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영생을 찾는 사람(들) 1

본문: 누가복음 10장 25-29

설교자: 최종혁

 

오늘 본문 뒤에 바로 이어지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한번쯤 들어봤을 유명한 이야기이면서, 또한 여러모로 가장 많이 오해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초대 교부 중 하나였던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이 있다. 그는 성경해석에 있어 문자적 의미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다(영해, 우화적(알레고리적) 해석).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서 강도 만난 자는 인류이고, 강도는 사탄이라고 주장했다. 강도 만난 자를 돕지 않았던 제사장은 율법이고, 그를 도운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의미하며, 또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돌보게 했던 여관은 교회이고, 그가 다시 올 때를 언급한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교부인 어거스틴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의미는 이렇다. 아담으로 대표되는 인류는 천국(예루살렘)을 버리고 세상(여리고)로 가다가 악마와 추종세력을 만나 공격을 받았다. 그의 옷이 벗겨지고 거의 죽게 된 상태가 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불멸성을 빼앗기고 죄로 인해 영적으로는 죽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아는 선천적인 지식으로 인해서 숨은 붙어있는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 상태의 인간에게 율법(제사장)과 선지자(레위인)는 도움을 주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사마리아인)께서 도우셨다. 상처를 싸맨 것은 죄를 억제한 것이고, 기름과 포도주로 치료한 것은 희망과 의로를 준 것이다. 자기 짐승에 태웠다는 것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몸에 죄인을 태운 것이고 그렇게 교회(여관) 안으로 그를 더하셨음을 의미한다. 여관 주인은 사도 바울이며 데나리온 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계명을 의미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사마리아인이 돌아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한다.

이런 성경 해석은 듣는 자에게 놀라움을 줄 수 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성경의 깊은 의미를 깨달은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뭔가 더 깊은 영적인 차원으로 인도되는 것 같다. 실제로 오리겐은 평범한 사람은 ‘몸’을 통해 깨우침을 얻지만 보다 진보를 이룬 사람은 ‘혼’을 통해, 그리고 완전한 사람은 ‘영’을 통해 깨우침을 얻는다고 말했다. 이는 성경에는 표면에 보이는 것보다 더 높고 깊은 차원의 의미가 있고 그것은 일부의 뛰어난 사람만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정말 그럴까? 그렇지 않다. 그럴 수 없다. 그런 관점은 성경의 기록 목적 자체를 훼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성경을 주셨다. 그런데 누구나 알 수 있는 표면적인 의미보다 더 깊은 의미를 일부의 뛰어난 혹은 창의적인 사람만이 알 수 있다면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이렇게 성경을 읽고 해석해야 한다고 믿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뛰어난 사람을 의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 대한 또 다른 유형의 오해는 마지막 예수님의 말씀인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에만 지나치게 집착해서 생긴다(37절). 그래서 이 말씀을 선행, 구제, 사회 정의 구현을 장려하는 말씀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말씀을 듣고 연구하고, 심지어 모여서 예배 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고 불쌍한 이웃을 돕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식으로 이 말씀을 적용한다. 이 말씀을 구제 등의 영역에 적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 말씀의 본래 의도가 아닌 것은 알아야 한다. 만약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정말로 그렇게 할 것을 기대하고 의도하신 것이라면(그것이 예수님의 본래 의도라면) 예수님은 그렇게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된다. 그동안은 네가 좀 부족했으니 이제는 가서 이 정도로 이웃을 사랑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처음 율법교사의 질문이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이기 때문이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예수님을 찾아왔던 어떤 율법교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답하시면서 이해를 돕기 위해 하셨던 말씀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율법교사는 어디까지 자신이 구제를 해야하는지를 궁금해하지 않았고 따라서 예수님은 그것에 대해서 답하지 않으셨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포함한 예수님과 율법교사의 대화의 주제는 ‘무엇을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였고, 따라서 이 맥락에서 이 모든 말씀을 해석해야 한다.

이 말씀은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말하는 영생은 늙지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 구원 받는 것을 의미하고 여기 율법교사도 그런 의미로 이 질문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이 사건을 기록하여 정말로 누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독자가 분명히 알 수 있게 했다고 할 수 있다.

누가복음 10장의 시작에서 예수님은 70명을 따로 세우셔서 각 지역으로 보내시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이적을 행한 것으로 기뻐하며 돌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런 것들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다(20절). 그리고 21-22절의 기도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구원이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드러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린 아이들에게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말씀하셨다.

이 맥락에서 이어진 말씀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는 25-37절의 말씀인 것이다. 이 말씀은 바로 영생에 대한 말씀이고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가 성경이 말하는 단순한 영생에 대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함에 대한 실제 예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다.

