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이 주는 세가지 의미
본문: 누가복음 23장 44절~56절
설교자: 조정의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장면(44~49절)과 묻히시는 장면(50~56절)을 살펴볼 것입니다. 사실 교회를 오래 다니신 분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 묻히셨다는 이야기를 아주 많이 들어봤을 것입니다. 게다가 거기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것까지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회를 다닌 적이 없는 분들에게 스포일러를 할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들도 예수님 이야기의 마지막이 어떻다는 것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마지막 이야기를 잘 압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단순히 예수님이 죽으시고 묻히신 장면을 설명하기보다는 그것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세 가지 의미를 발견하기 원하는데, 첫째는 역사적 의미이고, 둘째는 신학적 의미, 마지막 셋째는 개인적 의미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죽으시고 묻히신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원합니다(누가의 본문 기록 목적). 둘째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이 과연 어떤 신학적 의미를 갖는가? 마지막 세 번째로 그것이 우리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천년 전 역사적으로 확실하게 예루살렘 성 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고 무덤에 묻힌 예수님이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확실히 알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 역사적 의미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찾기 위해서 먼저는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무엇이 팩트인지 체크해봐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실에 입각한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실이 아니면 신학적 의미나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의 기록이 얼마나 사실에 입각한 기록인지, 역사적으로 확실한 기록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장례식장에 가면 고인의 마지막 장면이 어땠는지 물어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옆에서 직접 본 유가족들이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자세히 설명합니다. 때로는 돌아가실 때 주변 상황이나 분위기가 어땠는지도 설명합니다. 마지막을 지켜본 사람이 많을수록 이야기는 분명해집니다. 그들 모두는 고인의 마지막 장면을 확실히 입증해줄 수 있는 강력한 역사의 산증인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복음서를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사건을 처음부터 면밀히 조사해…순서대로” 썼다고 말하는데(눅 1:3, 우리말성경), 그의 말처럼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예수님의 마지막 장면을 자세히 묘사합니다. 그 장면을 눈으로 본 증인들의 증언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먼저 증인들은 절대 잊을 수 없는 현상을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경험합니다. 44절을 보십시오.
44절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유대인의 시간으로 제육시 즉 정오(12시)부터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합니다. 보통 낮 12시에는 태양이 오히려 가장 강렬하게 내리쬐기 시작하고 제구시인 오후 3시에는 절정에 이르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 때문에 마치 해가 그 빛을 잃은 것처럼 컴컴한 암흑이 예루살렘 성 전역을 덮는 것은 자연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결코 일어날 리 없는 현상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식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유월절인 3-4월은 일식이 일어나는 때가 아니고, 정오부터 오후 세 시까지 세 시간 동안이나 일식이 일어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라 특별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였습니다(참고. 출 10:22).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을 맞이하실 때 수많은 사람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제가 2008년 7월 유평교회 예배당에서 결혼을 했는데, 하객이 많이 참석하여 평소보다 더 세게 에어컨을 풀가동하였습니다. 그러자 과부하에 걸려 전기가 끊기고 사람들은 부채질하고 아주 많이 더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더운 여름 그것도 한낮에 에어컨이 망가졌던 그 특별한 일 때문에 저의 결혼식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십자가에 달려 죽은 죄인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수많은 죄수 중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분명히 기억하게 하는 역사적인 증거가 있었으니 바로 세 시간 동안 칠흑같이 흑암이 온 땅을 덮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 광경을 기이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그들의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돌아가심을 목격한 증인을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참으로 많았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는 47절에 나오는 로마 군병 백부장이(로마소속 군인) “그 된 일을 보”았고, 48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구경하러 모인 무리”가 있었습니다(대제사장들, 장로들, 유대인 백성). 그리고 49절을 보시면, 예수님을 “아는 자들” 즉 가까이에서 따르던 무리(제자들), 특별히 예수님을 섬기며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 역시 “멀리 서서 이 일을 보”았습니다(49절; 마 27:55).
