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의로운 자의 기도 – 1
본문 : 시편 17편 1-7절
설교자 : 최종혁
시 17:1-7 [1] [다윗의 기도]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2]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 [3]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4]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5]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 [6]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7]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오늘 저는 구약성경 시편 17편을 통해서 “의로운 자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17편의 가장 위를 보시면 “다윗의 기도”라는 표제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눈 열 여섯 편의 시편에는 다윗이 기도하는 내용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윗의 기도”라고 제목이 붙어있어 “다윗의 기도”라고 가장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시편은 이 시편 17편이 처음입니다.
시편 17편의 전체적인 내용을 한 마디로 말씀 드리면, “보호를 위한 기도,” “보호하심을 구하는 기도” 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어려움, 공격이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 사울에게 쫓기면서 굉장히 곤란한 어려움 가운데 있었고, 다윗의 말년에는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서 도망하여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여기 9절 말씀에 보면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7:9)
다윗을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며 심지어 목숨을 위협받는 어려움과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던 상황이 시편 17편의 기도를 드리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계속해서 하나님께 무언가를 구하고 요청하는 기도의 형태가 이 시편에 많이 드러납니다. “들어주소서,” “응답하소서,” “지켜주소서” 등 이러한 말이 많이 등장하는데, 네 부분으로 이 시편 17편을 나누어 보면,
1~5절까지 다윗은 “들어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6~7절은 “응답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8~12절에서는 “지켜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13~15절까지는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시편 17편 전체가 하나의 기도이지만 각각의 부분이 또 하나의 기도입니다. 이것을 차례로 나누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로 “들어주소서”라는 기도를 1~5절까지 드립니다.
“여호와여”라고 다윗은 항상 기도의 시작으로 하나님을 부릅니다(“여호와여,”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1절)
비슷한 표현이 계속 반복해서 나옵니다. “들으소서,” “주의하소서,” “귀를 기울이소서.” 같은 말이지만 조금 다른 표현을 사용하여 그만큼 다윗이 하나님께 다급한 심정으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에 대해서도 다른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첫째로 “의의 호소,” 둘째로 “나의 울부짖음,” 셋째로는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라고 말합니다.
첫 번째 “의의 호소”는 ‘정당한 호소’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다윗이 지금 하나님 앞에 나와 내어 놓는 기도가 정당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정당한 사건을 가지고 나와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2~5절에 나오는데 잠시 후에 살펴보겠습니다.
두 번째 표현인 “울부짖음”은 어떤 면에서 기도와 잘 어울리고 어떤 면에서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표현입니다. 그 앞에 “의의 호소”가 마치 법정에서 재판관 앞에 나아가 자신의 문제를 논리 정연하게 말하는 것이라면 “울부짖음”은 그러한 논리 정연한 생각, 정리된 이야기가 아닌 마음 속에 있는 것을 그냥 그대로 끄집어 내놓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 말도 못하는 아이가 자신이 무언가 필요한 것을 울음으로 표현하듯 울부짖음은 인간이 가장 자연스럽게 자신의 필요를 말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스펄전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어린아이의 울음과 같다면 지적인 기도는 아니겠지만 더 자연스럽고 유창하지는 않지만 더 진실된 기도일 것이고 우리 하나님께는 더 호소력 있는 기도가 될 것이다.
세 번째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는 다윗의 입술에서 나오는 기도가 거짓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다윗이 드리는 이 시편의 기도도 진실된 것이며 사실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판장 되신 하나님 앞에 나온 다윗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실을 포장하거나 혹은 남을 깎아 내려 자신이 유익을 얻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와 사실 그대로 말씀 드리는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 제 말을 좀 들어주십시오’라고 말하면서 2절부터 그 호소가 정당한 이유를 말합니다.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공평하게) 살피소서(2절)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판결을 구하면서 다른 사람 아닌 하나님이 판단하실 것을 강조합니다.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고 “주의 눈”으로 공평하게 살펴달라고 요청합니다.
