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리 더불어 누리는 사귐, 교제
본문 : 요한일서 1장 1절~4절
설교자 : 조정의
2020년 새해부터 시작한 은혜의 방편 시리즈 설교가 한 바퀴 돌아 다시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말씀, 기도, 찬양을 다뤘는데, 이 특별한 방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풍성히 내려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이 방편을 사모하고 기쁨으로 참여하기 원하는 마음에서 이 시리즈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교제를 살펴볼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목표는 아주 단순합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더불어 누리는 사귐, 즉 교제가 세상에서 절대로 찾을 수 없는 아주 특별하고 귀한 것임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입증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교제가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우리가 누구와 더불어 사귐을 갖는지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똑똑히 보고 알기 원합니다. 그래서 더욱더 교제를 사모하고 교제 가운데 충만한 기쁨을 얻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이 놀라운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줄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일서 1장 1-4절입니다.
1. 우리가 누리는 사귐, 교제란 무엇인가?(1:3a)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이 쓴 편지입니다. 1세기와 2세기 기독교 문헌에서 요한일서는 한 번도 요한의 저작권을 의심받지 않았습니다(요한복음과 유사성: 빛, 어둠, 영생, 사랑 강조). 요한은 주후 85-96년 사이, 밧모섬에서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 이 편지를 자신이 장로로 섬기던 에베소 교회에서 썼을 가능성이 큽니다. 편지의 대상은 인사말에 적혀 있는 것처럼 “너희”입니다(2, 3절). 이 말은 곧 특정 대상을 알 수 없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쓴 편지라는 것입니다.
요한이 삶의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사도로서 다음 세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 편지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요? 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지금 이 편지를 통해 요한과 그의 동료들이 보고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죠? 계속 이어서 보시면,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사귐이 있게 하려는 것, 그것이 이 편지의 목적입니다. 다른 말로 교제하기 원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 하기를 힘”썼는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교제’가 바로 사도 요한이 본문에서 말한 ‘사귐’과 같은 단어입니다. 헬라어로는 ‘코이노니아’입니다.
요한이 이 편지를 통해 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코이노니아’, 즉 ‘사귐’입니다. 사도로서 요한은 이 편지를 통해 가르침을 전달하고, 그 가르침을 받은 자들과 서로 ‘교제’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나누기 원했던 사귐, 교제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곧 우리가 누리는 사귐, 교제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줄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교제”라고 하면 좁은 의미에서 ‘대화’를 생각합니다. 교제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은 성도가 함께 대화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 1층 홀에 들어가는 문에 ‘교제실’이라고 쓰여있습니다. 밥을 먹으면서 우리가 ‘대화’하기 때문입니다. ‘분반 교제’라는 말도 있습니다. 반을 나눠 ‘대화’하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교제’는 곧 ‘대화’를 의미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제는 단순히 ‘대화’가 아니라 ‘대화’를 통해 서로의 삶을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저는 ‘교제’보다 더 우리에게 와닿는 단어가 요한이 본문에서 말한 ‘사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삶을 나누며 서로 사귑니다.
성경에서 “교제” 또는 “사귐”을 나타내는 단어 ‘코이노니아’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보면 우리가 누리는 사귐, 교제가 무엇인지에 관해 더 상세한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코이노니아’는 ‘사귐’(고후 6:14; 요일 1:3), ‘교통’(고후 13:13), ‘교제’(행 2:42; 고전 1:9; 빌 3:10), ‘참여’(고전 10:16; 고후 8:4), ‘연보’(롬 15:26; 고후 9:13; 히 13:16)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성도와 성도의 관계 속에서 서로 같은 믿음, 성령을 공유하고, 성례와 사역에 함께 참여하며, 서로 고난에 동참하고 물질을 나누며 섬기는 것이 바로 ‘코이노니아’입니다.
한 마디로 서로의 삶을 공유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교제, 사귐의 참 의미입니다. 사도 요한은 바로 이런 사귐을 여러 성도와 함께 나누기 원하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썼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준 ‘교제’의 참 의미를 생각하면, 과연 우리가 이런 교제를 나누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특히 오늘날 세상은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교회 안까지 그 폐해가 깊숙이 침투한 현실에 우리는 과연 성경이 말하는 ‘코이노니아’를 풍성히 누리며 살고 있을까요?
여러분, 지금 성도와 사귀고 있습니까? 내 삶 속에 성도를 초청하여 그 성도와 함께 삶을 나누고 공유하고 있습니까? 즐거워할 때 함께 즐거워하고 울 때 함께 울어줄 누군가가 있습니까(롬 12:15)? 고통을 나눠갖고 물질적으로 궁핍할 때 돕고 있는 성도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 ‘서로 사랑’은 단순히 사랑하는 감정을 품으라는 명령이 아닙니다(요 13:34). 평소에 아무런 교류도 관심도 없이 살다가 일주일에 한 번 만나서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라는 명령도 아닙니다.
