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우리를 요동하게 하는 온갖 교훈: 6. 교훈 받은 대로 굳게 서라
본문: 골로새서 2장 6-8절
설교자: 조정의
교회가 함께 세워져 가기 위해서, 반드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성도가 하나가 되어야 할 일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엡 4:13). 이 일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바른 지식을 얻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바른 지식은 반드시 삶에 적용하는 교훈이 되어 성도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지식에 따라 성장하는 것이다.
성도가 다 하나가 되어 힘써야 할 이 일을 방해하고 역행하는 것이 있다. 바로,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 온갖 교훈의 풍조”다(엡 4:14). 이 지식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왔다(하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속인다). 성도를 거룩하게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묘히 속여 죄에 빠지도록 유혹한다. 이 거짓 교훈은 유사품이 너무 많아 셀 수 없으며,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흐름이 되어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다.
<우리를 요동하게 하는 온갖 교훈> 시리즈를 통하여 거짓 교훈의 몇 가지 사례를 살펴봤다: 말씀신앙운동, 벧엘힐송교회, 은사주의운동, 자유주의 신학, 신비주의 사상. 오늘은 시리즈 결론으로 왜 우리가 바른 교훈을 추구해야 하는지 그 ① 이유를 살펴보고,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그 ② 방법과, 온갖 거짓 교훈에 관하여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③ 그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골로새서 2장 6-8절 말씀으로 차례대로 다루기 원한다.
1. 이유: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6절)
기독교는 생각, 사상, 이념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이는 기독교 밖의 사상은 주의할 필요가 있지만, 기독교 내부에선 각자 다른 견해와 분별을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 방언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벅찬 기쁨과 감격을 누리는 아내가 방언은 이제 그쳤다고 믿는 남편과 갈등을 겪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부르짖고 열심을 다해 기도하는 것을 왜 뭐라고 하나요? 당신은 나만큼 열심히 기도하지 않잖아요.”
왜 우리는 개인의 생각을 제한해야 하는가? 사상을 검증하고 이념을 판단해야 하는가? 교회와 성도가 믿고 실천하는 것들을 자유롭게 허용하지 않고, 분별하고 바로잡으려 하는가? 여기 그 궁극적인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 2:6).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큐리오스, 주인으로) 받아들인 자들의 모임이다.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에서 구원하신 구원자로만 영접한 것이 아니라 그 피로 우리를 사서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신 구원주로 영접했다(롬 10:9,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예수님이 우리 주인이 되셨다는 것의 의미는, 평상시에는 우리의 뜻과 계획대로 살다가 주인이 뭔가 요구하면 그때만 주인의 뜻대로 행동하는 수준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예수님이 우리 주인이 되셨다는 말의 수준을 아주 정확하게 설명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삶의 주체는 여전히 나이지만, 삶의 목적이 완전히 바뀌었다. 내가 사는 것이지만, 이제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 그분을 힘입어 살고 또 그분을 위하여 존재한다(골 1:16). 내 생각, 내 감정, 내 의지, 내 행동이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 감정, 의지, 뜻에 철저하게 굴복해야 한다.
바울은 그래서 신자의 삶을 ‘싸움’(전쟁)이라고 표현했다(고후 10:4):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는 싸움이다(고후 10:5). 왜 우리는 교회의 분별이나 성도의 생각을 바로잡으려 하는가? 교회의 실천이나 성도의 삶을 책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같은 주로 모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분명하신 뜻을 알려주며, 우리는 그래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바른 교훈을 분별하고 그 뜻대로 우리의 생각과 삶(교회의 분별과 실천)을 빚어가야 한다.
2. 방법: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7절)
그러면 어떻게 바른 교훈 안에서 행할 수 있을까? 교묘한 말, 헛된 속임수를 걸러낼 수 있을까? 그 방법을 살펴보자. 먼저, 6절의 시작이 “그러므로”인 것은 실제로 골로새 교회에 이러한 교묘한 말로 속이는 사람의 위협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다(골 2:4,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구체적으로는 “할례”(3:11), “먹고 마시는 것”, “절기, 초하루, 안식일”(3:16), “꾸며낸 겸손”, “천사 숭배”(3:18), 등에 관한 잘못된 해석과 적용이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바울은 그런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오직 주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서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으라고 권면했다(6-7절). 이 표현은 각각 식물과 건축의 비유에서 왔다. 하나는 밑으로 자라 견고하게 하고, 다른 하나는 위로 견고하게 쌓아 올린다. 이 비유가 가리키는 실상은 바로 뒤에 따라오는 표현인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둔 믿음을 더욱 굳게 갖는 것, 더 강하고 신실한 믿음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뿌리내리다’와 ‘세우다’, ‘굳게 서다’ 모두 신적 수동태 동사(divine passive)가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신앙을 예수님 안에서 깊이 뿌리내리게 하시고, 예수님을 터로 삼아 건강하게 자라게 하시며, 예수님께 둔 우리 믿음을 견고하게 만드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에 굳게 서게 하시는데, “교훈을 받은 대로” 그 일을 하신다. 그러니까 ‘어떤 교훈을 받느냐’가 무척 중요한 일이다. 아무리 굳건한 믿음도 잘못된 교훈에 두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바른 교훈을 받는 것’이다. 바울은 때가 되면 사람들이 진리에서 귀를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고 바른 교훈을 받지 않으며 자기 사욕을 따를 스승, 가려운 귀를 긁어줄 교사를 많이 둘 것이라고 경고했다(딤후 4:3-4). 자기 생각에 동의가 되고 자기 감성을 잘 이해해 주는 설교자를 찾고, 유튜브 채널을 구독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바울은 “때를 얻은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하라”고 엄히 명령했다(딤후 4:1-2). 모든 사람이 ‘말씀을 전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듣고 영향받는 모든 교훈이 정말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것인지를 계속해서 검증해야 한다.
