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유일하신 너희 하나님을 보라
본문: 이사야 40장 12 – 31절
설교자: 최종혁
영생을 얻은 그리스도인이 영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제대로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제대로 보지 않는 모습은 크게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정말로 보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보는 일에 관심이 없어서 하나님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노력하지 않는다. 대충 교회에 나가면서 보고 듣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크게 잘못 사는게 아니면 그 정도로 됐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우 어쩌면 겉으로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교회 안에서도 열심 있고 신실한 성도는 아닐지라도 ‘평균’ 정도는 되어 보이는 성도다. 하지만 성도가 하나님을 보는 일에 큰 관심이 없는 것은 괜찮지 않다. 이런 경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의 극히 일부분만을 경험하고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그렇게 산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원래 그런 줄 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똑같이 기뻐하고 똑같이 슬퍼한다. 가끔씩 하나님을 언급하는 것을 제외하면(예를 들어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하는),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실제로 본인도 뭐가 다른지 모른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만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보려고는 하는데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다. 성경에서 말하는대로 하나님을 보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을 보려고 한다. 하나님을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일정 기간 동안은 꽤나 열심이 있어 보이지만, 결국은 그가 알게 되는 것은 그가 보고 싶어 하는 하나님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가 찾고 있었던 것은 참된 하나님의 이름만 가지고 있던 거짓 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실망했다고 말한다. 때로는 아얘 믿음을 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만족시켜줄 다른 무언가를 찾는다.
예레미야 2:13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했다고 하시면서 생수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이 그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누군가는 내가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버린 것이라고 말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내가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마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기대와 달랐던 메시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것처럼,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을 통해 얻지 못하자 내가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생수를 버리고 물을 가두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를 파고 그것으로 갈증을 해소하려고 하는 어리석음에 빠진 것이다.
같은 비유를 사용하면, 첫번째 경우는 생수를 앞에 두고 그 생수를 제대로 들이키지 않고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똑같이 목마름을 경험한다. 커피를 저으라고 만들어둔 커피스틱을 가지고 쪽쪽 물을 빨면 물이 나오기는 한다. 그러니까 그렇게 물을 마셔야한다고 생각하고 마시는거다. 물을 마시긴 했는데 여전히 목마르다. 그러면서 원래 그런가보다 한다. 그러니 다른 마실 것을 찾는다. 컵으로 들이킨다. 생수도 왠지 몸에 좋을 것 같아 한번씩 마셔준다.
이것이 내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모습이라면, 절대 이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믿는 자의 삶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목말라 우물을 찾아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 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먹을 것을 찾던 유대인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믿는 자의 삶이고 만약 나에게 문제가 없다면, 문제는 하나님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한 것을 지킬 의지가 없거나(거짓말), 약속한 것을 지킬 능력이 없거나(무능력), 약속한 것을 잊으셨거나(무관심), 혹은 약속을 폐하신 것이다. 어느 쪽일까?
아마 어느 쪽도 아니라고 답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중 하나를 은연 중에 택한다. 그래서 27절처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고 말한다. 또한 28절이 암시하는 것처럼 마치 하나님이 힘들고 피곤해서 나를 돌보지 못하시는 것처럼 생각한다. 혹은 기드온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데 어떻게 이런 일들이 나에게 일어났느냐면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분명한다고 말한다(삿 6:13). 시편에서의 다윗처럼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왜 돕지 않으십니까!”라고 잠시 탄식할 때도 있고, 정말로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내 일에 무관심하신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고 그렇게 살기도 한다. 혹은 하나님이 내 일에 관여하셔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분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고, 따라서 문제는 나에게 있다. 내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생의 복을 누리고 있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을 제대로 보지 않고 있다는데 있다.
그래도 우리 입장에서는 좀 억울한 생각이 여전히 있다. 우리도 하나님에 대해서 일부러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인 생각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렇게 느껴질 뿐이다. 하나님이 다른 일에 바쁘셔서 내 일에는 무관심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게 아니면 하나님이 무능력하시거나, 아니면 내가 뭔가를 크게 잘못해서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면 지금 내 상황이 설명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즉 내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 이렇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다른 것들을 찾게 되었을 뿐, 처음부터 다른 웅덩이를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애초에 하나님께서 내가 하나님을 잘 느낄 수 있게 해주셨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는 원망의 마음도 여기에는 포함되어 있다.