말과 혀로만이 아닌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요일 3:18),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짐을 대신 지고(갈 6:2) 필요를 공급해주는 사랑(롬 12:13), 가끔 의무적으로 대화 나누며 안부를 묻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삶을 내 삶 속에 초대하여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랑, 그것이 예수님의 새 계명에 따라 우리가 누리는 교제의 참모습입니다.
중요한 질문: 당신은 교회 안에서 이런 사귐을 갖고 계십니까?
2. 우리의 교제는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1:1-3a)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교회 안에서 이런 사귐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하지요. 많은 사람이 있지만 고독과 외로움을 느낍니다. 나에게 참으로 친밀감을 줄 수 있는 공동체, 깊은 공감과 풍성한 나눔으로 삶을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를 찾아 떠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교제는 무엇을 근거로 이루어지는가? 우리의 사귐을 든든하게 묶는 끈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혈연관계가 교제의 근거로 작용합니다. 교회 안에 가족이 있어서 친밀함을 느끼고 그 안에서 교제의 만족을 찾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지연과 학연에서 사귐의 장을 만듭니다. 오랜 세월 많이 보고 자란 사람끼리 있어서 편안함을 느끼고 친밀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같은 취미나 관심사를 가진 사람끼리 교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반대로 어떤 사람은 가족도 없고, 교회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아는 사람도 적으며, 마땅히 취미나 관심사를 공유할만한 것도 없어 교제가 거의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혈연, 지연, 학연 등 나에게 교제권을 만들어 줄 근거를 찾아 사귐을 시도하고 과감히 교제권을 변경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도가 교제할 때 그 근거로 삼는 것이 무엇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성도와 교제를 시작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나누는 교제를 지속하고 더 견고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어서 앞서 말한 그리스도인의 참된 교제가 부족한 주요 원인이 우리의 교제를 묶고 있는 근거를 엉뚱한 곳에서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이 무엇을 근거로 독자와 사귐을 가지려 하는지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3절에 나오는 “우리”가 사귐을 가지려는 “너희”, 이 둘의 관계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와 ‘너희’가 혈연관계인지, 지연, 학연이 있는지, 혹은 공통의 관심사나 취미를 가졌는지 조금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우리’와 ‘너희’가 사귐이 있게 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사도 요한이 ‘보고 들은’ 바로 그것입니다. 요한은 1-2절에 그가 다른 목격자와 함께 ‘보고 들은 바’가 무엇인지 설명하는데, 바로 이것이 우리의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입니다.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절 이 생명이 나타나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게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어떤 분에게는 이 설명이 수수께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교회 오래 다니셨거나 말씀을 잘 알고 계신 분들은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읽자마자 요한이 누구를 가리켜 말하는지 바로 아실 것입니다.
힌트로 요한은 복음서의 시작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시작했습니다(요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신 말씀, 누구를 가리킵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 1:14).
요한은 ‘우리’가 들었고 보았고 자세히 살펴보았으며 손으로 만졌다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그들에게 자기에 관한 정보만 기록하여 전달하지 않으셨습니다. 환상으로 보이시거나 영으로 나타나신 것도 아닙니다. 그들 안에 뜨거운 감동만 일으키신 것도 아닙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2절). 그분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실제로 그들 가운데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요 1:14). 그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삶을 나누셨습니다. 그들과 사귐을 가지셨습니다. 그들과 ‘코이노니아’ 즉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그런데 잠깐, 여러분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죄 없으신 하나님이 죄 많은 사람과 교제할 수 있습니까? 빛과 어둠이 어떻게 사귈 수 있습니까? 그런 질문은 참으로 합당한 질문입니다. 성경은 죄인에게 영적으로 ‘사망’ 선고를 내리기 때문입니다.(롬 6:23). ‘사망’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영원히 관계가 단절된 상태, 다시 말해 교제할 수 없는 상태, 사귈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여러분, 여기서 요한이 예수님을 계속해서 뭐라고 부르는지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1절에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2절에 “이 생명”, 또 바로 이어서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요한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생명”, “영생”이라 부릅니다.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이 편지의 독자에게 확증하고 있는 예수님이 “생명”,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죄인, 사망 선고받은 죄인에게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죄인의 관계를 영원히 회복하시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지만 하나님의 은사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롬 6:23).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예수님이 죄인의 생명이 되셨습니다. 영원히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던 자들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귐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영원히 교제할 수 있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요 1:12).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에게 자기를 알게 하셨고 또 자기를 보내신 자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과 사귐이 있게 하셨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사귐이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을 “생명” 그리고 “영생”이라고 말한 것입니다(요일 5:20).