판단을 공정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전에 사실 관계에 대한 정확한 조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3절에서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다”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표현은 금이나 은과 같은 보석을 정제하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표현들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고 점검하고 철저하게 조사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조사의 결과는 흠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하나님은 욥에 대해서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욥과 같이 순전한 자가 없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결백하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세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고 합니다. 첫째로 그 마음에 있어서, 둘째로는 말에, 셋째로는 그 행실에 있어서 결백하다고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을 시험하셨습니다. 죄라는 것은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마음에서 시작되어 대부분 입으로 나오거나 행동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죄들은 그냥 그 마음속에만 머물러 있는 죄들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28절에서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 그 자체를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생각을 아십니다. 사람이 볼 수 없는 마음을 다윗은 마음을 보실 수 있는 하나님께 ‘제 마음을 시험해 보십시오, 제 마음을 아시지 않습니까?’ 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시험하셨고 다윗에게 그 마음으로도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리십니다.
두 번째로 말에 대한 시험입니다. 3절 끝부분에 다윗은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번역본에서는 “내가 내 입으로 범죄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였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결심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입도 우리 몸의 일부이지만 성경에서는 다른 모든 몸으로 범하는 죄보다 입으로 범하는 죄를 조금 더 특별하게 대합니다. 다른 죄들에 비해 입으로 범하는 죄는 쉽고 큰 죄가 아닌 것 같아서 사람들이 정말로 많이 범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물건을 훔칠 때는 여러 가지 계획과 준비가 필요하고 실행에 옮길 때도 많은 능력과 노력이 요구되지만 입으로 하는 죄는 복잡한 계획과 많은 노력이 필요없습니다. 그냥 입만 있으면 됩니다. 내 앞에 사람이 있으면 입 하나를 통해 비방이라는 죄를 아주 쉽게 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입으로 하는 죄는 성경에서 특별하게 다루어집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12장 34~3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 그 입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39편 1절에서 자신의 언어생활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조심했는지를 말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이것이 다윗이 오늘 시편 17편에서 결심했던 것입니다. 자신은 혀로 범죄하지 않으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재갈을 먹이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악인 앞에서 말을 조심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마음으로 범죄하지 않았고 그 입으로도 범죄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4절을 보면 이제 다윗은 자신의 행실, 행위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4절)
이 표현은 시편 1편의 복있는 자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시편 1편 1, 2절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시편 17편에서 다윗은 자신의 행사가 그렇다고 말합니다. 주의 말씀을 따라서 스스로 삼가했고,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 5절에서는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길” 혹은 “걷는다”는 표현은 우리의 삶에 대한 표현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한 두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적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이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살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포악한 자의 길이 아닌 하나님의 길을 따라갔습니다. 죄인들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배도의 길이 아닌 순종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께 나와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소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다윗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 저는 하나님께서 아무리 찾아보셔도 제 마음 속에는 죄도 하나도 없고 입으로 죄를 범하지도 않았으며 제 행실도 정말 깨끗합니다. 저는 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있으며 실족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은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자신이 아무런 죄도 없는 의인인 것처럼 이렇게 말했을까요?
다윗은 지금 절대적인 기준 아래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죄 없이 의롭게 살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시편 14편에서 다윗은 이미 모든 사람이 치우쳐 각자의 길을 갔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기준에서 그런것입니다.
시편 17편에서 다윗이 호소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기 전 자신의 삶을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 59장 1, 2절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줍니다. 이것은 구원 받기 전과 후가 동일합니다.
구원 받기 전 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았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아니라 심판자와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자들의 관계였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완전히 회복된 관계를 갖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삶에 있는 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혹은 교제에 영향을 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만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듣지 않으시게 합니다.