이들은 단지 불특정 다수의 증인이 아니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49절에 언급된 “여자들”의 이름을 기록했는데,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또 세베대의 아들들(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였습니다(마 27:56; 막 15:41). 이처럼 예수님의 죽으심은 절대로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증인(그중에 이름이 분명히 언급된 증인을 포함하여)에 의해 목격된 역사적인 사실이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묻히심에 대한 증거를 확인해보겠습니다. 죽은 사람이 묻힌 무덤은 어떤 사람이 실제로 죽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며, 아주 오랫동안 그것을 증명해줄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증표가 됩니다(참고. 행 2:29,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다”,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 역시 이런면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는가? 물어본다면 그 무덤에 가보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십자가에서 처형된 범죄자는 보통 무덤에 묻히지 않고 다른 죄수처럼 골짜기에 버려져 짐승의 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월이 지나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증인이 모두 죽고 나서 후에 누군가가 “예수가 정말 죽었는가?”라고 묻는다면 확증할 수 있는 시신 또는 그 시신이 묻힌 장소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한 사람을 통해 해결하셨는데, 그의 이름은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었습니다(마 27:57). 50절을 보십시오.
50절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요셉은 유대인 동네 아리마대(어딘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사람으로 산헤드린 공회 의원 중 하나였지만 예수님을 죽이려는 결의에 찬성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요한은 그가 “예수의 제자”였으나 유대인이 두려워 이를 숨겼다고 말합니다(마 27:57; 요 19:38). 그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누가가 초반에 소개했던 시므온이나 안나처럼 메시아의 영적 왕국을 기다렸던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시므온과 안나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본 것처럼 그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랐습니다.
그는 공회에서는 두려워서 아무 말도 못 했지만,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당돌하게”(막 15:43) 그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빌라도에게 찾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차마 주님의 시신을 길거리에 버려진 짐승 밥이 되게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백부장을 통해 예수님이 정말로 돌아가셨는지 확인하고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확실한 증거), 그 후에 예수님의 시신을 내주었습니다(막 15:44~45).
52절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53절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빌라도는 예수님의 시신을 직접 받아 (아마도 물로 씻기고-베드로복음) 깨끗한 세마포로(고운 베옷) 시신을 쌌습니다(마 27:59). 그리고 자기 소유의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넣었습니다(마 27:60).
누가의 이 표현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 요한은 “새 무덤”이라고 말합니다(요 19:41). 왜 이것이 중요할까요? 유대인, 특히 부유한 사람의 무덤은 큰 바위에 구멍을 내고 그 안에 굴을 만들어 여러 시신을 보관할 수 있는 각각의 공간을 만드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요한의 가족들이 앞으로 묻힐 가족묘였을 것입니다.
굴 안에 시신을 두고 향료와 향유를 듬뿍 발라 몸이 부패하면서 나는 냄새를 덮고, 살이 완전히 썩으면 유골함에 뼈들을 모아 단지에 보관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가족 납골묘와 비슷합니다. 단지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는 것과 먼저는 그 안에 시신을 보관했다는 점이 다릅니다.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라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 무덤에 다른 시신이 있을 가능성이 조금도 없었다는 사실때문입니다. 무덤 속에 여러 시신이 있어 예수님의 시신과 혼동할 가능성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이 무덤은 오직 예수님의 무덤이었습니다.
새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 하나만 놓여 있었습니다. 이 말은 이 무덤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오랜 시간 확실하게 증명해줄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어느 날 이 무덤이 비어있는 채로 발견된다면, 수많은 시신 중 누구일지도 모르는 시신 하나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이었습니다. 누가 훔쳐 갔거나 혹은…(스포일러).