오직 말씀만이—말씀에 기록된 의미 그대로 선포될 때—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을 선명하게 교회에게 전달하며, 바로 그 안에서 교회는 뿌리를 내리고, 그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교회가 그렇게 판단하고 가르칠 수도 있지’, ‘그 성도에게 유익이 된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는 거 아닐까?’라는 접근을 삼가고, 베뢰아 성도들처럼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면서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하고 검증해야 한다. 예컨대 ‘방언으로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뭐가 문제야’라고 할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무엇인가?’’ ‘이것이 성경대로 하는 것인가?’를 진지하게 살펴야 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감사함을 넘치게 하”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자주 냉정하고 부정적인 성향을 발견한다(이단감별사). 냉철하게 객관적인 진리를 분별하고 담대하게 거짓 교훈을 물리치는 일 자체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 속에서 전혀 감사가 발견되지 않는 것이 문제다. 바른 교훈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또 감사하게 만든다. 우리가 남들보다 뛰어나거나 사랑받을만해서 진리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은혜다. 그래서 감사가 넘친다. 이것은 사람의 속임수와 허탄한 이야기에 빠진 자들을 향한 동정심과 사랑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들은 우리보다 못하거나 사랑받을 가치가 없어서 속은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바른 교훈을 알려주신 것은 사실 형제자매를 거짓으로부터 보호하고 건져내기 위함이다: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약 5:20).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라(엡 4:15). 진리를 추구할 때, 항상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소책자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충분한 것을 소유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의 축복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나가 공유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대해야 한다. 이 축복이 그리스도로부터 우리에게 흘러나온다. 그분은 마치 우리가 자기 자신인 것처럼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셨다. 따라서 이 축복은 우리를 통해 다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로 흘러나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셨던 것처럼, 심지어는 우리의 믿음과 의까지도 이웃을 위해 하나님 앞에 내놓아 그들의 죄를 가려주고, 그것을 기꺼이 짊어져 마치 그것이 우리의 죄인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이것이 참된 사랑의 본질이요, 참된 믿음이다.”(개혁된실천사, 2024, 94p).
3. 목적: “그리스도를 따름”(8절)
마지막으로 우리가 바른 교훈을 따르려는 그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바울은 8절에서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라고 명령했다. ‘주의하라’는 본문에서 발견되는 유일한 명령어다. ‘보다’의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고 문맥 안에서는 ‘자세히 경계하며 살펴보는 것’을 가리킨다. 누구인지는 상관없다. 누구든지 우리를 ‘사로잡을’ 수 있다. 더 정확한 의미로 우리를 끌고 어디론가 데리고 갈 수 있다. 물리적으로 끌고 간다는 말이 아니다. 영적으로 인도한다는 말이다.
그들은 뿌리가 되는 철학(가장 근본이 되는 사상 체계)부터 거기서 흘러나온 여러 가지 속임수로 우리를 어디론가 끌고 간다(헛된: 의미와 가치 상실). 바울은 8절 끝에 그들의 교훈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이라고 말했다. 전통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전통(출처)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초등학문이라고 다 나쁜 게 아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께 우리를 인도하는 ‘초등교사’라고 불렸다(갈 3:24). 문제는 그 출처가 세상이라는 데 있다. 사람과 세상이 만든 교훈을 따르면 우리는 결국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게 된다(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우리가 여러 가지 교훈을 주의하여 살펴보면서 말씀으로 분별하고 검증하고, 그 결과에 따라 수용하거나 배척하려는 목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종하지 않고 여전히 기독교에 머무를 수 있다. 교회의 직분을 버리지 않고 계속 같은 직분을 가지고 같은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매주 공예배 참석하고 가까운 성도와 교제 나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사람과 세상이 만들어낸 교훈을 따를 수 있다. 그것이 정말 무서운 현실이다.
거짓은 그렇게 조금씩조금씩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결국엔 그리스도 밖으로 내쳐지게 된다. 구원의 상실은 아니지만, 구원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지 못하고,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 누구도 복음을 이렇게 경험해서는 안 된다. 복음의 능력을 맛본 사람은 그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처럼, 넉넉히 이기는 자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그 목적을 위하여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고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
우리는 누군가를 또 무언가를 따르고 있다. 우리는 또한 누군가에 의해 또 무언가에 의해 이끌림을 받는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지 잘 살펴보라.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맞는지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만이, 그분을 따르는 것만이 결국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