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유

본문 : 시편 59편

설교자 : 최종혁

 

살면서 아무 것도, 누구도 의지하지 않으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독립적인 사람이라도 아무런 도움 없이 살 수 없다. 우리가 그런 존재들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본래 그런 존재다. 이상한게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의지할 것을 찾는다. 사람들마다 자신이 의지할만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그런 사람들을 찾아 의지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무언가를 의지한다는 것은 다르게 표현하자면 그것에 내 몸을 맡기는 것이다. 지팡이를 의지해서 걷는데 지팡이가 갑자기 부러지면 넘어지는 것은 지팡이에 내 몸을 맡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돈이나 권력을 의지해서 살아가던 사람이 어떤 일로 인해서 그것들을 잃게 되면 크게 좌절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것에 자신의 삶을 맡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그것을 의지하고 있었느냐에 따라, 상실로 인한 충격은 달라진다. 잠깐 휘청하고 마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는 그것을 다른 것으로 쉽게 대체할 수 있다. 때로는 크게 넘어질 때가 있다. 대체할 것이 없다고 느낄 때 헤어나올 수 없는 슬픔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슬픔과 절망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클 때,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의지할 것이 필요하고, 그것이 절실히 필요할 때가 있는 것이다.

시편 59편에서 다윗이 그런 상황에 있다. 정말로 의지할 것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다윗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먼저, 다윗이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부터 살펴보자.

상황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표제)

삼상 19장 – 이 때는 사울이 본격적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마음을 먹은 시점이다. 신하들에게도 다윗을 죽이라고 말했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다윗에게 단창을 던져 그를 직접 죽이려고도 했다. 그 밤에 다윗은 도피하고 사울은 사람들을 보내 다윗의 집을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였다. 이를 알아챈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을 창에 내려 도망치게 한 사건이 이 시편의 기본적인 배경이 된다. 6절과 14절에 밤에 으르렁 거리며 돌아다니는 개에 대한 비유가 나오는데, 야밤에 도피하여 쫓기던 당시 상황에 대한 다윗의 느낌을 엿볼 수 있는 표현이다. 다윗은 위협을 느끼고 있었고 그 위협은 작고 귀여운 강아지의 위협이 아니라 야생 들개 무리의 위협과 같았다.

다윗은 이렇게 자신의 생명을 찾는 자들에 대해서 다양한 표현을 사용했다. – “원수”(1절, 적대적인 자들), “일어나 치려는 자”(1절, 계획적으로 공격하는 자들, 3절 “엎드려 기다리고”, 4절 “스스로 준비하오니”), “악을 행하는 자”(2절, 어쩌다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악을 행하는 자들),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2절, 문자적으로 피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치려고 해도(3절) 큰 위협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3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들이 “강한 자”라면 얘기가 다르다. 힘이 있는 사람들이 나를 적대하고 계획적으로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공격한다면 그 위협은 간과할 수 없다. 더구나 그들이 평소에도 악행과 피흘리기를 즐긴다면 더욱 그렇다. 정말로 위험하다. 다윗의 경우 왕이 자신의 생명을 찾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로 인한 두려움은 더 컸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위험에 놓이게 된 이유에 자신의 잘못은 없다(3-4절). 다윗은 세 차례나 이 사실을 강조한다. 그냥 단순히 자기 변호를 위해 “난 잘못한거 없는데, 쟤들이 문제예요”라고 쉽게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고 이런 위험에 처할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을 수 없었다. 그런게 있다면 이 상황을 이해할 수도 있고 혹은 그 잘못을 인정하는 것으로 뭔가 상황이 변할 것을 기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다윗은 무고했고 억울했다. 누가 봐도 그럴만한 상황이었다.

살면서 다윗처럼 정말 이런 극단적인 상황을 경험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의 이런 경험이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상황은 아니다. 이 시편도 자세히 보면 다윗의 경험을 기본적인 배경으로 가지고 있지만, 그 상황 만을 염두에 두고 씌여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5절에도 “모든 나라들을 벌하소서”,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마소서”와 같이 일반적인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8절에도 “모든 나라들을 조롱하시리이다”라는 표현이 있다. 즉, 이 시편에서 말하고 있는 상황은 부당하게 해를 당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은 나보다 강한 자들이어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 정말로 의지할 것이 절실히 필요한 그런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더욱 의지할 것을 찾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에서 내 몸과 맘을 맡길 것을 찾는 것이다. 그의 생명을 찾는 자들에게서 도망하며 다윗이 찾은 의지할 것, 피난처, 요새는 바로 하나님이셨다.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드리는 이 기도 속에서 우리는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보였던 몇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모습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1. 하나님께 간구함
  2. 하나님을 주목함
  3. 하나님께 찬송함