어떤가. 정확히 바람핀 남편(아내)이 하는 변명처럼 들리지 않는가. 아내가 평소에 나에게 좀만 더 관심을 가져주고 잘해줬으면 내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남편의 말과 전혀 다르지 않은 말을 우리가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변명이고 핑계다. 그저 자기 죄를 합리화하기 위한 궤변일 뿐이다.
그런데 이 변명에서 주목할 것이 있다. 어쨌든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것이 사실이긴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로 보였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은 멀리 있는 것 같고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내 바로 옆에 있는 수많은 것들은 나에게 기쁨도 주고 만족도 주고 위로도 줄 것 같다. 이것을 거절하고 사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것은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제대로 보지 않을 때 생기는 악순환의 고리다. 하나님을 제대로 보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들을 누리지 못한다. 그리고 그 복을 누리지 못하니 주변으로 눈이 돌아가고 그러니 더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이고 이사야 40장의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직면할 문제이기도 했다. 하나님은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날을 기다리며 지금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말씀해 주셨다. 겨우겨우 버티는 삶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힘을 얻는 삶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이 말씀을 통해 우리도 이 현실의 어려움과 유혹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목마르지 않은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지 배울 수 있기를 원한다.
총 66장으로 구성된 이사야는 구약과 신약의 축소판이라고도 불려진다. 처음 39장은 죄와 심판에 대한 말씀이 강조되고, 이어지는 40장부터 66장까지는 구원과 회복에 대한 말씀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던 자기 백성을 심판하기로 결심하셨다.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북쪽의 이스라엘은 이미 멸망했고, 이사야는 남쪽의 유다 역시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에 대해서 예언했다. 하나님은 이미 결정하셨고 이 결정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 유다는 다시 회복될 것도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다시 언약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고 메시아를 통해 온전히 회복될 것이다. 그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가 시작되는 40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사 40: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선지자는 하나님을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한다. 나하고는 상관 없는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의 관계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여 언약에 따라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을 그들을 “이 백성”이라고 부르셨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완전히 버리셨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다시 하나님은 그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실 것이다. 그들을 구원하여 회복하실 것이다.
그런데, 백성들 입장에서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아니 당연히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회복은 바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무 것도 하고 계시지 않는 것 같고, 하나님의 말씀은 멀어 보이는 그때, 그리고 내 주변에는 나에게 회복을 약속하는 다른 것들이 가득한 그 때, 하나님께서 정말로 그렇게 하실 것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지금 그들을 이 말로 위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첫째로 하나님은 이렇게 외치라고 하셨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서는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으로 하나님은 이렇게 외치라고 하셨다.
사 40: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높은 산에 올라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힘껏 소리를 높여서 외치라고 하신다.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말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이것이 궁극적인 위로의 말이다.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현실’이라고 말하는 그 모든 것들 이전에 하나님을 보라는 것이다. 28절은 이렇게 말한다.
사 40: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1절도 동일하게 묻는다.
사 40:21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알라고 말하지 않는다. 들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말씀은 이미 알고 있고 들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당연히 알고 있는 그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심지어 이 사실은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즉 태초부터 알려진 너무나 분명하고 명백한 사실이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야 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볼 때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래서 26절은 이렇게 말한다.
사 40: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그럼 이제 우리 하나님을 보자. 이 하나님이 정말로 그 말씀하신 것을 이룰 수 있는 분이신지, 그래서 말 뿐이 아닌 진짜 위로를 줄 수 있는 분이신지 생각해 보자.
위대하신 하나님(12-17절)
먼저 12절은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지를 말한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다.
