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우리 왕을 찬송하라

본문 : 시편 47편

설교자 : 최종혁

 

이 시편의 주제는 매우 명확하다. 특히 6절을 보면 더 이상 강조할 수 없을만큼 분명하게 주제를 강조한다. 하나님을 찬송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찬송은 특별히 ‘음악’이 동반된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내는 방법은 많이 있다. 그 모든 것을 예배라고 할 수 있고 찬양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 이 시편이 특별히 말하고 있는 것은 음악을 동반해서 즐겁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즉 찬송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도 여러가지지만 그 내용도 여러가지가 될 수 있다. 그분의 능력, 거룩, 사랑 등 예배의 주제는 많다. 이 시편은 그 중에서 하나님의 왕되심을 핵심 주제로 언급한다. 그런데 이 시편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하나님을 “온 땅의 왕”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우리 왕”이라고도 한다. 객관적으로 하나님이 왕이심만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혹은 관계적으로 우리 왕이심에 대해서도 찬송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편의 주제는 “우리 왕을 찬송하라”이고, 이것이 곧 오늘 설교의 제목이자 주제다. 먼저는 “우리 왕”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찬송하라”는 명령에 대해서 이 시편이 말하고 있는 바를 나누면서 교훈을 얻기 원한다.

 

 

I. 우리 왕(2-5절)

A. 높으신 왕(2절)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2절)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그보다 먼저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어떤 분이신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드러내주신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을 섬기며 그 뜻에 따라 살아가기에 충분한 계시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하나님의 여러 속성 중 이 시편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분이 지극히 높으신 ‘왕’이시라는 사실이다. 단순히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온 땅을 다스리는 왕’이시다(cf. 7, 8절). 그래서 이 하나님은 두려우신 분이시다. 하나님을 멀리서만 보면 잘 모른다. 그저 여러 종교들에서 말하는 신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하나님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면 크고 위대하신 분이시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질 수 있일 것이다. 하지만 그분을 정말 가까이서 본다면, 즉 제대로 안다면 그분의 크고 위대하심으로 인해 우리 안에 두려운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거대한 피조물들을 만날 때 우리가 그렇다. 나와는 그 크기와 힘을 비교할 수조차 없는 것들 앞에서 우리는 무력감을 느끼고 두려워 한다. 자연 재해들을 만날 때 그렇다. 거대한 산, 협곡, 폭포, 바다 앞에 설 때 그렇다. 시간이 지나 우리가 우주에 나갈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하물며 그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겠는가!

 

그런 하나님을 부분적으로나마 몸소 체험했던 사람들의 고백을 들어보자.

 

라합

수 2:9-11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에 대해서 듣고 라합은 하나님을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고 고백한다. 하늘에 땅에 산에 바다에 다 다른 신이 있다고 믿고 살았었겠지만,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능력을 보여주신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라합은 하나님 만이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욥 42:1-6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은 이미 하나님을 알았던 사람이지만 자신의 고난에 대해 고민하고 번민했다.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일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에 의해 주권적으로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했던 말들을 거두고 회개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의문을 제기할 권리가 자신에게는 없음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의 경험은 더욱 극적이다. 그는 제국의 왕이었지만 하루아침에 이성을 잃고 짐승과 같은 삶을 살게 되었다. 자신의 이룬 것들을 보고 교만해진 그를 하나님께서 낮추신 것이었다. 그리고 회복된 후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단 4:34-37 [34]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35]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36] … [37]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이들이 각자 하나님을 경험한 방법은 달랐다. 라합은 간접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들었다. 욥은 고난 중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세상 최고의 정점에 있다고 생각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낮추시고 회복시키셨다. 이런 각자의 경험에 대한 결론은 동일했다.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왕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일을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세상의 어떤 권세있는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없다. 하나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온 땅의 왕이시다.

 

B. 낮추신 왕(3-4절)

그런 하나님을 “우리 왕”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통치하신다는 의미에서 모두의 왕이시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여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다. 하나님은 친히 자신을 낮추셔서 그들 가운데 자기 이름을 두셨고 그들을 통해 자신이 왕임을 드러내셨다. 바로 이스라엘이다.

 

3-4절의 말씀은 특별히 가나안 땅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사건을 말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나라들을 우리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3-4절)

사실 이 말씀을 적용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은 더 찾아볼 수 있지만, 가장 분명하고 기억에 남는 사건은 가나안 정복 전쟁이다.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그 땅을 그의 후손들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결국 그 땅을 주셨다. 신명기와 여호수아를 읽어보면 이 땅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오는데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결정하시고 행하신 일이다.