시편 66편 18절은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말하고, 요한일서 3장 21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라고 말씀합니다. 죄라는 것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나가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빛가운데 거하시는 분이시고 죄는 어둠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거룩한 분이시고 죄는 그것과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하나님의 속성에 반하는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갈 수 없습니다. 시편 17편에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하는 말은 ‘제가 제 자신을 살펴봤을 때 저의 양심은 하나님 앞에 거리낌이 없습니다’라는 말입니다. 만찬 앞에서 우리가 자신이 완벽할 때만 떡을 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죄를 회개하고 고백하며 만찬에 참여하듯, 다윗은 하나님께 나와 자신을 살펴보고 양심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그렇지 않았다면 시편 17편이 아닌 51편과 같은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자신의 기도를 아뢰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그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나가 하나님께 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기도의 내용과 태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고 성경도 그 부분에 대해 많이 이야기 하지만, 기도에 있어 선행되어야 하는 조건은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반드시 자신을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나의 필요를 구하기 앞서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지금 순종하고 있는 사람인지를 돌아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완벽한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순종의 삶이 곧 완벽한 삶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그분의 거룩하심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 가운데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며 그것이 곧 순종의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의 선행 조건입니다.
1절부터 5절까지의 말씀을 정리하면 다윗은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 이런 일을 당할 그런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이것을 알고 계시니 제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두번째로 다윗은 6~7절에서 “응답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첫번째 “들어주소서”보다 더 나아간 것으로 듣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응답해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6절은 다시 “하나님이여”라는 부름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6절)
‘내가 하나님을 부른 이유는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응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에 대한 확신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7절)
6~7절에서 우리는 다윗은 응답을 요구하면서 하나님의 응답하심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7절을 자세히 보면, 먼저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라고 말합니다. 시편에서 여러 차례 봤던 표현인 “주께 피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겸손하고 낮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 일어나 치는 자들”은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을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의 손에서 하나님은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의 편에 서서 당신의 오른손으로 그들을 건져내십니다. 권능, 능력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십니다. 피난처와 방패가 되십니다. 그들의 보호와 반석이 되십니다. 이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기초하여 응답하심을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다윗이 언급한 중요한 사실은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라는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 단어는 시편 말씀에서 아주 중요한 히브리어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변하지 않는 신실하신 사랑, 호의, 자비, 은혜를 말합니다. 다윗이 구하고 있는 것은 그저 하나님이 아무에게나 내려주시는 일반적인 은혜에 근거하여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약속에 기초한 특별한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7절과 8절의 말씀에 등장하는 표현들은 모세가 출애굽 사건에 대해 기록할 때 사용했던 표현들과 매우 유사합니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출 15:11~13)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 32:10~12)
다윗이 모세의 시편을 생각하여 이러한 비슷한 표현을 사용했다고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을 비슷하게 표현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과거에 출애굽이라는 놀라운 사건 가운데 역사하셨던 하나님이 지금 다윗이 기도하고 있는 순간에도 동일한 하나님으로서 존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언약의 관계에 들어가 그 언약에 성실하셔서 자기 백성들 가운데 기이한 일을 행하시고 놀라운 은혜를 베푸셨던 하나님이 지금 다윗에게도 동일한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신실하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동일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나를 감추소서!”
6~7절의 기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주님께 피하는 자들을 도우시고 당신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분이십니다. 주님 제가 주님에게 피합니다. 저는 주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니 제 기도에 응답해주십시오.”
시편 17편은 오늘날 우리에게 이러한 교훈을 줍니다. 출애굽을 경험했던 하나님의 백성, 동일한 하나님을 경험했던 다윗. 오늘날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은 아니지만 더 나은 언약의 백성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새 언약의 백성이 바로 우리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출애굽때 역사했던 하나님과 다윗의 기도를 들으셨던 하나님이 동일하셨듯, 다윗의 하나님이 바로 여전히 언약에 신실하신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여전히 능력이 있으셔서 그를 피하는 자들을 보호하시고 도우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확신 가운데 나갈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 구할 수 있습니다. 순종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담대히 확신 가운데 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