사 40:12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 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
정답이 무엇일까? 하나님이시다. 더 정확히는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다다.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리는 것은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손이 큰 사람이라고 해도 한컵의 물조차 그 손바닥에 담을 수 없다. 그에 비해 하나님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릴 수 있을만큼 크신 분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후에 언급되는 것들도 보라. 하늘, 땅, 산, 언덕 등은 모두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큰 것’들이다. 우리가 감히 그 크기를 짐작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 그런 것들을 하나님은 마치 어린아이가 흙 장난을 하듯이 그 손으로 저울로 측량을 하신다는 말이다.
이사야는 일부러 여기서 대조를 하고 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을 하나님의 가장 작은 것과 대조한다. 손바닥, 뼘, 되, 접시 저울, 막대 저울들은 모두 작은 단위다. 우리가 바닷물을 헤아리려면 손바닥이 아니라 훨씬 더 큰 단위가 필요하다. 손바닥으로 헤아린다면 앞의 숫자가 우리가 읽기도 힘들도 가늠도 잘 안되는 숫자가 나오기 때문이다. 하늘을 뼘으로 재는 것도 마찬가지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우주를 포함한다. 지금 우리는 우주를 빛이 진공에서 1년동안 진행하는 거리인 ‘광년’을 단위로 계산한다.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큰 단위인 km로는 1광년이 9조 4,607억 km다. Km로 해도 숫자가 복잡하고 감이 너무 안오기 때문에 광년이라는 훨씬 더 큰 단위를 사용하는건데, 이것을 우리의 뼘으로 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그 손바닥이 하나님의 손바닥이고, 그 뼘이 하나님의 뼘이라면 얘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만큼 크신 분이시다.
그런데 여기 사용된 표현들은 과장되었다. 작은 것을 크게 표현한 과장이라면 바다와 하늘, 땅 등의 피조물에 대한 과장이다. 바닷물은 하나님의 손바닥으로 헤아릴만큼 많지 않다. 하늘은 하나님의 뼘으로 잴만큼 넓지 않다. 하나님의 되가 있다면 땅은 되의 바닥을 채울 수도 없다. 하나님의 저울에 산이든 언덕이든 눈금 하나 움직일 수 없다.
이렇게 보면, 반대로 큰 것을 작게 표현한 과장이기도 하다. 마치 하나님이 그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릴 수 있을 것처럼 작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너무 큰 것은 우리 피부에 와닿지 않으니, 하나님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축소 과장해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크신 분으로 그렇게 크신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다음으로 13-14절은 하나님의 크신 지혜에 대해서 말한다.
사 40:13–14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14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
우리는 어떤 작은 결정을 할 때도 도움이 필요하다. 더 잘 아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고 서로 의논해야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다. 왕들도 그렇다. 주변에 왕을 돕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모사가 필요하고 함께 의논할 사람들이 필요하다. 왕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알고 항상 지혜로운 결정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묻는다. 누가 하나님을 지도하고, 누가 하나님을 가르칠 것인가. 하나님께 더 나은 길을 보여줄 존재가 있는지, 하나님이 같이 의논하면 좋은 존재가 있는지 묻는다.
이 질문은 욥기 끝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셨던 질문을 생각나게 한다. 욥은 극심한 고난 속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했다. 왜 하나님께서 죄를 범하지 않은 나에게 이렇게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다면서 할수만 있으면 하나님을 찾아가서 내 사정을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런 욥에게 하나님은 피조 세계에 대한 계속되는 질문을 통해 말씀하셨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있었느냐, 너는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매가 떠올라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너의 지혜로 된 것이냐.와 같은 질문들을 통해 ‘네가 정말로 나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느냐? 네가 정말로 나보다 더 이 세계를 더 공정하게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하나님은 욥에게 물으신 것이다. 이에 대해 욥은 마침내 이렇게 반응했다.