 

가나안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무슨 권리로 우리가 사는 땅을 당신들 사람들에게 주냐?”고 반박할만한 일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모든 권리를 가지고 계신 분으로서 그렇게 하실 수 있었다. 처음 가나안의 민족들에게 그 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들의 죄가 가득했을 때 심판하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의 땅을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다.

 

다신론이 지배적이었던 세상에서 하나님은 모든 민족들이 섬기는 신이 거짓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이 역사를 통해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편에 선 이스라엘을 누구도 이길 수 없었다. 여호수아는 그 선봉에 서서 그 땅의 백성들을 정복했다. 하지만 그들을 위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택하고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야곱”이라고 표현하였다.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을 이스라엘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 땅을 주신 것은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하실 것을 말하면서 그 이유가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크거나 혹은 더 의로워서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오히려 그들은 작았고 하나님 앞에서 목이 곧은 백성들이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사랑스럽고 사랑받을만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기로 결정하고 그렇게 행하신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보실 수 있도록 높아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시려고 스스로 낮추신 것이다. 왕이 그 백성을 돌보기 위해 그들을 찾아온 것이다.

 

C. 높아지신 왕(5절)

하지만 하나님은 그 승리를 통해, 그리고 그 백성들을 찬송을 통해 다시 본래의 자리로 올라가신다.

 

“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5절)

본래 높으신 왕이신 하나님께서 더 ‘올라가실’ 곳은 없다. 다만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통해 하나님이 본래의 자리에 앉으시는 것 뿐이다. 이것이 찬송의 의미다. 우리 안에 들어온 죄는 왕이신 하나님을 그 보좌에 앉으시지 못하게 했다. 하나님은 왕이시지만 지금 이 세상 속에서, 그리고 우리들 안에서 왕으로서 계시지 못하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은 찬송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왕으로서 이 세상 가운데서 선포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런 특권을 누렸고 또한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승리로 구원하시고 땅을 기업을 주시고 주권적으로 사랑해 주시는 “우리 왕”이셨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용된 이런 표현들이 신약의 교회에게는 더욱 영적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사용된다. 그들은 애굽에서 구원을 얻었고 광야에서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있었던 전쟁에서 구원을 얻었지만 우리는 영원한 심판에서 구원을 얻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땅의 기업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영원한 기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들의 어떠함과 관계없이 선택하고 사랑하셨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 믿는 자들도 그렇게 선택하고 사랑하셨다. 창세 전에 사랑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셨다(엡 1:4-5). 구원 받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족속이고 왕 같은 제사장들이고 거룩한 나라고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다(벧전 2:9).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기 때문이다(골 1:13).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는 이 단순한 일을 이루기 위해 왕이신 예수님은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자기를 낮추셨다(빌 2:6-8). 예수님의 낮아지심으로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우리 왕”이라 부를 수 있다. 우리 왕을 찬송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의 특권이며 의무다. 우리의 찬송을 통해 이 땅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자리에 올라가신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찬송해야할까? 찬송하라는 명령과 관련된 표현을 통해 살펴보자.

 

 

II. 찬송하라(1, 6-9절)

A. 기쁨으로(1절)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1절)

“즐거운 함성 중에”, “나팔 소리 중에”(5절)

이 표현들은 쉽게 말하면 승리의 축제를 묘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조용히 묵상하고 감사하는 것과는 다르다. 소리를 내고 외친다. 단순히 노래가 흥겹고 즐거워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기쁜 것이다.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우리는 노래로서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문화는 전통적으로 이렇게 기쁨을 표현하는 것에는 인색한 것 같다. 문화가 달라지면 아마 이런 표현들도 좀 더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반드시 우리가 획일적인 모습으로 기쁨을 표현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는 춤을 추고 뛰는 것이 자연스러운 기쁨의 표현일 수 있다. 누군가는 그저 힘차게 노래하는 것으로 기쁨을 표현할 수도 있다. 각자에게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기쁨을 표하고 서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찬송은 기쁨의 찬송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할 때 우리가 엄숙하고 진지한 찬송을 할 때도 많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신다. 만찬 예배도 마찬가지다. 주님의 죽으심을 중심에 두고 그리스도를 기념하지만 기일에 돌아가신 분을 기념하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끝나지 않았다. 부활하셨다. 하늘에 오르셨고 왕으로서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의 찬송은 궁극적으로 기쁨의 찬송이다. 왕이신 하나님을 그분이 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기쁘게 찬송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경험한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이다.

