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은사와 사랑1

본문: 고린도전서 13장 1-7절

설교자: 조정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도는 그 몸을 이루는 여러 지체들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각 사람을 택하여 교회의 지체로 삼으셨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성령의 은사를 그 뜻대로 나누어 주셨으며, 그 신령한 능력으로 서로를 돕게 하셨다. 몸의 각 지체가 기능하여 다른 지체와 유기적으로 연합할 때, 건강한 몸이 되는 것처럼, 건강한 교회는 각 성도가 성령의 은사로 다른 지체를 유기적으로 돕는 교회다. 좋은 프로그램과 체계적인 조직이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성도가 예외 없이 하나님께 공급받은 것으로 다른 성도가 힘을 얻도록 헌신 하겠다는 마음을 품는 것이다. 이타적이고 희생적이면서도 열정적인 그 마음을 성경은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성도가 은사를 받았지만, 그들 모두가 사랑으로 그 은사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고린도 교회만 해도 그랬다. 그들은 주께 받은 것을 마치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했고, 다른 사람의 은사를 시기하며 서로 경쟁했다. 교회가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은사를 사용했고, 자기중심적인 이기심과 교만을 드러냈다. 서로에 대하여 오래 참지 못하고 악한 감정을 표출했으며, 주가 위하여 죽으신 성도를 부끄럽게 만드는 무례한 일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들에겐 부족함 없이 은사가 주어졌지만, 그 은사를 ‘가장 나쁜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에겐 은사를 ‘가장 좋은 방법’으로 사용하게 만드는 사랑이 필요했다. 교회를 “온전하게 매는 띠”, “사랑”은 하나님의 교회에 흐르는 혈액과 같다(골 3:14).

1. 은사 – 사랑 = 무용지물(1-3절)

먼저, 분명한 사실은 아무리 탁월한 은사를 받았어도 사랑 없이 행하면 아무 유익이 없고 도리어 해롭다는 것이다. 바울은 1-3절에서 방언, 예언, 지식, 믿음, 구제 등의 은사가 최고로 활용된 상황을 가정한 뒤, 그렇지만 사랑이 없으면 어떤 결과를 얻는지 충격적인 판결을 내린다. 각각의 상황은 크게 과장되어 있다. 1절에서 사람의 방언(들)을 하는 은사는 천사의 말까지 하는 수준으로 과장됐고, 2절에서 예언하는 능력모든 비밀, 모든 지식을 아는 수준으로 심히 과장됐다. 또한 믿음의 은사는 산을 옮길만한 크기로 확대되어 있고, 3절에서 구제와 섬김은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내어줄 뿐만 아니라 자기 까지 불사르는 극단적인 일에 대신 내주는 데까지 한껏 부풀려졌다. 잠시 상상해 보라.

만일, 교회에 이렇게 탁월한 은사 받은 성도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러 나라 언어로 막힘없이 복음을 전하는 성도, 성경에 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진 설교자, 믿음으로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 척척 받아내는 성도,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성도. 그런데 첫 번째로 충격적인 사실은 그렇게 대단한 은사를 사랑 없이 행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 충격적인 사실은 그 결과 교회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해를 끼친다는 것이다.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3절),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2절),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1절). 사랑 없이 은사를 사용하는 모습은 4-7절에 나오는 사랑의 특징을 배제한 모습과 같다. 성급하고 거만하게, 시기하여 자랑하려고, 자기 유익을 구하려고, 무례히 행하고 분노하면서 은사를 사용하는 경우를 말한다. 

사랑 없이 은사를 사용하면 나에게도 아무 유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은사로 섬김받는 다른 성도들에게도 무의미하다(소리 나는 구리, 울리는 꽹과리, 소음).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는 말은 최악의 평가다. 교회를 이루는 지체로서 철저히 무용지물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면역을 담당하는 지체가 일을 끝내주게 잘하는데, 정상적인 지체를 공격하면 어떨까?(자가 면역 질환). 마찬가지로 은사는 아무리 탁월해도 사랑 없이 사용되면, 백해무익하다. 그래서 은사는 반드시 사랑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러면 사랑으로 사용하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4-7절은 은사를 사용하는 “가장 좋은 길”(12:31), 바로 사랑의 길을 제시한다.

