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용서, 하나님 닮은 사랑과 공의
본문: 누가복음 17장 3-4절 외
설교자: 최종혁
지난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용서에 대한 명령을 살펴봤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용서할 것을 명하셨고, 복수가 지배하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으로 그 차이를 드러내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선포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우리가 믿고 구원 받은 복음의 핵심이 바로 용서다. 하나님은 감히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희생으로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시고 우리를 용서하셨다. 그런 우리는 용서받은 자들로서 용서하는 자가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용서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용서해야한다는 의무도 있지만 동시에 용서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는 것이 맞다.
그럼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해야할 그 용서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용서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 용서하지 않고서 용서했다고 착각하기도 하고, 혹은 용서를 필요 이상으로 어렵게 생각하고 그렇게 느껴서 용서하지 않으려고 하기도 한다. 용서를 내 마음대로 정의하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용서는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 <밀양>(2007)에서 주인공 여자는 아들이 납치 살해를 당한 후로 극심한 고통을 겪다가 교회에 나가게 되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된다. 스스로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었다고 말하고 행복하다고도 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마음의 짐이 있었고 최후의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살인범에 대한 용서였다. 그래서 그녀는 감옥으로 살인범을 찾아가 용서의 말을 전하기로 결심한다.
교회의 목사와 교인들은 그런 주인공을 응원해주기도 하지만 걱정 어린 마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이것이 옳은 선택이라는 마음으로 결국 범인을 만난다. 확신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유일한 희망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범인의 모습이 기대했던 것과 달랐다. 범인은 너무나 평온한 얼굴이었고 그의 입에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이 나왔다. 자기 같은 죄인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용서해 주셔서 지금은 너무나 마음이 평안하다는 것이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주인공은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특히 피해자인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가해자를 용서했다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무너졌다.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지자, 희망을 주었던 존재는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복수를 시작한다. 물건을 훔치고, 교회 집회를 방해하면서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를 튼다. 더 나아가서는 자기를 교회로 인도했던 사람의 남편을 유혹해서 죄를 저지르게 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잘 보고 있냐”고 말한다. 이 때 말고도 주인공은 종종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하나님에 대한 원망의 표현이다.
감독은 이 영화가 특정 종교, 즉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영화에서는 그 누구도 성경이 말하는 용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영화의 내용만 보면 용서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으니 피해자인 당신과 나는 이제 아무 상관 없다고 말하는 가해자가 생각하는 용서가 잘못되었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이 생각했던 용서가 올바른 것도 아니었다. 주인공이 생각한 용서는 오로지 자신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하나님을 만나서 마음의 평안을 얻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어떤 식으로든 평안한 가운데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아마 가해자가 괴로워하며 평생 그 은혜를 갚으며 살겠다고 했어야 그나마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용서에 대해서 각자 다른 생각,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무작정 덮어주는 것을 용서라고 생각한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다들 그러면서 사는거지 뭐”라고 말하는 것을 용서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잊는 것이 용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이미 다 잊었어. 그러니까 너도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용서하는 즉시 모든 것이 정상으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믿고 그것이 참된 용서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간통을 저지른 배우자를 용서했다면 그 후로는 전적으로 그 사람을 신뢰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용서할 수 없고 용서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쉽게 용서하면 결국 죄를 방관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가해자가 충분히 괴로워하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벌)을 지고 난 후에야 용서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정반대로 상대방이 어떻게 하느냐에 관계없이 무조건 용서를 해야 그것만이 참된 용서라고 주장한다.
지금 예로 말한 용서에 대한 생각들은 용서에 대한 성경의 진리 중 일부에 해당되는 부분적인 진리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들을 다 합하면 성경이 말하는 용서에 대한 진리의 전부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진리의 일부에 위 내용들이 부합할 따름이다. 부분적인 진리는 사실 진리의 부분이 아니라 거짓이다. 우리는 온전한 진리를 알아야 하고 성경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용서해야한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 “용서했다”는 말도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용서해야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렇게 하기위해 노력해야하지만, 우리가 해야할 용서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용서를 해야할까?