자, 그러면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교제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요한은 말합니다. 3절에,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요한이 보고 들은 것은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과 요한을 통해 예수님을 받아들인 성도 간의 교제의 근거가 되십니다. 성도의 교제를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혈연이 아닙니다. 지연이나 학연도 아닙니다. 같은 취미나 관심사가 아닙니다. 직종이 같거나 연령대가 비슷하거나 성격이 잘 맞기 때문도 아닙니다. 성도의 교제가 가능한 이유, 그것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 더 견고해지고 풍성해지는 이유,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 때문입니다.
여러분, 초대교회 앙숙이었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어떻게 하나가 되었습니까? 주인과 종이 어떻게 한 교회를 이룰 수 있었습니까?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하나’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까? 그들의 교제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습니까? 그 특별한 사귐이 무엇에 근거한 것입니까?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한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한 분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한 하나님을 함께 아버지로 섬겼고, 함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엡 3:6).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한 믿음과 한 세례를 공유했습니다(엡 4:4-6).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 있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 그리스도인은 서로 충분히 교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혈연관계가 다른 어떤 관계보다 더 끈끈한 관계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어떤 책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확실히 피는 물보다 진하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보다 진한 것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영원한 사귐을 가져오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사이에 영원한 사귐을 가져오기에도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도와의 교제, 그 사귐 속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근거를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다른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거나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성도의 교제를 가로막는 방해물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잘 몰라서 어색하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성격이 안 맞는다는 이유로, 성향이나 관심사,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무너진 장벽, 곧 성도의 사귐을 가로막는 장벽을 다시 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서로 사귈 수 있습니다. 교제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면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3. 우리는 누구와 더불어 사귐을 갖는가?(1:3b-4)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특별한 교제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오직 그리스도 그분으로 인해 시작되고 영원히 지속되는 사귐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공동체에서 발견된 참된 교제는 종파와 인종, 사회 계급과 성별 등 다양한 갈등의 장벽을 뛰어넘어 놀라운 사랑의 관계를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믿는 자들이 다 함께 있고(삶을 공유하고) 서로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재산과 소유를 팔고 모든 물건을 함께 사용하는 등 오늘날 공산주의에서 무력으로 강제로 만들어야만 일어날 법한 일들을 자발적으로 행했습니다(행 2:43-47). 어쩌다가 한 번 만나 이벤트성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한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그렇게 교제했습니다.
그들의 입술에서는 찬송이 흘러나오고, 백성들에게 칭찬을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을 더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역사의 기록 앞에 우리는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갖는 기쁨과 능력의 근원을 찾게 됩니다. 그들의 교제에 어떻게 그렇게 큰 기쁨과 능력이 있었는가? 바로 하나님께서 성도의 교제 가운데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더불어 사귐을 갖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절과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기쁨이 충만한 교제입니다. 우리의 사귐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교제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사귐.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사귐, 교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요 13:34).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여러분, 물론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마 28:20).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십니다(시 139).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성도의 사귐, 성도의 교제 가운데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불어 함께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진실로 사랑할 때, 참된 사귐을 누릴 때, 성부와 성자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여러분에게 큰 기쁨이 되지 않으십니까? 우리의 사귐 속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이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더 삶을 나누고, 함께 섬기고, 교제하기 원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까?
저는 가끔 반성할 때가 있습니다. 청년회나 정기 집회에 모이기 힘쓰라는 말을 할 때, 자주 빠지는 성도에게 ‘꼭 참석하여 함께 교제합시다’라고 권면할 때, ‘혹시 내가 회원 모집하는 사람처럼, 출석 체크하는 선생님처럼, 참석률이 저조한 사람을 꾸짖거나 좋게 말하면 격려하기 위해 점검하는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권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스스로 반성이 됩니다. 저의 태도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교제를 하나의 일이나 모임으로 생각하는 태도를 고쳐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성도의 교제는 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더불어 사귐을 갖는 시간입니다. 우리를 위해 친히 자기 목숨을 버리신 주님과 그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아버지께서 우리의 교제 중에 함께 하십니다. 어떻게 우리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동참하는 이 놀라운 특권과 은혜를 얻게 된 것일까요? 그 자리에 항상 함께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형제자매를 만나는 그곳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귐을 갖습니다. 형제를 돌보고 섬기는 그 일 가운데 예수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합니다. 자매를 만나고 교제하고 위로하는 손길 중에 하나님의 역사를 맛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경험할 수 있는 은혜의 방편, 우리가 더불어 누리는 사귐인 교제를 여러분 풍성히 누리고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 다른 성도를 초대하여 함께 삶을 공유하고 더불어 사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슬픔과 기쁨에 동참하고, 돕고 섬기는 일에 기쁨으로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성도가 함께 모여 교제할 때 그 자리에 꼭 함께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우리 교회가 풍성한 교제가 넘치는 교회,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맛보고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시는 것을 보며 그분께 찬양으로 높여 드리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