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2

본문: 시편 107편

설교자: 최종혁

 

스스로 경험하지 않으면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경험을 하고 같은 말을 해도 자기가 직접 해보고 나서야 배우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장점도 있지만, 결론이 너무나 명백한 경우에도 그렇게 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죄를 성경이 기록한 이유를 바울은 이렇게 설명했다.

고전 10:11–12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2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죄에 대한 결과가 이렇게 명백한데, ‘그건 그 사람들 얘기고 나는 다를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다. 그런데 그보다 더 어리석은 경우도 있다. 직접 경험하고도 배우지 못하는 경우다. 배우지 못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보는 사람을 답답하게 만든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후의 여정을 보면 그렇다. 그들은 정말 놀라운 일들을 경험했다.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그들을 인도하며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계심을 항상 드러냈다. 매일 내리는 만나와 해어지지 않는 신발과 옷은 기본이었다. 바위에서 물이 나오기도 하고 한달 동안 메추라기를 먹기도 했다. 그때 모세는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라며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회의적으로 말했지만, 하나님은 아무렇지 않게 그 일을 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마치 단체로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 듯,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복되는 원망과 불평은 읽는 사람의 자존감을 세워줄 정도다. ‘그래도 난 저 정도는 아닌 것 같아’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 정도’다. 배우지를 못한다. 특히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도 배우지 못하고, 실제 삶의 경험을 통해서도 배우지 못한다. 말씀을 통해 깨닫는 것도 그때 뿐이고, 삶의 경험에 대해서도 나에게 생긴 좋은 일에 대해서만 잠깐 감사할 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려 하지도 않고, 심지어 곧 잊어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지 못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시편 107편은 그런 사람들(우리)을 위한 시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그 분명한 가르침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으로서 자기 백성에게 그 선하심을 나타내기를 멈추지 않으신다. 이것이 1절에서 말하는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의 의미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4가지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행하신 일들을 통해 이 사실을 증명한다(4-32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이 말씀들은 그들이 경험했던 과거의 사건들을 기억나게 했을 것이다. 특히 출애굽과 포로기의 경험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더라도 여기 언급된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공감할 수 있도록 시편 기자는 특별한 사건을 지정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시편을 읽고 묵상하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신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일들을 기억할 수 있게 한다. 하나님께서 속량(구원)하신 일들이다.

삶에서 경험하는 크고 작은 구원의 경험들이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그 일들은 고난(역경, 어려움) 중에 있었던 일들이다. 구원에는 그런 고난이 전제되어 있다. 실제로 광야 사막에서 방황하지 않더라도 영적인 배고픔과 목마름도 이런 고난에 해당된다. 실제로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있지 않았더라도, 인생의 풍랑을 만났다면 그 경험도 여기에 해당된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 가운데 하나님은 자신을 그렇게 나타내신다. 특히 그런 고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셔서 건져주심으로 그렇게 하신다. 사람이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그에 응답하셔서 그 구원의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심을 확실히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할 때까지 상황을 악화시키기도 하신다. 마치 미디안과 싸우러 나가는 기드온에게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다”고 하셨던 경우와 비슷하다. 승리해도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고 스스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300명만 남기셨다. 그렇게 해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고 구원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바울이 간절히 기도했지만 그의 육체의 가시를 제거하지 않으셨던 이유도 동일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려하셨던 것이다. 질병이나 사고처럼 어려운 상황 덕분에 신앙을 회복하거나 혹은 구원을 받는 경우도 많다. 하나님은 고난 중에 구원하심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반응은 그 모든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 중요하지만, 이것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그 순간, 그 직후에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것은 합당한 반응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그것이 계속 이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을 찬양했던 그들의 입술은 곧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았다. 그것이 그들의 일상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 예배는 드렸지만, 그들의 일상(삶)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삶은 예배가 되지 못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들은 기쁨의 감정에 곧 반응했지만, 그 모든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 문제다. 물론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을 찬양했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감사했다.

15:11–13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12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13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 순간의 감정에 대한 반응이었을 뿐, 그들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했다. 하나님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삶도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도 비슷하지 않은가. 예배당에서의 우리와 삶에서의 우리가 다른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성경도 읽고 삶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험도 있지만, 그것을 통해 배우지는 않고 있는 것이다. 감사는 하고 찬양도 하는데, 하나님에 대한 지식(앎)이 깊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신앙인이 아니라 종교인으로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시편 107편의 최종 결론은 이렇다.

107:43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새번역 성경은 이 말씀을 좀 더 명확하게 이렇게 번역했다.

107:43 지혜 있는 사람이 누구냐? 이 일들을 명심하고, 주님의 인자하심을 깨달아라.

4-32절 말씀이 바로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명심”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33-42절 말씀이 그 모든 것들을 통해 깨달아야할 원리를 말한다.