엡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 3: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말씀은 용서에 대하여 우리에게 최소한 두 가지를 말해주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받은 그 용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그래야 내가 해야할 용서가 당연한 것임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지난 시간에 중점을 두고 살펴봤던 내용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가 용서할 때 ‘하나님처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그 모습이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는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해야할 용서는 하나님을 닮은 용서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과 우리의 상황이 100% 같을 수 없기에 똑같은 용서를 할 수는 없다. 예수님의 비유를 다시 가져오자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주셨지만 우리가 할 것은 백 데나리온을 탕감하는 일이다. 때로는 한 데니리온을 때로는 천 데나리온을 탕감해야할 것이다. 어떤 용서를 하더라도 그 모습은 하나님을 닮아 있어야 한다. 사실 무엇을 하든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야 하는데, 용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한다. 지난 시간에도 살펴봤던 것처럼 용서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할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다.
먼저, 하나님의 용서의 전제에는 우리의 죄가 있다. 일상에서 우리는 서로 잘못을 해서 용서를 주고 받아야 하는 경우들이 많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는 그렇지 않다. 잘못은 오직 우리 쪽에만 있다. 가끔씩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말하거나 혹은 시간이 지나서 “이제는 하나님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심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을 용서해야하는 경우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잘못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잘못은 우리가 한다. 우리는 그것을 ‘실수’라고 말하고 싶어하기도 하고 ‘연약함’이라고 포장하고 싶어하기도 하지만, 성경은 예외 없이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 대한 ‘죄’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죄와 관련된 하나님의 첫번째 속성은 바로 ‘거룩’이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며 죄를 미워하신다. 죄에 대해서 중립적인 위치가 아니라 극단적인 위치에 계신다. 죄의 크기에 따라, 종류에 따라, 벌어진 상황에 따라, 어떻게 반응할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어떤 죄든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으신다. 우리 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럼 하나님 혼자 죄를 피하면 되시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또한 공의로운 분이시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하나님의 공의는 선을 보상하시는 것으로도 드러나지만 악을 벌하시는 것과 더 자주 함께 언급된다.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고 묵인하지 않으신다. 거룩하고 공의로운 재판관으로서 죄를 심판하셔야 한다. 이것은 종종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표현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신의 진노(노여움)’과는 다르다. 하나님은 죄에 감정적으로 반응하여 노를 폭발시키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진노는 화풀이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를 심판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한다. 재판관이신 하나님은 공의로 판단하시고 그에 따라 형벌을 내리시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일차적인 반응, 당연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셔서 우리의 죄를 그냥 없었던 일로 하지는 않으신다. 묵인하지 않으신다.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하지 않으신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께 용서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심판이 당연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그냥 무시될 수는 없다.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하나님을 “용서하시는 분”으로도 말한다.
느 9:17 … 그러나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시 86:5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시 130: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용서하기를 즐거워하신다. 이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억지로 어쩔 수 없어서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공의로운 분으로서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그것이 하나님께는 당연하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셔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죄인을 심판하시면서 기뻐서 축제를 벌이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다.
겔 18: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겔 33: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베드로도 심판의 날이 우리가 보기에 더디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했다(벧후 3:9).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다.
사 55: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하나님은 억지로 용서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오히려 용서하지 못해서 안달이신 것처럼 보일 정도다. 왜 그렇게 하실까? 그 바탕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셔서 곤란한 상황 가운데 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신다. 하나님은 사랑이셔서 그들에게 은혜 베풀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사랑이셔서 그들, 즉 죄 가운데 있던 우리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신다.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그렇게 할 때 너그럽게 용서하시는 것이다.
