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예수님의 가족소개
본문 : 누가복음 8장 19~21절
설교자 : 이병권
오늘 본문은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찾아왔는데 만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서 가까이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가족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자신의 가족을 소개하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족을 소개하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족을 소개하셨다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황당할 수도 있는 예수님의 가족소개!
우리 교회는 수요일마다 커뮤니티 홈페이지를 통해서 가족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특별히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족소개를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가족소개가 어떤 교훈을 주는지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특별히 저는 오늘 본문을 세 가지 질문을 가지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형식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주일학생들이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가족을 알고 싶어요.” 아이들은 가족에 대해서 궁금해 합니다. 그럼 예수님의 가족이 어떠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9절을 보시면 예수의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잘 아시는 대로 마리아입니다. 우리는 이미 누가복음 1장과 2장에서 마리아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그 때에 마리아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사명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높이며 찬양했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동생들이 나오는데,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근거하면, 마리아가 계속 처녀라고 주장하며 마리아를 신성시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과 다른,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가 결혼하기 전,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셨지만, 이 후에 마리아가 낳은 자녀들은 요셉으로부터 태어난 자녀들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동생들에 관한 기록이 별로 없지만, 그 중에 한 구절을 찾아보면 그들의 이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고향을 방문하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했던 말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막 6:3)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에게는 야고보와 요셉, 유다와 시몬 이라는 남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여동생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은 최소 여섯 명,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은 최소 7남매의 장남으로 계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마리아의 아들 목수”라고 말합니다.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리아가 요셉과 결혼하기 전에 임신해서 낳은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을 깎아내리는 표현, 예수님을 깔보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또한 우리는 “마리아의 아들 목수”라는 말을 통해 예수님이 집안의 일을 물려받아 목수의 일을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요셉은?’ 이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오늘 본문에 마리아와 동생들은 나오지만, 요셉의 언급은 없습니다. 사실 요셉은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 때 있었던 성전 사건 이후로 성경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요셉이 예수님이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것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집안의 가장으로서 목수의 일을 하면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 가족들을 부양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가족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 7:5)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어땠을까요?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마리아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동일하게 가지고 있었을까요? 물론, 그녀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알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 구주라는 사실을 들었고 그 사실을 마음에 간직했습니다. 또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분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마리아는 자신의 자녀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왔을까요? 이에 대해서 누가는 다른 언급을 하고 있지 않지만 마가는 그 배경을 기록합니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막 3:20-21)
예수님은 쉴 틈 없이 계속되는 사역으로 인해 식사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을 예수님을 향해 미쳤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예수님의 가족들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매우 분주한 예수님을 염려해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찾아왔습니다. 필요하다면 예수님을 집으로 데려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마리아도 세례 요한처럼 그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분명 그분이 메시아임을 알고 있었지만,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서 의문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어머니의 마음으로 하는 걱정과 염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마리아와 그 자녀들의 믿음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무엇이 그들의 믿음을 바꾸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그들의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을 만큼 강력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들은 바뀝니다. 그 모습을 사도행전은 이렇게 기록합니다.“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 1:14) 예수님의 동생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그분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헌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실 뿐만 아니라,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산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셨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며 우리의 모든 삶을 주장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이 죽음에서 일어나셔서 무덤 문을 여시고 살아나셨음을 믿으십니까? 그분은 살아계십니다. 그 사실이 우리를 다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라 부르며 섬기고 따르는 분은 과거에 죽으시고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곁에 살아계십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을 들으시고,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일을 아시며, 우리가 하는 모든 수고를 보고 계십니다. 그럼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분이 살아계시는데, 여러분에게 문제가 될 만한 것이 무엇입니까?
두 번째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 학생회 학생들이 하는 질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아닌가요?”
