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예수님의 판결
본문: 누가복음 20장 41~21장4절
설교자: 조정의
화요일, 예수님은 성전에서 여러 차례 종교지도자들의 논쟁에 맞서셨고, 마침내 그들은 더 이상 그분께 대항할 말이 없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여러 가지 말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나름대로 판결을 내리기 원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누구인지 구약성경을 통해 밝히시고(유일무이한 그리스도, 다윗의 자손이자 다윗의 주 하나님), 이제 그들을 판단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이 종교지도자들의 삶을 어떻게 판단하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없는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45절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의 가르침은 예수님이 자기 제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가르침을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하셨습니다. 그들도 듣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마 23:1 참고,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먼저 예수님은 20장 45~47절에서 사람들이 “높은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자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서기관들이었습니다.
1. 예수님의 판결1: 서기관들(20:45~47)
46절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여기서 예수님은 “서기관들”을 콕 찝어서 말씀하셨지만, 마태의 기록에서는 “서기관들”과 함께 “바리새인들”이 언급됩니다(마 23:2). 종교지도자들, 백성의 영적, 사회적 인도자들에 대해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특히 서기관들은 말씀을 맡은 자들로, 구약성경 두루마리를 필사하여 보존하고 가르치는 학자, 교사, 율법스승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존경하고 “선생님” 혹은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높고 존경스러운 서기관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판결을 내리십니다. 47절에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왜 이런 판결을 내리셨을까요? 사람들은 볼 수 없었지만, 예수님에게는 분명하게 보이는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정확하게 보고 계셨던 그들의 문제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두 글자로 외식입니다. 외식은 현대어로 “바깥쪽을 장식함”이란 뜻을 가졌는데, 사람은 겉을 보고,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결국 바깥쪽을 장식하는 사람은 사람의 평가를 하나님의 평가보다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외식을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 후포크리테스 역시 “위선자”, “기만자”, “믿음이 강한 체 하는 사람”으로 성경 외 헬라어 문학에서는 대부분 연극배우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습니다. 연극배우는 진짜 자신을 감추고 다른 사람인 척 관객을 잘 속일수록 칭찬을 받기 때문에 이 단어가 성경에서 “위선자”, “기만자”로 쓰인 이유를 쉽게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기관들은 외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짜 내가 어떤 사람인가보다는 사람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위선자였습니다. 외식이 그들 삶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났는지 예수님의 설명을 더 들어봅시다.
- 먼저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합니다.”
긴 옷을 입는 것 그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패션을 통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여기서 문제는 왜 그들이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긴 옷”은 스톨이라고 불리는 옷으로 종교적 상징들로 꾸며진 옷입니다. 기다란 옷 술 장식이 땅바닥까지 닿고, 귀한 비단으로 특별 제작된 옷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화려할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 성스러워 보이는 옷입니다.
왜 서기관들은 이런 옷을 입고 싶어 했을까요? 사람들의 존경과 인기를 얻고 싶어서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높임을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특히 민수기 15장 38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는데 그 율법에 작은 부분도 이렇게 철저하게 순종하는 거룩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 그들은 또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당시에 사람 많은 곳에 가려면 시장에 가면 됐습니다. 시장에 가면 흥미로운 것이 많이 있지요. 그들이 시장에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문안받는 것”입니다. 그들을 알아보고 “랍비여, 주여, 아버지여” 이렇게 부르는 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마 23:7).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 23:8~10). 호칭 자체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불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의 문제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높은 자처럼 보이고 싶어서 그런 호칭에 집착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실제로 유대 문헌에 보면 사람들이 자기에게 “나의 주시여”라고 부르지 않아 침울해한 랍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침울하지요? 자기를 “주님”이라고 높여 부르지 않아서입니다. 높임 받고 싶었는데 그렇게 높여주지 않으니 슬픈 것입니다.
- 또 그들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했습니다.
회당의 앞자리는 두루마리 성경이 있는 상자 바로 앞자리로 회중들과 함께 앞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회중들을 마주 대하는 자리입니다. 가르치는 자리죠. 보통은 최연장자나 최고 학식 랍비가 차지했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 앉고 싶어했습니다. 존경받는 자의 자리니까요.
잔치의 윗자리는 어디일까요? 예수님 당시의 잔치는 식탁 주위에 손님들이 빙 둘러 누울 수 있도록 하였는데, 그 잔치를 연 주인의 가장 가까운 자리가 바로 상석이었습니다(눅 11:43). 주인이 가장 존경하고 친밀하게 여기는 사람이 앉는 자리였습니다.