그럼, 그렇게 심판하기를 원하지 않고 용서하기를 원하시면 그냥 용서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때로는 그렇게도 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어떤 잘못을 한 사람에게 “괜찮아요.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죠. 그냥 없었던 일로 생각할게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참 멋있게(그리스도인답게) 용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렇게 ‘그냥’ 용서하시면 되는 것 아닌가 싶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앞서 말한 하나님의 공의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속성들은 때에 따라서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이 아니다. 즉, 하나님이 언제는 공의로왔다가 언제는 사랑이었다가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속성들은 언제나 조화를 이루어 함께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언제나 함께 만족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우리의 죄라는 지점에서 충돌을 일으킬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를 무조건 덮어주어야할 것 같고,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의 죄를 무조건 드러내야할 것 같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의 모든 결과를 무효화 한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죄의 모든 결과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루어야 할 것 같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 할까?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완벽한 모습으로 하모니를 이루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충돌하지 않았다. 그 무엇도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19세기 스코틀랜드의 복음 전도자인 보나르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율법이 하나로 합쳐진 때보다 더 “사랑이 사랑다운 적도 없었고 율법이 율법다운 적도 없었다”고 말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는 어떻게 되었는가? 영원하며 무한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으심으로 온전히 성취되었다. 죄인을 용서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되었는가? 누구든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복음이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해 봐야할 것이 있다. 하나님은 죄를 범한 우리를 용서하기 원하시고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 죄의 짐을 대신 담당하셨다. 그렇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모두 만족되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그럼 그 결과로 우리 모두는 용서받은 사람이 되었는가? 모든 사람이 용서받아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가?
그렇지 않다. 방금 읽은 말씀에서도 “그를 믿는 자마다”라고 분명히 말한다. “믿는 자”라면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지만 그렇지 않다면 멸망한다는 말이다. 앞서 읽었던 구약의 말씀에서도 용서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은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돌아오라” 즉 회개할 것을 말씀하셨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들이 용서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애초에 하나님과 화목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용서받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진노)를 그들 스스로 받아야한다. 죄의 결과를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반대로 믿고 회개한 자는 용서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게 된다. 용서하신 하나님께서 그 죄의 결과를 온전히 감당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
사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렘 31:34 …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신다는 것은 더 이상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것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죄를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든 하나님은 잊으실 수 없다. 하나님의 약속은 “기억하지 않는 것”이다. 용서한 죄를 다시 끄집어 내서 추궁하거나 죄를 범했던 사람에게 불리하게 이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이미 용서한 죄를 가지고 “너 자꾸 이런 식으로 하면 죄 용서 받았던 것 취소야”라는 식으로 협박하지 않으신다.
여기까지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궁극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 말한 것처럼 이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절묘하게 녹아들어있다. 세가지로 정리하면서 그럼 우리의 용서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자.
하나님 닮은 우리의 용서
첫째로 하나님의 용서에는 용서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다. 하나님은 용서하려고 하신다. 용서하기를 즐거워 하신다. 기꺼이 용서하신다.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이것이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기 원하시지 멸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봐도 하나님은 언제든 용서하려고 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조금만 잘못 건드리면 폭발해서 마구 사람들을 죽이는 그런 신화 속의 신이 아니시다. 하나님 스스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오래 참고 노하기를 더디하신다. 또한 죄를 용서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이 뭔가 그들에게 빚진 것이 있나 싶을 정도다. 아니면 뭔가 약점을 잡힌 것이 있나 싶다. 그러지 않고서야 왜 그렇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집착하시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을 보라.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결혼 관계로 비유하셨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결혼 언약을 맺었지만, 이스라엘은 그 언약을 깨고 음녀가 되었다. 그렇다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언약을 지킬 이유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음녀가 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 그래서 돈을 주고 아내를 사와서 관계를 회복하셨다.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 용서해야만하는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도 하나님은 용서하셨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을 향해서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감정적으로가 아니라 의지적으로 용서하셨다.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용서하셨다.
누가복음 15장의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이런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한다. 아버지는 자기 재산을 가지고 나간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이 회개하며 돌아올 때, 그는 겨우겨우 아버지를 설득해서 용서를 받아냈던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눈에 보이자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췄다. 아들은 준비했던 회개의 말을 하려고 했지만 아버지는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말을 끊고 잔치를 준비시켰다.