또 한 가지 요셉이 이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넣는 것을 본 증인을 주목해야 합니다. 아주 많은 증인이 예수님의 묻히신 장소에 찾아왔습니다. 먼저 누가가 55절에 기록한 것처럼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56절에 말하고 있는데 시체에서 나는 썩은 냄새를 덮기 위한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기 위해서 입니다. 사실 여기에는 아주 절묘한 타이밍이 적용되는데, 예수님은 금요일 오후 3시경에 돌아가셨고 3시간 후인 금요일 오후 6시부터는 안식일이 시작될 것이었습니다(54절). 안식일에 유대인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아야 했고 특히 부정한 시신 곁에 가는 것은 더욱더 금지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향품과 향유를 충분히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시간이 없기 때문에 안식일 후 그 일을 하려면 어디에 예수님을 묻는지 확실하게 장소를 확인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따라 예수님의 무덤을 따라온 것이고 예수님이 묻히시는 곳과 그 장면을 똑똑히 지켜본 것입니다. 그리고 계명에 따라 안식일을 지킵니다(56절).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오는데…
이 여인들 외에도 많은 증인들이 있습니다.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의 또 다른 숨은 제자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드릴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30kg) 가지고 찾아왔습니다(요 19:39).
게다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이 빌라도에게 요청하여 혹시라도 제자들이 시신을 몰래 훔쳐 가 ‘예수가 부활했다’고 거짓 증언할 수 있으니 경비병을 무덤 앞에 배치해달라고 요청합니다(마 27:62~66). 그래서 대제사장, 바리새인, 경비병 모두 그 무덤에 찾아가 큰 돌로 막힌 무덤에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킵니다. 예수님이 묻힌 곳을 아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던 것입니다.
결국 누가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진실로 죽으셨고 진실로 묻히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다고 말할 수도 없고,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고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본 사람이 너무 많았고 잊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으며, 예수님의 죽음과 묻히심을 입증할 증인과 증거도 충분했습니다.
2. 신학적 의미
자,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확증했습니다. 2003년 댄 브라운이 쓴 허구 소설 “다빈치 코드”나 유명한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여 보통 사람처럼 남은 삶을 살았다는 것은 팩트 체크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묻히셨다고 확증하고 있으며,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조차 “예수는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 본디오 빌라도 총독이 처형한 사람”이라고 분명히 기록했습니다. 이것이 팩트입니다.
자, 그러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이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한 죄인이 죽었고 그를 추종하는 사람에 의해 무덤에 묻혔다는 게 아무리 사실이더라도 그게 뭐가 그리 대단한 의미가 있냐는 것입니다.
저는 일부로 “신학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묻히심이 “신학” 곧 하나님에 관한 어떤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 특별히 구원자로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을 통해 하려고 하신 일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누가의 기록 중 45~46절의 기록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다시 제육시로부터 시작된 암흑으로 돌아갑니다. 제구시까지 계속된 암흑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와 그 주변을 완전히 뒤덮었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이 암흑이 태양마저도 인간의 손으로 행한 행위를 차마 볼 수 없어서 생긴 것이라고 말하지만, 구약의 기록을 보면 암흑은 “하나님의 임재와 심판”을 의미합니다(욜 2:10, 30~31; 3:15; 암 8:9; 슥 1:15).
예수님이 달려 있는 십자가를 둘러싼 흑암 속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계신 하나님은 인자와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나무에 달린 죄인 예수에게 쏟아졌습니다. 창세로부터 종말까지 많은 사람이 저지른 죄에 대한 지옥 심판이 예수님에게 내려졌습니다.
이 흑암 속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진노가 예수님에게 조금의 자비도 없이 퍼부어졌기 때문에 마태와 마가의 기록처럼 예수님은 이렇게 크게 소리 지르셨을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막 15:34).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부르실 때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 유일한 장면입니다. 자기 백성의 죄를 뒤집어 쓰고 죄인으로서 영원 전부터 누렸던 아버지와의 관계가 찢어지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45절에 일어난 일입니다.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일종의 커튼으로 길이가 15m 정도이고 두께가 약 10cm 정도의 두꺼운 천이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하신 장소로 하나님의 율법이 담긴 언약궤가 있던 자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함부로 나갈 수 없어 백성을 대표하는 대제사장이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해 일 년에 단 하루만 그 휘장을 지나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유월절 기간이었기 때문에 성전에 있던 많은 사람이 성전 안쪽 지성소에서 휘장이 찢어지는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마태의 증언처럼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면 큰 소리가 들릴법합니다(마 27:51). 들어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한 이들은 아마 큰 충격에 빠졌을 것입니다. 어느 날 큰 소리가 나서 보니 이 강대상이 둘로 쪼개지거나, 앞에 있는 만찬상이 둘로 쪼개졌다면 우리 마음이 어떨까요? 과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심으로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둘로 찢어지는 심판과 저주를 받으신 예수님, 그리고 그와 동시에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도록 가로막은 휘장이 동시에 찢어졌다는 것…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 그리고 그 죽으심을 증명하는 묻히심이 주는 신학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피를 흘려 죽으셨다는 것이며,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담대히 휘장을 통과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지금까지는 죄인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받아들여지기 위해 수많은 번제와 소제, 화목제와 속죄제, 속건제가 성전에서 드려졌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죽음으로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성전의 역할은 이제 종료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실 때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온전한 순종과 희생의 참 번제물이 되셨고, 헌신과 섬김의 소제가 되셨으며, 하나님과 영원한 화평을 가져온 화목제가 되셨고, 많은 사람의 죄를 단번에 영원히 씻어낸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영원히 화해하며 죗값을 온전히 배상하는 속건제물이 되셨습니다.