욥 42:1–3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하나님 앞에서 안다고, 지혜롭다고, 하나님은 모르는 무언가를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람 뿐 아니라 어떤 존재도 그렇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지혜를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새로운 지식은 없다. 하나님께 예상 밖의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 46:10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이미 시작할 때 그 끝이 어떻게 될 것은 하나님은 알릴 수 있으시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서 먼저 말씀할 수 있으시다. 사실 지금 이사야 40장의 내용도 그 중 하나다. 하나님은 아직 바벨론에게 멸망하지도 않은 유다를 향하여 그들이 멸망할 것이고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겠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복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40장, 그리고 이후의 말씀을 읽어 보면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이 일을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단언하여 말씀이 기록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40장 이후의 말씀은 이사야가 아닌 그 이후의 다른 사람이 기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어감이 그렇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루어질 일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이루어진 일에 대한 말씀으로 들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다른 사람일 필요는 없다. 이것이 단지 사람의 말이라면 그래야하겠지만,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이미 알고 먼저 말씀할 수 있으시다. 하나님의 뜻이 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하나님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예상하고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도 많은 사람의 지혜와 지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마저도 상황이 달라지면 계속 달라진다. 그것이 우리의 최선이다. 기상 예보가 맞지 않는다고 다들 투덜거리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예상하거나 예측하지 않으신다. 예언하신다. 알고 계신 사실을 말씀하시면 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과거와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감히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크신 지혜를 하나님은 가지고 계시다.
15-17절에서 이사야는 이 사실을 백성들이 볼 현실이 적용한다. 하나님이 이런 위대한 능력과 위대한 지혜를 가지신 분이라면, 이 백성들을 두렵게 하고 혹은 이 백성들이 의지하고 싶어하는 그 모든 나라들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사 40:15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이사야는 “보라”고 강조한다. 12-14절의 하나님을 보고 이제 이 열방들을 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알게 된다.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과 같다. 어떤 나라든 상관없다. 앗수르든, 바벨론이든, 애굽이든, 그 이전의 모든 나라들, 그 이후의 모든 나라들이 다 여기에 해당된다. 그들이 얼마나 크든, 그들이 얼마나 강력하든, 그들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혹은 의지하고 싶게 하든, 그들은 하나님에 비하면 통의 물 한방울과 같다.
이조차도 과장해서 많이 쳐준 것이다. 그들은 저울의 작은 티끌 같다. 저울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하는 티끌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저울에 무게를 재는데 다른 무엇이 올라가 있으면 그것을 제거하겠지만, 티끌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그 무게를 잴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비해 모든 나라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섬들은 그보다도 더 작은 떠오르는 먼지와 같다. 바닥에 붙어있지도 못할 정도로 가벼운 먼지인 것이다.
이런 크신 하나님이시기에 나무와 짐승으로 유명한 레바논의 모든 나무와 짐승으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다고 해도 충분하지 않다.
사 40:16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우상들은 숭배자들의 제물을 요구했고 그것에 의존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그렇게 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너무 크시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레바논이라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부족하고 무의미하다. 그리고 이사야는 17절에서 다시 한 번 모든 나라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무의미 함을 강조한다.
사 40:17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모든 열방이 실제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두렵게 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 혹은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의지하고 싶은 매력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제 아무리 강하고 매력적인 나라라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위대하신 분이시다. 그 능력과 지혜가 위대하시다. 그러니 그 어떤 길도 하나님께 숨겨져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은 없다.
어떤 목사님이 기도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나서 한 성도가 나와 목사님께 물었다고 한다. “목사님, 제가 사소한 것을 하나님께 기도해도 될까요, 아니면 큰 일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까요?” 비슷한 질문을 받았던 적이 있다. 하나님은 어떤 기도도 들으시니 걱정 말고 기도하시라는 식으로 대답을 했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더 명확하고 충격적인 답을 하셨다고 한다. “자매님, 하나님께는 ‘큰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엇보다 크신 분이시니, 그 분께 ‘큰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실 수 없는 일, 혹은 하나님이 할 수는 있는데 겨우하는 일 같은 것은 없다. 우리가 위대하신 하나님을 제대로 본다면 감히 하나님께 ‘큰 일’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열방도 하나님 앞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들은 없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내 개인의 일이 하나님께 ‘큰 일’일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 수 없고, 어떻게 하실 줄 모르는 그런 ‘큰 일’이라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모든 일은 하나님께 ‘작은 일’이다. 다만 하나님은 그 작은 일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고 돌보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내 길은 하나님께 숨겨졌다고 말하지 말라. 내 송사는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고 하지 말라. 그것만큼 위대하신 하나님을 초라하게 만드는 말도 없다.