이것이 아버지의 용서였고 하나님의 용서다. 마지못해서 하는 용서가 아니다.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니가 뭘 잘못했는지 말해봐라”는 식의 용서가 아니다. 니가 진짜로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했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나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대하지 않았다. 어쨌든 일단 받아는 주겠지만 앞으로 하는 것봐서 달라질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은 아버지께로 향하면서 그런 두려움이 있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용서하고 온전히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확신이 아니라 그저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아버지께로 갔을 뿐이다. 자기가 말을 잘해야 분노하는 아버지를 진정시키고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겠다는 희망 정도였다. 다시 아들로서 관계를 회복하고 하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들이 돌아왔을 때 즉시 용서했다. 우리에 대해서 하나님도 그런 용서의 마음, 용서의 태도를 가지고 계시고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가장 하나님을 닮아야할 부분이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용서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별로 공의롭지도 않은 우리들이 이럴 때는 공의를 세우려고 한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공의라는 허울로 포장된 것일 뿐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처럼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너그러운 마음, 용납하고자 하는 마음, 평화를 추구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 17: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이 말씀에서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는 말씀이 더 먼저 눈에 들어올 수 있지만, 예수님의 강조점은 용서하라는데 있다. 하루에 일곱 번을 용서해야한다고 해도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만약 실제로 이런 일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회개가 참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어떤 죄의 형벌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인지 점검해볼 필요도 있다. 다만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도 바로 이런 태도에 대한 부분이었다.
죄를 경고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죄를 드러내서 그 사람을 부끄럽게 하려고? 그 사람을 비난하려고? 혹은 반대로 나의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려고? 아니다. 그렇게 해서 상대가 회개하게 하고 내가 용서하기 위해서다. 용서하고 회복하기 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던, ‘태도상의 용서’라고 부르던, ‘내면의 용서’라고 부르던, 뭐라고 부르던 우리는 하나님처럼 용서하려고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용서합니다”라고 말하기 전에 마음으로 이미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가해자가 세상에 없거나 연락을 할 수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혹은 가해자가 회개하지 않을 때도 용서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죄를 부정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마음에는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증오심이나 복수심, 혹은 쓴뿌리가 남아있게 해서는 안된다. 시시비비를 다 가리고나서 용서할만하면 용서하겠다는 굳은 마음으로 있어서도 안된다. 그게 공의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그런 공의를 세우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니 신경쓰지 말라고도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롬 12:17–21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하나님이 만약 우리를 먼저 용서하려고 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하는 것을 봐서용서하겠다는 태도로 계셨다면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용서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받은 용서가 그런 것이 아니기에 우리가 해야 할 용서도 그런 것이 아니다. 먼저 우리는 의지를 가지고 용서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용서에는 죄에 대한 분명한 태도가 있다. 하나님은 죄를 부정하지 않으신다. 그냥 없는 셈치지 않으신다. 그래서 죄와 죄에 대한 결과를 어떻게든 처리하신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와 관련되어 있다. 결국 죄를 범한 자가 그 결과도 감당하게 되거나(회개X) 반대로 하나님께서 그 죄의 결과를 대신 감당하신다(회개O). 어떤 경우든 저질러진 죄가 그냥 없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믿는 자들의 죄를 100% 감당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던 것이다.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다시 진노하지 않으신다. 죄를 다시 벌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죄의 자연스러운 결과를 여전히 우리가 감당하게 하셔서 죄에 대해서 경고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멀어지게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시는 일이다.
예를 들어 남에게 상처주는 말(비방, 비난)을 했다면 우리는 관계의 문제를 겪을 수 밖에 없다. 믿는 자라면 그 죄에 대해서 형벌을 받지 않는다. 이미 예수님께서 그 죄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죄로 인한 악한 결과는 여전히 우리가 감당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죄가 죄인지 전혀 알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죄의 결과를 감당하게 하시고(아버지의 징계) 그렇게 죄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하시는 것이다.