그들은 회당에 가도, 잔칫집에 가도 남들이 높여주는 자리에 앉고 싶어 했습니다. 근사해 보이는 자리를 좋아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서 식사하신 적이 있는데, 손님들이 서로 높은 자리를 택하려는 것을 보시고,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눅 14:7~8).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4:11).
서기관들의 외식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이 지적하신 그들의 문제를 살펴봅시다.
47절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켰습니다.
이것은 외식의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거룩한 척, 고상한 척, 많이 아는 척, 높은 척을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것입니다. 당시 “과부”는 사회 구조상 가장 밑바닥에 있는 구성원 중 하나였습니다. 남편이 없기 때문에 가진 재산이나 자기 자신도 지켜낼 힘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과부를 보호할 것을 명령하셨지요(신 24:19~21).
하지만 이 높아지길 원하는 서기관들은 보호해야 할 과부를 함부로 대하고 그들의 가산을 갈취했습니다. 야고보가 말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과 정반대의 모습이지요(약 1:27). 어떤 식으로 그렇게 했을까요?
두 가지 생각해볼 만한 경우가 있습니다. 유대 문헌에 보면 그들은 과부의 환대를 악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식가들”이라고 불렸습니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그들에게 과부가 호의를 보일 때 그것을 악용하여 계속해서 요구하는 것입니다.
또 탈무드 기록에 따르면 과부의 재산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은 보수를 챙기는 것을 언급합니다. 과부가 부친에게 받은 지참금을 관리하기 위해 서기관들이 간혹 국선변호사처럼 일하기도 했는데 그 보수를 엄청나게 챙겨 과부의 재산을 빼앗은 것입니다.
외식하는 자는 남들에게 높임을 받고 싶어는 하지만, 남들을 높이고 섬기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아마 이들은 “과부를 돌봐야 한다”고 율법을 가지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행위로는 과부를 돌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갈취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라고 부르셨습니다(마 23:3). 말과 행동이 다른 것입니다.
- 외식으로 길게 기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종교 생활 역시 외식이었습니다. 그들은 길게 기도했습니다. 단지 기도의 길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6장 5절은 외식하는 자의 기도를 더 자세히 묘사했는데,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왜죠? 많은 사람이 들으라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큰소리로 했을 것입니다. 길게 하는 이유는요? 그래야 더 많은 사람이 보고 그가 기도하고 있음을 들을 것이 아닙니까? 길게 할 수록 더 거룩해 보이는 효과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은밀한 중에 보시고 갚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6).
하지만 외식하는 서기관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보는 사람 앞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했습니다.
옷을 입는 것도, 사람을 만나 인사하는 것도, 앉을 자리를 선택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모두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사람에게 높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3:5).
예수님은 46절에서 “이런 서기관의 모습을 삼가라”고 강력하게 경고하셨습니다. 계속해서 자신을 빈틈없이 살펴서 서기관의 예를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죠? 사람 앞에서 대단해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렇게 판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중심을 보는 하나님앞에서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이렇게 판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7번이나 부르시고,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강력하게 꾸짖으셨습니다(마 23:33).
예수님이 외식만큼 크게 꾸짖은 죄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외식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엄중한 심판을 받을 큰 죄입니다. 이 죄에 가장 취약한 사람은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선생 된 자들입니다.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기 쉬운 자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도 여기에 해당하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는 많은 교사, 또 일꾼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서기관들과 동일한 유혹을 받기 쉽습니다. 멋진 양복을 입고 뭔가 더 권위있고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길 바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선생님”, “목사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즐기고 그렇게 부르지 않는 것을 불쾌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어디를 가도 당연히 상석에 앉는 것으로, 대화에서도 중심을 차지하고, 항상 결론을 내리는 사람이 되고, 식사 자리에서도 섬김을 받아 얻어먹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진리를 강력하게 선포하면서 너무 태연하게도 그렇게 살지 않는 외식쟁이가 될 수 있습니다. 예식을 행할 때 혹은 기도할 때 더 대단해 보이고 신령해 보이려고 노력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야고보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말합니다(약 3: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2:1). 우리 자신의 삶을 빈틈없이 살펴 조금이라도 이 외식의 누룩이 없는지, 있다면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의 삶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외식은 인도자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외식에 빠질 수 있습니다. 주중에 온갖 죄를 즐기다가 주일에만 거룩한 척할 수 있습니다. 성도에 대한 뒷담화를 하고, 누군가를 계속해서 미워하고, 원수를 맺고 살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와 친밀한 연합을 상징하는 떡과 잔에 아무렇지 않게 참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처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살다가, 교회 오면 교회 맞춤형 인간이 되어 이중적인 삶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어디서든 낮아지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이런 외식의 죄와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명령처럼 계속해서 내 자신을 빈틈없이 살펴 이런 외식적인 마음과 행위가 없는지 보고, 제거해야 합니다. 겉만 보는 사람의 평가가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평가에 맞추어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명령입니다.