사실 여기까지 보면 오늘 설교의 제목은 ‘위대하신 너희 하나님을 보라’가 적당할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설교 제목을 하려다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더 정확히는 하나님의 유일한 위대하심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12절을 다시 보면 이사야는 “누가”라고 묻고 있는데, 그에 대한 답은 그냥 “없다”가 아니라 “하나님 외에는 없다”다. 13-14절도 계속에서 “누가”라고 물어서 하나님 만이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누가”라고 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여러 가능한 대답을 생각하게 되고 비교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모든 질문에 유일한 답이심을 자연스럽게 보게 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제대로 볼 필요가 있는 것 이상으로, 오직 하나님 만이 위대하시다는 사실을 제대로 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다신론’ 문화에 기인한 부분도 있다. 하나님이 위대하시지만 다른 신도 위대하지 않냐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을 정복한 앗수르의 신을 비롯한 제국 바벨론의 신, 애굽의 신들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에게 유혹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속에서 오직 하나님 만이 유일하신 분이심을 이들은 제대로 볼 필요가 있었다.
오늘날 우리도 같은 상황에 있다. 실제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점을 보러 가는 일이 있기도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어도 우리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의지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재물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도 위대하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단지 위대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이사야는 질문들을 통해 드러냈고, 이제 18절부터 말씀에서 더욱 분명하게 그 사실을 강조한다.
유일하신 하나님(18-26절)
사 40:18–20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 19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20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에 비하는 것들이 있다. 바로 우상들이다. 이사야는 그 우상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라고 한다. 이사야는 우상에 대해서 다른 곳에서도 말하는데, 그때마다 그 아이러니함을 통해 어리석음을 지적한다. 여기서도 그렇다. 우상은 그것이 금이든, 은이든, 나무든, 뭘로 만들었든 사람이 만든 것이다. 그것은 부어 만들든 깎아 만들든 사람이 만든 것이다. 그래서 흔들리거나 넘어지지 않도록 사람이 잘 세워주어야 한다. 우상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고 혼자 서있을 수도 없다.
이에 비해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사 40:21–24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22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 같이 치셨고 23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24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 같도다
우상들은 사람들이 만들었지만 하나님은 사람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 하나님은 이미 살펴본 것처럼 너무나 크신 분이셔서 그 앞에 사람들은 메뚜기 같을 뿐이다. 그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앞에 세상의 귀인들이나 사사들 즉 세상의 통치자들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그들은 스스로 높이고 자신이 이룬 것을 자랑하지만 하나님의 입김에 흔적없이 사라지는 하찮은 지푸라기나 다름없다. 우리가 잘 아는 느부갓네살 왕이 이 사실을 처정하게 깨달았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당히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 40:25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거룩하신 이”시다. 모든 것과 구별되는 위대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물으신다. 나와 비교할 수 있는 존재가 있느냐, 나와 동등하다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있느냐.
없다. 없는게 맞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왕들을 하나님과 비교하고 있었다. 나라들을 하나님과 비교하고 있었다. 우상들을 하나님과 비교하고 있었다. 하나님을 제대로 보고 있지 않으면 비교가 된다. 뭔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이것들도 하는 것 같다. 혹은 더 나아가서 하나님에게서 얻을 수 없는 어떤 것들을 이것들을 통해서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님을 생수의 근원으로 보지 못하니 터진 웅덩이나 샘이나 별로 차이를 모르는 것이다.
우리도 비슷하다. 우리도 하나님과 다른 것들을 비교하고 있다. 세상의 좋은 것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좋은 것을 주실 수 있는지를 비교한다. 나의 문제를 보면서 하나님이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지, 아니면 다른 무엇이 해결해줄 수 있는지를 비교한다. 나의 외로움은 하나님이 해결 못하실 것 같다. 나의 두려움은 하나님이 해결 못하실 것 같다. 나의 고통은 하나님이 해결 못하실 것 같다. 나의 장래에 대한 문제는 하나님이 해결 못하실 것 같다. 내가 먹고 사는 현실적인 문제들은 하나님이 해결 못하실 것 같다.