사실 ‘영생’에 대해 오늘날의 사람들은 크게 관심이 없다.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엄청난 관심을 보인다.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그렇다. 아침 방송을 보면 다 그런 내용이다. 뭐를 먹는게 좋다더라, 뭐를 하는게 좋다더라와 같은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이 그런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안에 사실이 있을 것이고 또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몸의 좋은 청지기로서 건강한 삶을 위해 노력하는 것도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영생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뒷전에 두고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것만 중요하게 여기며 살다보면 예상치 못한 때에 내 삶에 전부였던 눈 앞의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때는 영생에 관심을 가지기에는 늦다. 이미 영생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본문에 등장하는 율법교사는 그래도 이 땅에 살 때 영생에 관심을 가졌다는 면에서 긍정적이다. 더욱 긍정적인 것은 그 영생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연구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가장 긍정적인 것은 그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점이다. 생명이신 예수님,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을 만나 그분께 영생에 대해서 질문하는 특권을 그가 누렸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누가를 통하여 이 사건을 성경에 기록하셔서 우리에게도 그 특권을 누리게 하셨다. 우리가 이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이해한다면 그 특권을 우리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25-37절의 말씀을 두 번에 나눠서 살펴볼 것이다. 이 말씀은 크게 보면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부분은 동일한 구성으로 되어 있다. 율법교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질문하시고 그 질문에 율법교사가 답하면 예수님은 “그대로 하라”는 결론을 내리신다.

25-28절을 먼저 보면 율법교사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을 때(25절),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되물으셨다(26절). 그러자 율법교사는 “…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답했고(27절), 예수님은 이에 대해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답하셨다.

마찬가지로 29-37절도 동일한 구성으로 되어 있다. 율법교사가 먼저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물었고(29절),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드신 후에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물으셨다(36절). 이에 율법교사가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답하자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37절).

이런 식의 대화는 당시의 일반적인 교수법(수업방식)을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수업방식은 대개 일방적으로 진행되지만, 예수님 당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제자가 질문을 하면 스승이 또 다른 질문을 통해 문제의 핵심을 깨닫게 하는 방식이 주로 사용되었었고 예수님도 그런 방식으로 이 율법교사를 가르치셨다고 볼 수 있다. 오늘은 25-29절의 말씀을 통해 이 중요한 대화의 첫부분과 율법교사의 그에 대한 반응을 살펴보자. 이 대화는 영생을 찾는, 영생을 찾아야하는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록된 대화다.

율법교사의 질문(25절)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대화의 주인공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는 “율법교사”는 율법의 전문가로서 오늘날로 따지면 신학교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 율법을 연구할 뿐 아니라 율법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제공하고 가르치는 일을 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선생이었고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의 자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 위치에 있던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고 기회가 되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했던 것이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니고데모는 직접 이런 질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마음 속에 이런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갔었고 그에게 예수님은 사람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지를 말씀해 주셨었다. 누가복음 18:18에서는 젊은 부자 관원이 예수님께 같은 질문을 했었다. 니고데모는 진실되고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갔었다. 젊은 부자 관원의 경우는 긍정 혹은 부정으로 단정짓기 어려운 중립적인 마음 상태였던 것 같다.

그런데 여기 율법교사는 달랐다. 그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칭하여 존중의 의미를 담았지만 그의 질문의 의도는 순수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 질문을 하고 있다. 이 표현 자체만으로 이 사람이 다른 종교 지도자들처럼 예수님을 책 잡으려고 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순수한 질문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지금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다. 순수하게 학생의 입장에서 선생에게 질문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스스로 더 나은 선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예수님라는 선생은 얼마나 이 질문에 답을 잘하는지 시험해보는 것에 가깝다. 사실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율법교사들에게는 익숙한 질문이었고, 따라서 이 율법교사도 이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었다(27절에서 자신이 생각한 답을 말함). 율법교사는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 예수는 뭐라고 답할지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 뿐이다.

29절의 반응을 보면 율법교사는 자신은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니고데모와 달랐다. 겸손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바울은 자신이 구원 받기 전의 상태에 대해서 빌 3:4-6에서 묘사했는데, 이 율법교사도 정확히 그렇게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3:4–6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이 율법교사가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자신은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어느 정도 믿고 있었을 것이다. 민족적으로 보나, 율법적으로 보나, 종교적으로 보나, 어느모로 보나 자신은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이 율법교사는 예수님을 시험하고 싶어서 영생에 대한 질문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마주하고 있었다.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영생에 대한 질문을 가장 적절한 사람에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질문(26절)

최고의 교사로서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가장 적절한 질문을 하셨다.