 

B. 전심으로(6절)

“하나님을”, “우리 왕을”

우리의 찬송에는 하나님이 중심에 계셔야하고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하나님만이 찬송을 받으셔야한다. 묘한 차이이지만 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중심에는 “내”가 있을 때가 있다. 마치 바리새인이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저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라고 감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감사가 아니다.

 

이 바리새인정도는 아니더라도 우리의 찬송에 하나님이 아닌 무언가가 중심에 있을 때도 있다. 특히 남을 위로해주거나 축복해주는 노래들이 그럴 때가 있다. 때로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님이 나를 위해 계신 분인것처럼 쓰여진 가사들도 있다. 위로나 축복은 좋지만 그것을 위해 하나님을 불쌍하고 무능하게 만드는 것은 찬송이 아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높고 위대한 왕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자리를 낮추지 말라.

 

내용은 하나님에 대한 것인데 찬송을 하는 사람은 나를 드러내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지 들어봐라는 식으로 노래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사람들 앞에서 찬송하는 경우 이런 유혹이 많고 그로 인한 싸움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찬송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셔야함을 계속해서 기억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나타내고 하나님이 왕이심을 선포하는 것이 우리의 찬송이다. 사람들이 왕자를 보게 해야지 백마를 보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C. 최선으로(7절)

“지혜의 시”

내용이 지혜에 관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용이 지혜롭게 쓰여졌다는 의미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정교하게 혹은 매우 기술적으로 쓰여진 찬송을 의미한다. 국가의 중요한 행사 같은 때 음악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경우 유치원생이 나와서 엉망으로 악기를 연주할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최고의 음악가들이 모여서 최고의 음악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그런 자리에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 되고 명예가 되는 경우들도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도 그러해야한다. 물론 ‘최고’가 아닐 수 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도 결과물이 완벽하지 않겠지만, 주어진 환경과 재능 안에서 열심과 성실로 하나님을 높여야 한다. 그것이 왕을 찬송하는 백성들의 자세다.

 

D. 모두 함께(8-9절)

8-9절은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뭇 나라의 고관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하나님의 것임이여 그는 높임을 받으시리로다”(8-9절)

이 말씀은 언젠가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에서 성취될 일이기도 하고 또한 계속해서 이 땅에서 추구해야할 모습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며 왕이신 하나님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셨다. 하지만 그것은 그 외의 모든 백성을 무조건 심판하고 멸망시키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원하셨다. 8절 말씀처럼 그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원하셨다. 세상의 모든 방패들이란 표현은 한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로 그 나라의 고관들, 지도자들을 의미한다. 그들도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고 그들도 하나님을 높여야하는 자들이다.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왕으로 찬송해야할 자들이다.

 

결국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시기 때문에 온 땅에 속한 모든 자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찬송해야한다. 하나님을 ‘우리 왕’으로 고백하며 그분의 구원과 약속과 사랑을 경험하며 그분을 높여야한다. 그래서 “우리 왕을 찬송하라”는 명령은 우리 모두가 마땅히 순종해야할 의무다. 노래 실력, 음악적 재능과 관계 없다. 왕이신 하나님 앞에 겸손이 무릎을 꿇고 우리의 가진 것으로 그분을 높이는 것이 순종이다.

 

 

도전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 것인지, 시작되고 있는지, 시작될 것인지를 가지고 논쟁한다. 그 논쟁에 의미있는 부분도 있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왕이셔서 언제나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않든 왕이시다.

 

그래서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단지 과거로, 혹은 현재나 미래로만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모든 것을 포함하고 그 이상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적이며 동시에 외적이다. 그 나라는 자발적 순종이자 강제적 복종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이고 하나님은 어디서나 모든 것을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미 있는 단 하나의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그 나라의 백성인가? 그 중 하나인가? 나는 그러한가?”

 

이것이 정말 중요한 질문이고 의미있는 질문이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우리 왕”이라 부르며 찬송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찬송은 즐거운 찬송이다. 어둠의 권세 아래 있을 때 알지 못했던 기쁨의 찬송이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왕이 어떤 분이신지 알면 알수록 더욱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찬송이다. 전심으로 그리고 최선을 다해 드릴 찬송이다. 우리의 그 찬송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로 올라가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언제나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