오늘 본문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예수님이 어머니와 동생들과의 가족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가족이 아니라는 말로 생각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 집에 아직 예수님을 안 믿는 가족이 있다면, 보다 더 현실적으로 이 말씀이 다가 오는 것입니다. ‘어머니, 죄송하지만 어머니는 이제 더 이상 제 어머니가 아니에요. 다시 제 어머니가 되고 싶으시면, 다음 주부터 교회에 나오세요.’ 여러분, 이런 게 아닙니다.
오해 없이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본문의 상황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조차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이 시기에 예수님의 인기가 어땠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기 있는 연예인이나 유명인사에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처럼 예수님도 그러했습니다.
그 때에 누군가가 예수님께 가족이 왔다는 소식을 알립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것을 통해 아주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잘못 이해하면 ‘지금 밖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내 가족이 아니고, 대신에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이 내 가족이다‘라고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잘 보십시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을 찾아온 가족들이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족이 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혈연으로 맺어지는 가족이 아니라 영적인 가족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기꺼이 응답하는 사람, 그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보면, 사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의 가족소개는 예수님의 가족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 방법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마리아와 그 자녀들이 예수님과 어떤 관계가 되느냐하는 것은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관계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 각자가 하나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을 거절하신 게 아니라, 진정으로 그분께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상황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가족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올 수 있는 방법, 영원히 자신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영적인 가족관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예수님과 실제로 가족관계였던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극히 제한적이고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또한 그 사람이 특별한 관계로 지내는 것은 일시적이고 정말 잠깐입니다. 이 땅에서만 의미가 있는 아주 짧은 시간의 관계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와 대조되는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영원히 그분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허락되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반응한 사람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의 놀라움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 땅에서 맺어진 가족관계를 무시하거나, 가족이 필요 없다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맺어지는 새로운 가족관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가족관계가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새로운 가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주님 안에서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영원한 가족입니다. 주위를 한 번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시끌벅적한 대가족이죠?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부를 때 형제, 자매로 부르며, 부친님, 모친님, 또는 삼촌이라 부르고 이모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서 한 가족으로, 그 관계 속에서 삽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영원히 우리 주님과 함께 가족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한 두 번 보고 마는 사이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좋든지 싫든지 관계없이, 우리는 영원히 함께 할 사이입니다. 그러니 영원히 함께 할 사이인데 좀 잘 지내야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에 대해서 안 좋은 마음을 담아두면 안 되겠죠? 누군가의 잘못을 깊이 묵상하면서 미워하면 안 되겠죠? 누군가가 잘 되는 것을 보고, 질투하면서 시기하면 안 되겠죠? 가족이 뭡니까? 기쁨을 함께 나누고, 아픔을 함께 하며, 서로가 서로를 품어주고, 세워주고, 도와주는 공동체 아닙니까? 함께 협력해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가족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한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서로를 위해서 가족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가족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세 번째 질문입니다. 마지막 질문은 청년들이 하는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다른 복음서와 다른 건 왜인가요?”