그런 우리에게 성경은 다시 하나님을 보라고 한다.
사 40: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눈을 높이 들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하늘이다. 그 하늘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별들이 가득하다. 오늘날 사람들이 만든 불빛과 먼지 때문에 그 별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은 꽤나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우리가 만든 것들 때문에 하나님이 만드신 별을 보지 못하는 만큼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사야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의 밤하늘에는 셀 수 없는 별들이 가득한 것이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셀 수 없는’이 아니라 ‘셀 수 있는’ 별들이다. 숫자만 대충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 각각의 이름을 아시고 부르신다. 그 어떤 별 하나도 제외되지 않는다.
이 묘사는 마치 군대의 대장이 자기 병사들을 불러내는 모습과도 같다. 특히 별들은 당시의 사람들의 숭배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일사불란하게 앞으로 나와 도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아신다. 집합적으로 아시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아신다. 어떤 별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을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별들을 만드셨고, 만들어만 두신 것이 아니라 알고 계시고, 자기 권세 아래 두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사야는 ‘비유’를 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로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실제로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이런 하나님이 “너희 하나님”이라고 이스라엘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을 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같은 하나님을 바라본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되어야 하는지를 밝힌다.
합당한 결론(27-31절)
사 40: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이스라엘은 회복으로 가는 과정에서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우리도 지금 경험하는 어려움 중에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이것이 ‘현실’을 보고 있던 우리의 반응이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지, 왜 나에게 이런 상황을 허락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좌절하기도 하고 낙망하기도 한다. 그래서 다른 무언가를 찾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런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사 40:28–31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이사야는 다시 한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리하여 말한다.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모든 능력과 지혜를 가진 분이시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앞에서 강조했던 부분이다. 그런데 여기는 “영원하심”이 추가되어 있다.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과 지혜는 하나님의 전성기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닌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다른 모든 것을 구분하는 근본적인 차이 중 하나다. 피조물들도 때로는 강하다. 빠르다. 지혜롭다. 아름답다. 경이롭다. 하지만 일시적이다.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간다. 가장 빠른 동물이라고 하는 치타는 몇 초 이상은 달리지를 못한다. 한계가 있는 것이다. 부족함이 있는 것이다.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셔서 그 능력도 영원하다. 그 지혜도 영원하다. 한이 없는 것이다.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능력과 지혜를 나눠주신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에게 그렇게 하신다. 아무리 젊고 힘이 센 사람이라고 해도 피곤하다. 하지만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 즉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 그래서 피곤하지 않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표현인지 보라. 31절의 곤비하지 않고 피곤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28절에서 하나님께 사용된 표현이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피곤하고 곤비하지만,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하나님처럼 피곤하지 않고 곤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삶의 모습이다. 이것이 다시는 목 마르지 않을 생수를 마신 자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겨우겨우 버티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힘있게 살아가는 것이다. 자기 힘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유일하고 참된 위로의 말씀이다.
그럼 이제 결론은 명확하다. 유일하신 너희 하나님을 보라. 그리고 그분을 의지하라. 지금 현실이 어떻게 보이든 상관없이 이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만 의지하라. 그것이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런 말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 힘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이 아니면 당연히 이 삶은 어렵고 힘든 것을 넘어 불가능한 삶이다. 우리 앞에 어려움이 있다. 문제가 있다. 여전히 유혹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이길 수 있게 하신다. 우리가 다른 무엇이 아닌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
중요한 것은 소망 가운데 믿고 기다리는 것이다. 여기서 조급한 마음에 다른 웅덩이를 판다면 결국 우리는 생수가 주는 참된 해갈을 경험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또 다시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앙망해야 한다. 하나님께 힘과 지혜를 구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늦지 않으실 것이지만 이르지도 않으실 것이다. 정확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루신다. 그 무한한 능력과 지혜로 그렇게 하신다. 그러니 우리는 소망 가운데 믿고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크심을 보았는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았는가. 그럼 감히 그 어떤 것도 하나님과 비교하지 말라. 그런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다. 유일하신 우리 하나님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