구약의 다윗의 경우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다윗은 밧세바에게 간음을 행한 후에 그것을 감추기 위해 남편 우리야를 살해하기까지 했다. 간음과 살인이라는 대표적인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 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했고(삼하 11:27),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그 사실을 분명히 지적하셨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따라서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다윗의 죄를 묵인하지는 않으셨던 것이다. 그동안 네가 한 일이 있으니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주겠다고 하지 않으셨다. 다만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고 다윗은 회개했다. 그것이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회개한 다윗을 용서하셨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이다. 용서하셨으면 이제 다 끝난 일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하나님은 다윗이 범죄하여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다윗 입장에서는 ‘이게 무슨 용서야’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용서했으면 이런 일은 없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 죄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다윗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이를 통해 다윗은 자신이 범한 죄의 무게를 느꼈을 것이고, 다시는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용서와 회복의 모든 과정에서 죄는 죄로서 다뤄져야 한다. 그래서 앞선 누가복음 17:3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용서한다고 해서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괜찮아. 다 그렇지 뭐”라고 말하는 것이 참된 용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죄를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가해자는 같은 죄를 반복하게 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또한 가해자가 회개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무조건적으로 용서를 선포하는 것도 이런 면에서 옳지 않다. “당신이 회개하든 회개하지 않든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죄를 뉘우치고 뼈져리게 회개한 사람에게는 빠르게 관계의 회복에 이를 수 있게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죄를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용서하려는 마음, 용서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과 실제로 용서를 하는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선포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용서했다고 해도 죄의 결과를 가해자가 감당하게 해야할 때도 있다. 아이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잘못을 뉘우칠 때, 부모로서 아이를 용서하지만 그래도 죄의 중함을 깨닫게 하기 위해 훈육을 해야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내 마음의 분노가 풀리지 않아서 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유익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학대나 폭력을 경험한 경우 가해자를 용서하면서 동시에 법적인 조치를 취할 수도 있는 것이다. 혹은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더라도 접근을 금지시킬 수도 있다. 죄에 대한 결과를 감당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상황이 아니다. 죄를 죄로서 중대하게 다루고 또한 죄를 범한 자가 그 사실을 깨닫게 돕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무조건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용서가 죄를 그냥 묵인하거나 경시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특히 반복되는 죄, 교회나 가정같은 공동체에 큰 영향을 미치는 죄, 성적인 범죄와 같은 도덕적으로 중대한 문제가 되는 죄와 같은 것을 다룰 때 더욱 유의해야할 부분이다.
생각해 보면 죄의 짐은 용서하는 자와 용서받는 자가 그 짐을 나눠진다고 할 수 있다. 때로는 용서하는 자가 그 짐을 전부 지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신 일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 때도 ‘회개’라는 과정을 통해 우리로 죄의 무게를 알게 하신다. 또한 때로 하나님은 우리로 죄의 짐을 지게 하셔서 죄의 무게를 알게 하시고 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우시기도 하신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죄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 결코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도 그렇게 죄에 대해서는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용서는 죄를 가볍게 만들지 않았다. 우리의 용서도 그러해야 한다. 용서는 우리가 죄를 포용하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죄에서 멀어지고 그 영향력을 없애기 위한 과정이다. 그러기 위해 죄는 죄로서 다루어져야 한다. 무겁게 다루어져야 한다. 이 역시 쉽지 않지만 그렇게 해야하는 것이다. 그래야 참된 용서와 회복이 이루어진다.
셋째로 하나님의 용서에는 회개를 통한 온전한 회복이 있다. 이것이 일부의 학자들이 하나님의 용서는 “조건적 용서”라고 부르는 이유다. 회개가 없으면 용서도 없고 회복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당연한 사실이다. 하나님께 용서 받기 위해서는 ‘회개’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그것을 “조건적 용서”라고 부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조건적 용서”를 해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오해의 여지가 많이 생긴다.