I. 하나님께 간구함(1-7절)

1, 2절에서 다윗은 자신의 대적들에 대해서 다양한 표현들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매우 긴급한 도움을 요청한다. – “나를 건지시고”, “나를 높이 드소서”, “나를 건지시고”, “나를 구원하소서”

나에게 악의를 가지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위험에서 나를 빼내달라는 것이고, 나를 치려고 일어나는 자들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두셔서 안전하게 보호하여 달라는 것이고, 내 피를 흘리려는 자들에게서 구원해달라고 구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일에 있어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그의 대적들은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4절)하고 있다. 그만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다윗을 죽이려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도우심을 구한다.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어 살펴 주소서”(4절)

“도우시기 위하여”는 약간 의역한 것인데, 문자적으로는 “만나다”다. 그래서 바른 성경은 “일어나 내게 가까이 오셔서 나를 살피소서”라고 번역했다. 주무시는 것처럼, 멀리 계신 것처럼, 방관자처럼 계시지 말고 지금 일어나셔서 내가 있는 곳으로 오셔서 내가 처한 위험을 봐달라는 말이다. 마치 긴급 전화를 한 사람이 “빨리 좀 와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했다.

5절에서도 동일하게 다윗은 하나님께서 “일어나” 주시기를 구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의 구원보다 대적들에 대한 심판을 더 강조한다. – “일어나 모든 나라들을 벌하소서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마소서”(5절)

“벌하소서”도 마찬가지로 약간 의역한 것이고, 문자적으로는 “방문하다”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가까이 오셔서 상황을 살펴주시기를 구했던 앞선 기도에 이어 이번에는 모든 악을 행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방문하셔서 그들에게 합당한 심판을 내리시기를 구한다. 다윗이 구하는 심판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는 것이다. 마치 요나가 니느웨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는 것을 싫어했던 것처럼 다윗도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여기서 다윗이 말하는 은혜는 이들을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악한 자들은 악은 다윗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한 다윗의 비유를 보면 조금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6]그들이 저물어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고 [7] 그들의 입으로는 악을 토하며 그들의 입술에는 칼이 있어 이르기를 누가 들으리요 하나이다”(6-7절)

“[14] 그들에게 저물어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게 하소서 [15] 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14-15절)

여기서 말하는 개들은 가축이 아니라 야생의 개들로 밤마다 성에 나타나서 길거리를 배회하면서 으르렁대며 먹을 것을 찾아다닌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삼킬 자들을 찾는다. 그들에게는 만족이 없고 계속해서 악을 자행한다. 그들의 입은 악한 말을 쏟아내는데 마치 칼과 같다. 개들이 이빨로 먹잇감을 물어 뜯는 것처럼 악한 자들은 그들의 말을 날카로운 칼처럼 사용하여 상처를 입히고, 고통을 주고 결국에는 그 사람을 파멸시킨다.

12절에서는 이들의 말에 대해서 이런 말을 덧붙인다.

“그들의 입술의 말은 곧 그들의 입의 죄라 그들이 말하는 저주와 거짓말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12절)

그들이 하는 말이 다 죄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그들은 저주와 거짓을 쏟아낸다. 자신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해하기 위해 그렇게 한다. 이것은 그들 마음 속에 있는 교만함의 결과다. 7절 끝에 보면 그들은 이렇게 하면서 “누가 들으리요”라고 말하고 있다. 정말로 누가 들으면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닐 것이다. 누가 들어도 상관이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들은 교만하여 자신들의 힘을 믿고 자신들이 원하는 악을 행한다. 다윗은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가 아닌 그에 합당한 심판을 내려주시기를 간구했다.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5절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

“주님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오니”(5절)

첫째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힘이 있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다. 모든 군대를 다스리시는, 모든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두번째는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1절에서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더 가까이 부르기도 했다. 하나님은 나와 관계 없는 분이 아니시다. 여호와라는 언약의 이름이 3절과 여기서 등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내가 하나님의 편에 있을 때,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셔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이시다.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유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강하신 하나님이 다윗의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II. 하나님을 주목함(8-13절)

다윗의 기도는 뒤로 갈수록 확신으로 변한다. 악한 자들은 악을 행하면서 “누가 듣겠냐”고 비아냥거리지만, 다윗은 하나님께 ‘일어나 이 상황을 살펴달라’고 구했다. 그리고 8절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보고 계심을 말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며 모든 나라들을 조롱하시리이다”(8절)

강한 자들이 지금의 현실 속에서 약한 자들을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면서 아무도 자신들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때, 더 강하신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바라보시며 그들을 비웃으시고 그들을 우습게 보신다. 그들이 의지하는 것들을 무너뜨리고 그들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기도 가운데 이를 생각하게 된 다윗의 기도는 이제 확신으로 변해 있다.