‘복음서를 보다가 왜 이런 차이가 있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같은 내용을 다루는 본문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네 개의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본문을 병행본문이라고 하는데, 복음서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인 예수님의 가족이 예수님을 찾아온 사건은 누가복음 외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누가복음이 다른 복음서와 가장 두드러지게 차이나는 것은 본문의 위치입니다. 이 사건이 마태와 마가복음에는 ‘씨 뿌리는 비유’ 전에 기록되어있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은 이 사건이 ‘씨 뿌리는 비유’ 후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차이가 있는 걸까요?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누가복음의 큰 흐름은 시간적인 순서를 따르지만, 그 안에 세부적인 사건들은 누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따라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와 차이를 보이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점은 누가가 이미 자신의 글을 시작하면서 밝혔던 내용입니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눅 1:3)
여기서 특별히 “차례대로”라는 말은 역사를 기록하는 것처럼 있었던 일들을 순서대로 기록했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의도를 가지고 사건들을 정리해서 다시 배열했다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가족이 예수님을 찾아온 사건은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있었던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는 이 사건을 ‘씨 뿌리는 비유’와 ‘등불의 비유’ 다음에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기록하면서 누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 커뮤니티 홈페이지에 매주 학생회 사진을 올리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학생회가 진행되는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사진을 배치합니다. 찬양을 부르는 사진, 말씀을 듣는 사진, 2부 활동사진, 순서로 올립니다. 하지만 저는 모든 사진을 찍은 순서대로 올리지는 않습니다. 제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다시 정렬합니다. 시간적으로 뒤에 찍었지만, 앞 쪽에 배치하기도 하고, 시간과 관계없이 내용에 따라 분류해서 같이 묶어서 올리기도 합니다. 저는 의도를 가지고 학생회에 있었던 일을 차례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마치 이런 것처럼 누가는 자신의 목적에 따라 “차례대로” 기록했습니다. 이 누가복음을 읽게 될 독자에게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성령의 감동하심 가운데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는 왜 이 사건을 지금 이 위치에 두었을까요? 우리는 자연스럽게 왜 누가가 ‘씨 뿌리는 비유’와 ‘등불의 비유’ 다음에 이 사건을 기록했을까? 하는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씨 뿌리는 비유, 등불의 비유, 그리고 오늘 본문의 사건은 모두 같은 주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같은 주제를 반복함으로 이 주제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사건을 마지막에 기록함으로 그 결론을 내립니다. 그 주제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누가는 지금 말씀 듣는 것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의 비유들의 결론과 오늘 본문의 결론을 다시 살펴보면,
씨 뿌리는 비유의 결론입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15절)
등불의 비유의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18절)
오늘 본문의 결론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21절)
누가복음 8장 4절에서 21절까지 이어지는 큰 단락에서 무엇이 강조됩니까? 말씀을 듣는 것, 누가는 하나님 말씀을 잘 듣는 것의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는 것이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까?
말씀을 잘 듣는 것은 말씀을 듣고 지키어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말씀을 잘 듣는 것은 말씀을 듣고 자신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말씀을 잘 듣는 것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입니다. 누가는 지금 반복해서 말씀을 듣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듣는 자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 결론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라’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그저 지적인 이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내 삶에 행함으로 하나님 말씀에 반응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족에게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 예수님의 가족이십니까? 예수님과 새로운 관계가 되셨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가족은 하나님 말씀에 반응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예수님과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설교하기에 힘든 본문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말씀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내용이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따라 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행함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전하고 있지만, 저의 마음은 편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괴롭습니다. 주님 앞에서 제 자신이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더 순종하고 더 변화되고 더 주님을 위해 살고 싶은데,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전한 마음으로 반응하며 행함으로 실천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반복해서 실패를 경험합니다. 낙심되기도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내가 이것 밖에 되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 자리에 설 수 있는가? 주님을 생각하면, 죄송함으로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없으십니까?
하지만, 또 다시 희망을 가지고 일어납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해 달려갑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런 나를 사랑하시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우리는 신실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쉽게 변합니다. 우리는 실패합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요? 우리 주님은 신실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 주님은 언제나 동일하십니다. 우리 주님께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모든 삶을 온전히 맡길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 앞에 겸손히 나 자신을 낮추고 그분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분의 사랑을 기억함으로 우리의 온 마음과 뜻을 다해 그분을 사랑한다면,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나를 그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나를 자녀 삼으셔서 그 관계 속에서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사랑과 은혜를 기억함으로 하나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며 그분께 영광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눔을 위한 질문들
-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예수님의 가족들은 왜 예수님을 만나러 왔나요?(막 3:20-21)
- 예수님은 자신의 새로운 가족 구성원을 소개하는데 누구인가요? 가족이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 주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된 성도들에게 당신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해보세요.
- 오늘 본문 말씀이 ‘씨 뿌리는 비유’와 ‘등불의 비유’ 다음에 나오는 것은 왜인가요?
-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잘 듣는 건지 말해보세요(15, 18, 21절).
- 당신이 하나님 말씀을 더 잘 듣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