두 가지 면에서 그렇다. 하나는 조건이 충족되기 전까지 우리는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더 나아가 가해자가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기 전까지 피해자는 얼마든지 분노하고 증오해도 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결국 가해자의 회개로 피해자의 마음이 움직여야 용서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용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가해자의 회개와 관계 없이 먼저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조건적 용서”라는 말은 용서에 조건을 달 수 있는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어떤 부부가 심하게 다퉈서 별거를 하다가 다시 함께 살게 되었는데, 아내는 그 상황에 대해서 “화해는 했지만 용서는 안한 상태”라고 말했다고 한다. 필요에 의해 혹은 어쩔 수 없이 싸움 전의 상태로 돌아갔으니 화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마음으로 용서는 하지 못한 것이다. 같이 살면서 남편이 잘 하면 용서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또 별거를 하든 이혼을 하든 하겠다는 말이다. 용서에 조건이 달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하나님의 용서와는 다르다. 하나님의 용서는 상황에 따라 변경되거나 취소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실 때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조건 없는 약속인 것이다. J. 아담스는 이를 우리에게 적용해서 용서에 대한 삼중 약속이라고 표현했다. 용서한 죄를 우리는 다시 떠올리지 말아야 한다. 죄를 범한 사람에게, 혹은 다른 사람에게, 혹은 나 자신에게. 이런 면에서 용서는 조건적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하지만 회개가 있어야 용서가 진정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사실이다. 용서의 궁극적인 목적이 회복에 있다면 그렇다. 가해자는 회개를, 피해자는 용서를 해야 회복에 이르게 된다.
이 말은 우리가 용서할 때 언제나 회복을 기대할 수는 없다는 의미도 된다. 하나님께서 용서하는 하나님이시지만 모든 사람이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다고 해도 회복이 항상 그 결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것이 용서를 더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결국 회복에 이르지 못하면 그게 정말 용서한 것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회복은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먼저 마음으로 용서한 자로서 상대방이 참된 회개에 이를 수 있도록 돕고 기도하는 것은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그 사람이 회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죄를 경고하고 회개하면 용서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마치 회복이 된 것처럼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내가 용서할 준비가 된 것을 회복으로 착각하면 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그냥 남아있게 된다. 회복에는 회개가 필요하고 만약 회개가 없으면 그 관계는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
그렇게 우리들에게 회복되지 않는 관계들이 더 생겨날 수 있다. 그것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에 우리가 매여있을 필요는 없다. 그것들이 내 삶을 지배하게 둘 필요는 없다. 죄가 있는 이 세상에서 어려운 관계들이 생겨날 수 있지만, 최소한 나는 하나님 닮은 사랑과 공의를 용서로서 나타내고 나머지를 하나님께 맡기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회개와 회복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하게 다루게 될 것이다.
하나님 닮은 사랑과 공의로 용서하라
나의 용서는 하나님을 닮아 있는지 점검해 보라. 나는 용서하려는 확고한 의지가 있는가. 아니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고 회개하는 자가 그것을 꺾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야하는가. 나는 죄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죄의 문제를 은근슬쩍 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용서를 하는게 아니라 그냥 내 마음이 풀리면 그걸 용서라고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나는 회개가 온전한 회복의 조건이 됨을 알고 있는가. 혹시 회복되지 않은 관계로 인해 삶이 망가져있지는 않은가. 회복이 없어서 용서도 하지 않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면에서 우리의 용서를 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그냥 화해만 하고 큰 무리 없이 살면 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냥 모난 곳 없이 둥글게 둥글게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모든 죄를 들춰내면서 정의의 사도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 가운데 참된 용서, 하나님의 용서를 보여주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용서에 대한 확고한 의지, 죄에 대한 분명한 태도, 그리고 회개를 통한 온전한 회복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모습임을 기억하고 우리도 그런 용서로 하나님의 용서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야 할 것이다.
이런 용서가 당연히 쉽지 않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친히 그 본을 보여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받은 용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그 용서의 마음이 우리에게 있기를 기도하자. 그리고 그렇게 용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