한다면 복으로 여길 수가 없습니다. 고난이 복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신뢰하는 것 뿐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어떤 복이 찾아올까요? 우리는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붙드는 힘이 되신다면 평안을 놓치거나 소망을 잃어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난은 우리에게 기회가 됩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여러분은 혹시 일상생활을 하시면서 평소대로 살아가는데 친구들이 찾아와서 “너는 참 그리스도인 같애, 예수님에 대해 나에게 알려주겠니?”라고 물어온 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회는 평범한 생활을 할 때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그런 기회가 찾아옵니다.

직장 상사가 억압하고 폭언을 할 때에도 베드로의 말씀처럼 그에게 순종하고 선을 행합니다. 그렇게 할 때 상사가 마음을 고쳐먹으면 좋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더욱 악독하게 대하고 일을 많이 시킬 수 있습니다. 그에게 분노가 일어나고 비방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질 것입니다. 그러나 참고 견딥니다.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내가 어떻게 될까 근심하지 않습니다. 나는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삽니다. 그런 모습을 여러분의 동료가 본다면 어떨까요? 너는 뭔가 이상하다, 정상이 아닌 것 같다, 참 독특하다, 너는 무슨 믿는 구석이 있구나, 너에게 무슨 소망이 있느냐 등을 물어올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회입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참고 견딘다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어느 날 로또광고를 보니 차가 부서지고 사고가 나고 다리가 부서지는데도 주인공의 얼굴이 신나서 웃고 있습니다. 알고 보니 그의 손에 로또가 들려 있습니다. 로또가 있으면 모든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메시지입니다(실상은 로또에 당첨된 사람은 불행하게 산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삶이 그러합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어려움과 핍박을 당하고 있는데 뭔가 소망이 가득한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런 그의 삶은 믿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궁금증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회입니다.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고 말씀합니다. 대답할 것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독특한 삶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직장을 마지못해서 다니고 자신을 원수처럼 여긴다면 ‘나와 똑같구나’, ‘하나님을 믿어도 다를 것이 없구나’라고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사는 우리를 보고 별로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 가운데 산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인해 유업을 얻을 것으로 산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질문을 가질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대답할 것을 준비해서 말해주어야 합니다.

최근에 우리는 사회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하고 메르스가 유행하는 등, 국가적인 사고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은, ‘좀더 훈련되었더라면 살릴 수 있었을텐데…’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이 죽어서 더욱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통해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리에 대해 말할 준비가 되었더라면, 하나님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말할 수 있는 훈련된 사람이었다면 더욱 진리가 선포되고 믿지 않는 자의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십시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뤄지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진리를 전파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명령에 따라 항상 진리를 전파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친척이나 이웃, 믿지 않는 가족, 친구들이 구원에 대해 물어온다면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의로 인해 고난을 받을 때 기억해야 할 사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머지않아 우리는 우리가 믿는 진리 때문에 고난 받을 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미국과 유럽이 현재 그러하고 우리나라의 미래 역시 그러합니다.

선을 열심히 행하십시오. 그래서 죄로 인해 받는 핍박을 피하십시오. 열심히 선을 행함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선을 행할 때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만 온전히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자들이 물어올 때 언제든 대답할 준비를 하십시오. 예수님이 누구신지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위해 구원받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