10: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나중에 보겠지만 같은 질문을 했던 젊은 부자 관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율법의 계명을 나열하셨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율법교사였기에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적절한 질문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답이 없는 질문을 통해 이 사람을 곤란하게 하려고 하셨던 것은 아니다. 율법은 영생에 대해서 말하지도 않는데 이런 질문을 하신 것이 아닌 것이다. 구약 성경은 분명히 영생의 길에 대해서 말한다.

5:39–40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은 일차적으로 구약 성경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당시에는 아직 신약 성경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연구해 보면 그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오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서 율법에 대한 관찰과 해석을 물으셨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는가를 묻는 것이 관찰이고 그것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즉 그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묻는 것이 해석이다. 이것은 율법교사가 항상 하던 일이다. 율법에 대한 정직한 읽기와 해석에 기초하여, 네가 내린 답은 무엇이냐고 예수님은 물으신 것이다.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 교사는 제대로 답할 수 있었다. 그가 율법의 전문가로서 알고있던 모든 지식과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보여주신 것들을 정직하게 비교했다면 제대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을 예수님은 하신 것이다. 구약의 말씀을 통해서 니고데모가 거듭남에 대해서 알았어야 했던 것처럼 이 율법교사도 영생에 대해서 제대로 알았어야 했다.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의로울 수 없는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할 메시아를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있고, 당신이 바로 그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입니다”라고 율법교사는 답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율법교사의 답은 이러했다.

율법교사의 대답(27절)

10: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 대답이 옳은지 틀린지는 차치하고, 먼저 의미를 생각해 보자. 율법교사는 신명기 6:5와 레위기 19:18에 기초하여 이렇게 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의미로 답했다.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예수님도 이 둘을 함께 언급하신 때가 있었는데, 한 율법사가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냐고 질문했을 때였다.

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여기 40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결국 이 두 계명이 율법의 모든 계명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정확히는, 나의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구현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형제(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인데, 그 중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선순위에 있다.

이렇게 보면 율법교사가 말한 것은 모든 율법을 지키면 영생을 얻는다는 의미가 된다. 뒤에서 암시된 것처럼 자신이 지킬 수 있는 율법의 한도(이웃의 정의)를 정했지만, 여튼 그는 율법을 지키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답한 것이다.

먼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신명기 6장의 ‘쉐마’로서 바로 앞에서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라며 이 명령의 기초에 있는 사실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하나님은 존재적으로 유일한 한 분이시지만 여기서는 그런 의미에서의 유일함보다는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있어 유일함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민족들은 여러 신을 섬겼다. 사실 그 수를 다 셀 수도 없었다. 그들은 각 신마다 주관하는 영역이 따로 있다고 믿었고 따라서 자신의 상황에 따라서 주로 섬기는 신이 있지만 동시에 여러 신을 섬겨야 했다. 해상 무역을 하면 바다의 신을 주로 섬기겠지만, 결국 육지에서 하는 일 때문에 대지의 신도 섬겨야 했다. 전쟁에 나가게 되면 전쟁의 신이 필요했고 공부를 하면 지혜의 신이 필요했다. 날씨를 다스리는 신의 도움도 필요했고 사랑의 신의 도움도 필요했다. 이것이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 중 어느 한 신만을 섬기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헛된 우상을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 만을 섬기라고 말씀하셨다. 특히 신명기 6장에서는 섬기라는 명령이 아닌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주어졌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모든 감정과 의지와 동기가 동반된 사랑을 요구하신 것이다. 온전한 헌신을 명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의 사랑은 ‘선택’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많은 민족들 중에 이스라엘을 선택하시어 사랑하셨다.

10:15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신실하게 사랑하셨다. 그들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고 바른 길로 이끄셨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렇게 하실 것을 언약으로 확인시켜주셨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화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율법의 가장 큰 계명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선택이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나님 만을 선택하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하나님도 선택했다가 다른 신도 선택했다가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둘을 이용하고 있는 것 뿐이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며 백성들에게 도전했던 것이다(수 24:15). 엘리야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하지 말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함을 강조했다(왕상 18:21).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마땅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여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모든 것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명기 6장에서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명령에 바로 이어지는 말씀은 이렇다.