2. 은사 + 사랑 = 그리스도 (4-7절)

은사로 섬길 때 사랑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묘사하기 위하여 총 15개의 동사가 사용됐다. 사랑은 단지 느낌이 아니라 의지적 행동이다. 이성적 동의와 감정적 공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이렇게 행하는 것이다. 본문은 그냥 사랑의 특징을 노래하는 게 아니라 은사를 사용할 때 나타나는 사랑의 특징을 노래한다. 두 개의 긍정형, 여덟 개의 부정형, 네 가지 근본적인 특징. 각각의 특징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은사로 행하신 사역을 통해 가장 아름답게 드러난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다음과 같은 사랑의 특징이 드러나도록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

(1) 오래 참는다: 사랑의 하나님은 인내하신다(롬 15: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표적과 말씀으로 가르치시면서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라고 말씀하셨다(막 9:19). 오래 참는 것은 은사로 섬기는 것을 자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그 가치를 몰라주거나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거나 은사로 계속 섬겨도 전혀 유익을 얻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은사로 섬기는 것이다.  

(2) 온유하게 대한다: 하나님은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다(시 106:1). 예수님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친절(kindness)로도 번역되는 온유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가지고 있는 은사를 겸손히 통제하는 태도다. 예수님은 가지고 계신 지혜와 능력을 자신을 변호하거나 원수를 제압하기 위하여 사용하신 적이 없다. 언제나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셨다. 그것이 바로 온유다. 우리는 하나님 주신 은사로 언제나 친절히 성도를 섬기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3)(4) 시기하지 않는다, 자랑하지 않는다: 시기는 나에게 없고 남에게 있는 것을 대상으로 삼고, 자랑은 남에게 없고 나에게 있는 것을 대상으로 삼는다. 우리는 받은 은사와 분량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시기하거나 자랑하고 싶은 유혹을 항상 받는다. 하지만, 은사는 하나님께 받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자랑해야 한다. 은사를 통해 오직 그리스도만 드러나셔야 한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의탁하지 않으시고 오직 아버지께 의탁하셨다(요 2:24, 17:4-5).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셨다.

(5) 교만하지 않는다: 은사 활용에 있어서 교만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는 것이다(롬 12:3). 하나님이 주신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태도다. 시기와 자랑은 궁극적으로 교만이 맺는 열매다. 교회 안에서 자신이 기대하는 인정과 대우를 바라는 마음엔 교만이 섞여 있다. 마음이 겸손하신 주님은 제자들 중에서도 겸손히 섬기는 자로 계셨다(요 13장). 당신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발 씻기는 주님의 겸손을 본받아 성도의 발을 씻을 것인가? 그러면 교만을 버려야 한다.

(6)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 무례히 행하는 것은 함부로, 합당하지 않게, 예의나 배려 없이, 거칠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아무리 동기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품위 없는 언행은 유익이 아니라 해를 끼친다. 예수님은 아무리 보잘것 없는 사람이라도 그들을 배려하고 귀하게 여기셨다.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도 함부로 대하지 않으셨다. 은사로 서로를 섬길 때, 우리에겐 반드시 예수님을 닮은 품위가 요구된다. 그게 사랑이다.

(7)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40일을 굶주리면서 자기를 위한 빵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지만, 하루 굶주린 무리를 위하여 수많은 빵과 물고기를 만드셨다. 열두 제자의 발을 친히 씻겨 주셨지만, ‘내 발은 왜 씻기지 않느냐?’고 책망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사랑의 섬김엔 이기심이 없었다. 우리의 섬김도 그래야 한다. ‘그럼 나는 무얼 얻을 수 있는데?’, ‘그럼 나를 섬겨주는 사람은 누군데?’라는 마음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이 누락된 마음이다. 예수님처럼 순전한 이타심을 가지고 섬겨라.