“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10절)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그리고 대적들에게 와주실 것을 기도했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에 대해서 확신한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를 하나님은 그 인자하심으로 만나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 대적들의 모습을 보게 하여 주실 것이다. 이제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실 것에 대한 의심이 없다. 그래서 오히려 그가 보고 싶은 하나님의 심판의 모습을 말한다.

“[11] 그들을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우리 방패 되신 주여 주의 능력으로 그들을 흩으시고 낮추소서 [12] 그들의 입술의 말은 곧 그들의 입의 죄라 그들이 말하는 저주와 거짓말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 [13] 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없어지기까지 소멸하사 하나님이 야곱 중에서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하소서”(11-13절)

심판에 대해서 우리가 자주 볼 수 있는 익숙한 표현이지만, 여기서는 특별한 것이 있다. 바로 11절 처음에 구하는 “그들을 죽이지 마옵소서”이다. 결국에는 13절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애매하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그들을 지금 즉시 제거하지는 말아 달라고 구한다. 이유는 백성들이 잊어버릴까봐다. 백성들이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은 13절 끝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야곱 중에서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하소서”

하나님의 주권적 다스리심을 하나님의 백성이 알고, 온 세상이 알도록 하여달라는 말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이 세상의 악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기를 원했고 그들을 통해 또한 온 세상이 배우기를 원했다. 악은 영원하지 않다. 악인들이 강한 것 같지만 사실 더 강하신 하나님이 계시다. 그 하나님께서 결국 악을 끝낼 때가 있다. 그들의 교만한 말과 행동에 하나님께서 보응하실 때가 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하나님을 만날 자들은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은혜를 베푼 자들 뿐이다. 이것이 세상의 악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배워야할 확실한 교훈이다.

그래서 9절에서 다윗은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라고 다짐한다. 여기서 바란다는 것은 바라 본다는 의미다. 약한 자신이나, 강한 대적들이 아니라, 더욱 강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겠다는 말이다.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했던 두번째 모습이다. 그럼 이렇게 다윗이 하나님에 대한 확신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9절을 전부 읽어 보면 이렇다.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9절)

하나님은 요새시다. 힘이시다. 강한 자를 비웃을 수 있으시고 그들을 우습게 만들 수도 있는 분이시다. 진노하심으로 악한 자를 소멸하시는 분이시다. 모든 것을 다스리는 분이시다. 그리고 다윗의 요새이다. 다윗의 하나님이시다(10절).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유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강하신 하나님이 다윗의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III. 하나님께 찬송함(14-17절)

14절에서 다윗은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6-7절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현실이다. 하지만 하나님께 간구하고 하나님을 주목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완전히 동일한 현실은 아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노래하고 높이 부르고 찬송하겠다고 다짐한다.

“[16]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17]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16-17절)

여전히 환난 날이다. 여전히 그의 생명을 찾는 자들은 기세가 등등하다. 하지만 이 상황에 대한 다윗의 반응은 이제는 노래다. 현실에서 겨우 눈을 들어 하나님께 간구했고,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자 확신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확신으로 지금의 현실을 보니, 처음과는 다른 현실이 보이는 것이다. 나는 약한 자였고, 악한 자들은 강한 자들이었다. 강한 자들이 나를 미워하고 나를 공격하여 내 피를 흘리고 내 생명을 취하려 했다. 두렵고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사실 그 상황은 지금도 같다.

여전히 나는 약한 자이지만 강한 자들보다 더 강하신, 가장 강하신 하나님을 의지한다. 그 하나님께 피한다. 그분이 나의 요새시고, 그분이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다. 나에게 헤세드를 보여주시는 강하신 하나님이 계시니,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하나님을 노래한다. 다윗이 찬송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유는 강하신 하나님이 다윗의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도전

과거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했던 이유가 바로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유와 동일하다. 강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살면서 무엇 하나만 의지하면서 살아야 한다면 가장 강한 것을 의지해야하지 않겠는가? 그 강함이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을 의지해야하지 않겠는가? 그 강함을 악의가 아닌 선의로 사용하는 것을 의지해야하지 않겠는가? 세상에 무엇이 그러한가? 내가 지금 의지하는 그것들이 정말 그러한가 생각해 보라. 하나님 외에 그런 것은 없다.

하나님께 모든 능력이 있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신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 그리고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께 간구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께 기대야 한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서, 하나님이 무너지면 나도 무너지는 것이 정상이다. 하나님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의 의미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하심을 경험할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을 더 알게 될 것이고 그 하나님을 선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