유월절 수많은 어린양이 바쳐진 성전 그 밖에서 참 유월절 어린양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이제는 더이상 양의 피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담대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단번에 영원히 죄인을 향한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살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육체가 죽었을 때 말입니다.
46절에서 예수님이 숨지기 전에 하신 말씀을 보면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원하신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46절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점점 힘을 잃어가셨지만, 마지막으로 크게 외치셨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의 이 유언은 다윗이 시편 31편 5절에 기록한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를 인용한 것입니다. 다윗이 원수로 인해 고통 중에 있을 때, 고난 중에 영혼과 몸이 쇠하여졌을 때 주의 공의에 의탁하며 구원을 요청했던 시편입니다(시 31:1, 7, 9).
후에 이 유언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들었던 베드로 역시 예수님의 유언에 대해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벧전 2:23).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공의로운 아버지께 자기 영혼을 부탁하시고 구원을 요청하셨으며 그러고 나서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죽음을 취하셨습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5, 17~18)
예수님은 스스로 자발적으로 목숨을 버리셨고 이를 기뻐하셨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를 믿는 마음으로, 그분이 다시 얻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리고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3. 개인적 의미
자, 이제 마지막 단계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것을 확실히 증명하는 묻히심이 역사적인 사실이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이라면, 이것이 저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 것일까요?
십자가를 바라본 사람들의 반응을 주목해볼 차례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죽으심이 가져온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47절에 백부장을 보십시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백부장은 또한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합니다(마 27:54). 48절에 구경하러 모인 이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그들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가슴을 치며 슬퍼했습니다.
우리의 반응이 이와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흠이 없고 점이 없는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은 죄인이 가슴을 쳐야 할 일입니다. “아무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바로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이렇게 고백하면서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숨이 빠져나갈 때, 죄와 허물로 죽었던 저와 여러분에게 새로운 숨이 들어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원전부터 누리던 아버지와의 친밀한 사랑이 둘로 쪼개졌을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쪼개진 관계가 영원히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흑암이 덮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덮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아버지를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을 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받아 죽었을 때, 우리 앞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살 길을 앞에 두고도 망설이고 계신 분이 있다면, 더이상 망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 입어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위해 치르신 희생의 가치가 얼마나 크고 위대합니까? 친구를 위하여 것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 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요 15:13). 가장 고귀하고 흠 없는 보배로운 생명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두신 예수님, 그분을 믿으십시오(벧전 1:19). 이 놀라운 사랑을 거절하는 무서운 죄에 빠지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경고합니다(요 3:18).
예수님의 죽으심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계신 분들께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여러분 여전히 주님의 사랑은 여러분의 가슴을 뛰게 합니까? 만찬을 대할 때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십니까? 정말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도대체 무엇이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목숨을 내어주면서까지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신 예수님보다 더 아름답고 가치있고 중요하단 말입니까? 사도 바울처럼 우리에게 이런 작정이 필요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여러분 누군가 여러분을 위해 대신 죽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여러분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사랑을 받았는가 절대로 잊지 않고 날마다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우리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