21장 1절~4절에는 또 다른 예수님의 판결이 나옵니다. 그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2. 예수님의 판결2: 과부(21:1~4)
1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가르치시던 장소 근처 아마도 성전 여인의 뜰 부근에서 헌금함을 보고 계셨습니다. 동전을 넣는 윗부분은 좁고 아래는 넓은 나팔 모양의 헌금함이 13개 그곳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각각 다른 목적의 헌금함이었는데 각각 그 용도가 적혀있었습니다. 오늘날 감사헌금, 구제헌금, 선교헌금 봉투가 있듯, 그때도 그렇게 용도에 따른 헌금함이 따로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여러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을 넣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자이기 때문에 “많이” 넣었습니다(막 12:41). 헌금 눈금이 있고, 동전이 들어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기 때문에 많이 넣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 이들은 누구보다 하나님께 많이 드린 사람이었습니다. 부자들이 많은 헌금을 드리는 와중에 2절에 보면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합니다.
2절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넣는 것을 보시고
이 사람은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생계가 궁핍하고 빈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두 렙돈은 하루치 평균 일당의 64분의 1입니다. 하루 5만원을 번다면 780원 정도입니다. 참새 두 마리를 살 수 있는 동전이 한 앗사리온인데(마 10:29), 렙돈 여덟개를 모아야 한 앗사리온이었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살 수 없는 돈을 이 여인이 헌금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전 옆에서 헌금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제사장이었다면, 부자와 과부 중 누가 더 많이 넣었다고 말하겠습니까?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는 무리가 판단할 때, 누가 더 많은 헌금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판단하겠습니까? 소리를 들었다면, 당연히 부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3절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강조)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예수님의 판결은 사람의 판결과 정반대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4절 저들은(부자들)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객관적으로 사람들이 볼 때 분명히 부자가 많이 넣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십니다. 부자는 자신이 가진 풍족한 재물 가운데 일부를 헌금하였고, 가난한 과부는 그녀가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헌금했습니다.
부자는 헌금함으로써 희생할 것이 별로 없었지만, 과부는 또다시 돈을 벌 때까지 먹을 것이 없더라도 하나님께 모두 드리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보이지 않는 마음을 알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헌금하는 사람이 얼마나 헌신했는지 얼마나 희생했는지 알고바르게 평가하겠습니까?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가지고 부자가 많은 헌금을 했다고 판결하겠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보십니다. 보이지 않는 그들의 마음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고 판결하십니다.
여러분, 외식은 사람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기 위한 노력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높여줄 때, 나를 거룩하다고 말해줄 때, 정말로 내가 의로워진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꿰뚫어 보고 중심을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
두렵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내 삶의 온갖 더러운 것, 악한 생각, 이중적인 삶, 있는 나의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이 보고 있고 그것에 따라 심판한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에 숨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창 3:8).
어둠은 빛을 싫어합니다. 자기 어둠의 면모가 낱낱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기가막히게 남을 잘속이는 외식쟁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포장된 의로움의 속내를 다 들여다보십니다.
하지만 여기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 1:12). 어떻게 참 빛으로 우리를 속속들이 비추실 하나님께 나아갈뿐만 아니라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며칠 후 잡히시고 십자가에서 모든 죄인을 위해 피를 흘리실 것입니다. 외식적이고 더러운 죄인을 위해 대신 죽음으로 죗값을 갚으신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 피를 힘입어 하나님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히 10:19~2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2)
우리는 더 이상 외식적인 삶을 살지 않아도 됩니다. 악한 양심으로 겉과 속이 다른 삶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의를 받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인정하고 사람에게 높임받는 삶을 삼가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휘장 가운데로 지나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더럽고 외식적인 마음과 몸을 깨끗이 씻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 앞에서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식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 수 있게 된 놀라운 은혜를 역행하는 일입니다. 또 다시 사람의 인기와 사람의 평가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더 나은 사람,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그 기준에 따라 살 수 밖에 없겠지만, 예수님을 영접한 자, 그 피를 힘 입어 담대히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된 자들은 이제 그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판결에 만족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조금이라도 사람에게 높임받고 싶어하는 외식의 누룩이 발견되거든, 이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하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기억하십시오.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 속에 그 어떤 사람의 판결, 평가, 칭찬, 비판도 장애물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로 맺어진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영광스러운 연합 속에 그 어떤 불순물도 끼어들지 못하도록 기도하며 날마다 빈틈없이 자신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빈틈이 발견될 때마다 거기에 그리스도의 보혈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 속에서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딤전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