6:6–9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려면 결국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있다. 그러니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자녀에게도 가르쳐야 한다. 가장 가까운 곳에 말씀을 두고 눈에 보이는 어느 곳이든 말씀이 보이게 해야 한다. 당연히 그렇게 해놓기만 하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며 그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속의 가장 깊은 곳에서 시작되어 우리의 손가락과 발가락 끝까지 도달하여 우리 모든 삶을 통째로 바꾼다. 부부 생활, 가정 생활, 직장 생활, 학교 생활, 사회 생활 등 모든 것을 바꾼다. 각각의 영역에 다른 신이 있어서 나에게 편한대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 하나님이 계셔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큰 계명의 의미다. 그렇게 한다면 그 사람은 자연스럽게 둘째 계명인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게 된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율법의 전부이고 율법교사는 바로 그 율법을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답한 것이다. 맞는 답일까, 틀린 답일까? 이 답안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를 보자.

예수님의 대답(28절)

10: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답이 옳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그렇게 행하면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산다”는 것은 문맥 상 “영생을 얻으리라”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미 성경을 아는 자들에게는 의아하고 한편으로 불편하게 들린다. 그리고 성경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먼저 성경을 아는 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행위로 얻는 구원을 지지하는 것처럼 들려서 의아하고 불편하다. 성경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서 절대 오해할 수 없도록 분명하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3:27–28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1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행하라”고 하셨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진리에 있어 일관된 가르침을 준다. 따라서 성경 해석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분명한 것으로 분명하지 않은 것을 해석하는 것이다. 서로 충돌하는 것 같은 말씀이 있다면 그 중 명확하게 의미를 전달하는 말씀 아래서 그렇지 않게 보이는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경우 로마서 뿐 아니라 성경 전반의 부인할 수 없는 가르침이다.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성경의 핵심 진리 중 하나가 바로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은혜)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우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 자체로 사실이다. 복잡하지 않다. 앞서 말한대로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영생을 얻는다. 그렇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그렇게 하면 된다는 말이다. 어느 한 순간 그런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 죽는 순간까지 일평생을 그런 상태로 산다면 그 사람은 영생을 얻는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만약 사람이 죄 없는 삶을 산다면 그 사람은 죄인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 필요하지 않고 당연히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그렇다.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우리는 결국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 그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다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그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를 보신다는 의미다. 예수님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셨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셨다. 그 온전한 행위를 하나님은 보시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면, 즉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서고 싶지 않다면, 스스로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면 된다.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 자체로 사실이긴 한 것이다. 율법교사는 자기가 말한대로 행한다면(행했고 행하고 있고 앞으로도 행해야한다) 살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불가능한 것은 예수님도 아시고 모든 사람(율법교사 포함)이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말씀을 그냥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을 과장해서 하신 것 정도로 이해하려고 한다. 성경을 모르는 자들은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려고 한다. 당연히 안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잘 안될 수도 있지만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서 영생을 주실거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매우 단순하고 명료하게 이를 행하면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진짜 사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정말로 그렇게 살아서 영생을 얻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율법교사가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 외에 다른 방법이 없음을 가르치시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통해 유일한 영생에 이르는 방법을 가르치시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영생에 이르는 방법은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다. 지금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언젠가는 영생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설령 어느 순간에 그런 완벽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고 해도, 이미 그 전에 수없이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영생을 얻을 수는 없다. 이 사실을 영생을 얻으려 했던 율법교사는 알아야 했고 인정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야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답이 맞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다시 질문하신 것이다. 여기까지 답은 맞지만 이것이 최종 답은 아니다. 이 사실에 기초하여 네가 내리는 최종 답안은 무엇이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냐, 아니면 할 수 없다는 것이냐?

도전

정답은 ‘할 수 없다’였다. 율법교사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했다.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했다. “주님,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노력했는데, 온전히 하나님만 사랑할 수 없었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최종 답안을 내놓아야 했다.

하지만 이 율법교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

이 사람은 자신을 옳게 보이고 싶어했다. 스스로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켰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을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안타깝지만 이 순간 이 사람은 ‘지혜롭고 슬기롭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그에게는 숨기운 사람’이었던 것이다(눅 10:21). 성경을 잘 알아서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지식적이었고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뿐, 정말 자신에게 그 지식을, 귀한 하나님의 진리를 정직하게 적용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를 좇고 있었다. 스스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된 것이다. 자신이 최소한 남들보다는 영생에 가깝다고 생각했겠지만, 그의 이런 교만은 그를 영생에서 한없이 멀어지게 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런 율법교사도 사랑하셔서 그를 깨우치시려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해주신다. 이 부분은 다음 주에 살펴보게 될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할 교훈은 이것이다. 진정 영생을 찾는다면 반드시 내려놓아야할 것은 ‘자기 의’라는 사실이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무언가 선을 행할 수 있고, 그것으로 좀 더 영생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허황된 상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 내 생각, 내 지식, 내 지혜를 버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한다. 우리 인생에 대한 해답은 우리 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 이 사실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