(8) 성내지 않는다: 예수님도 때로 분노하셨다. 그러나 그분의 분노는 공의로운 분노였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내지 말 것을 요구한다(엡 4:26). 우리 분노는 대부분 공의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의로운 분노는 하나님과 그분의 이름을 인하여 분노하는 것이라면, 공의롭지 못한 분노는 개인적인 이유로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하는 것이다. 은사로 성도를 섬길 때, 분노가 일어나는 이유는 수만 가지다. 성도를 희생적으로 섬겼지만, 불쾌한 반응을 보이면 화가 난다. 상대방이 거칠게 몰아붙이면 나도 할 말 못 할 말 다 쏟아낸다. 아무리 교회를 위한 것이고, 성도를 위한 것이라도 분노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9)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신이 받은 부당한 대우, 억울한 일 등을 마음에 담아 두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NASB). 주님은 우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셨다(히 8:12).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곱씹지 않고 온전히 용서하시는 은혜로 나타난다. 우리가 은사로 서로를 섬기는 것에 방해가 되는 것 중 하나는 상대방의 잘못이 좀처럼 잊히지 않는 것이다. 사랑하고 싶은데 그가 했던 말이 맴돈다. 사랑으로 섬기고 싶은데 그녀가 한 행동이 계속 떠오른다. 주님은 어떻게 자신을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실 수 있었을까? 그들을 대신하여 죽기까지 사랑하실 수 있었을까? 아버지께 모두 맡겼기 때문이다(롬 12:19). 억울하고 불합리한 일을 하나님께 모두 맡겨라. 하나님께서 모두 아신다. 다만, 사랑으로 섬기라.

(10)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진리와 사랑은 갈등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때로 사랑 없이 전달될 수 있다. 그래도 진리는 진리다. 하지만 그 진리로 유익을 끼치지 못한다. 반대로, 사랑이란 이름으로 불의를 허용한다면, 그건 절대로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불의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언제나 진리와 함께 일한다. 사람들은 종종 진리와 사랑 중 하나를 택해야 할 때가 있고, 그때 사랑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반대를 택한다면, ‘당신이 아무리 옳아도, 그건 사랑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우리는 은사로 서로를 섬길 때, 진리와 사랑 둘 중 하나가 아니라 항상 둘 다 함께 가지고 섬겨야 한다. 때론 4-6절에서 묘사된 사랑의 태도로 진리를 전달해도 사랑이 없다는 질책을 받는다. 결코 낙심하지 말라. 그것은 진짜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이라고 굳게 믿는 그대로 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이 불평하는 것뿐이다. 계속해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라(엡 4:15).

(11-14) 모든 것을 참는다, 모든 것을 믿는다, 모든 것을 바란다, 모든 것을 견딘다: 7절에 기록된 네 가지 사랑의 특징은 지금까지 묘사한 사랑의 특징을 과장하여 요약한 것이다. “모든 것”은 사랑이 믿바라딜 대상을 제한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포용한다. 성경은 예수님의 사랑을 측량해 보라고 권하면서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말한다(엡 3:19).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모든 면에서 충만한 사랑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은 근본적으로 아버지의 사랑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여기 네 가지 사랑의 특징을 ‘근본적’이라고 말한 이유는, 우리가 은사로 성도를 섬길 때, 앞에 10가지 동사로 묘사한 특징을 갖추려면, 우리 또한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롬 8:39). 하나님이 우리가 인내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하나님이 우리로 끝까지 견디게 하신다. 우리는 자신도 타인도 온전히 믿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을 수 있다. 그분의 약속과 섭리를 믿기 때문에 당장 열매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부지런히 은사로 섬길 수 있다. 우리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래도 모든 것을 바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들을 충분히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려면,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뜨겁게 사랑하고 또 그분께 부지런히 구해야 한다. 요컨대, 은사를 사용하는 가장 좋은 길은 우리의 일방적인 노력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과 깊은 사귐으로 걷는 길이다. 사랑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이다. 교회가 서로 실천해야 할 사랑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다(요 13:34). 우리가 주께 받은 은사로 서로를 섬길 때,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사랑이 드러나야 한다. 때론 사랑이 쉽지만, 때론 무척 어렵다. 사랑하기 힘들 때, 우리는 더욱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이 얼마나 자신을 낮추시고 인내로써 우리를 온유하고 친절하게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그 사랑으로 성도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사랑으로 섬길 때, 세상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 13:35). 한 마디로, 사랑 없는 은사는 무용지물로 버려지고, 사랑으로 은사를 사용한 것만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