원리(33-42절)

107:33–42 여호와께서는 강이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이 변하여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34그 주민의 악으로 말미암아 옥토가 변하여 염전이 되게 하시며 35또 광야가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이 변하여 샘물이 되게 하시고 36주린 자들로 거기에 살게 하사 그들이 거주할 성읍을 준비하게 하시고 37밭에 파종하며 포도원을 재배하여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시며 38또 복을 주사 그들이 크게 번성하게 하시고 그의 가축이 감소하지 아니하게 하실지라도 39다시 압박과 재난과 우환을 통하여 그들의 수를 줄이시며 낮추시는도다 40여호와께서 고관들에게는 능욕을 쏟아 부으시고 길 없는 황야에서 유리하게 하시나 41궁핍한 자는 그의 고통으로부터 건져 주시고 그의 가족을 양 떼 같이 지켜 주시나니 42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악한 자는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

33-34절은 하나님의 심판을 토양의 변화를 통해 묘사하는데, 이는 아마도 이사야에서 가져온 표현일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과 관련하여 이런 말씀을 하셨다.

42:15 내가 산들과 언덕들을 황폐하게 하며 그 모든 초목들을 마르게 하며 강들이 섬이 되게 하며 못들을 마르게 할 것이며

실제로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하셨다. 소돔과 고모라를 생각해 보면, 그곳은 물이 넉넉했고 여호와의 동산 같았다고 성경은 말한다(창 13:10). 롯이 아브라함에게서 떠날 때 그쪽을 선택했던 이유도 그곳이 풍요롭고 살기 좋은 땅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은 그곳에 유황과 불을 쏟으셨고, 소돔과 고모라는 폐허가 되었다. 가장 살기 좋았던 곳이 순식간에 아무도 살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모세도 이스라엘이 불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내리실 재앙에 대해 말하면서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

29:23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에는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함이 옛적에 여호와께서 진노와 격분으로 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음을 보고 물을 것이요

소돔과 고모라가 이렇게 되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원하시면 언제든 이렇게 하실 수 있다. 한 도시 뿐 아니라 전지구라도 그렇게 만드실 수 있다. 노아의 홍수가 이를 말해 준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강을 찾아 다니고 샘을 찾아 다닌다. 사람이 사는데 있어 물이 그렇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에덴 동산의 풍요로움에 대한 묘사에서도 강이 빠지지 않는다(창 2:10). 사람들은 그렇게 좋은 땅을 찾아다니고, 그런 땅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옥토조차도 순식간에 아무 것도 경작할 수 없는 염전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이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35-38절이 말하는 풍요로운 삶(환경)도 언제든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주실 수 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셨다.

41:18 내가 헐벗은 산에 강을 내며 골짜기 가운데에 샘이 나게 하며 광야가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이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하시면서 하나님께서 확실히 보여주셨던 것도 이것이었다. 엘리야 때에도 하나님은 비도 이슬도 없게 만드셨다가, 바알 선지자들과의 싸움에서 엘리야가 승리한 후에 큰 비를 내리기도 하셨다. 비가 오고 비가 오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 달린 일인 것이다.

사람들은 ‘물이 있는 곳’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런 곳이 거주할만한 성읍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삶에 있어 필수요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광야에 있든 강옆에 있든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중요하다. 하나님과 함께 있다면 그곳이 곧 풍요로운 땅이고, 거주할 성읍이 되는 것이다. 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삶에 있어 필수요소다.

하나님은 땅과 물에 대해서만 이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39-41절은 하나님이 사람에 대해서도 이렇게 하시는 분이심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수를 줄이기도 하고 늘리기도 하신다. 사람을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신다. 사람에게 고통을 주기도 하시고 고통에서 건지기도 하신다.

40절의 표현은 욥기 12:21-24에서 발견되는 표현이지만, 이런 개념에 대해서는 한나의 노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삼상 2:6–10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8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9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10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토양의 상태가 변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듯, 사람이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가난하게 되고 부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이다.

33절부터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자. 이런 일들은 역사를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일들이지만, 한 사람이 경험한 일들이라고 가정해 보자. 하나님께서 그가 살던 풍요로운 땅을 광야가 되게 하셨다. 그리고 다시 그곳에 강이 흐르고 샘물이 나오게 하셨다. 그래서 그 땅에서 풍요를 누리며 번성할 수 있게 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고난을 주셔서 그를 낮추셨다. 고통 가운데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건져 주시고 다시 높이셨다.

굴곡이 있는 삶이다. 누군가는 이런 삶에 대해 참 인생이 기구해서 이런저런 일을 겪는다고 말할 것이다. 누군가는 그냥 사람 사는게 다 그렇지 뭐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끝에 가서는 이렇게 될 것이다.

107:42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악한 자는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

결국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기뻐할 사람이 있고, 그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할 사람이 있다.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서는 어쩌면 반대였을 것이다. 사악한 자가 할 말이 많고 정직한 자가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사악한 자는 선하고 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면 왜 이런 악한 일들이 일어나느냐고 소리를 높였을 것이다. 최소한 하나님 믿는 사람에게는 그런 일이 없어야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정직한 자는 할 말이 없었을지 모른다. 현재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그 말에 반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자신도 때로 의심하며 같은 질문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변하지 않는 사랑)을 경험했을 것이고, 그 인자하심을 통해 그 믿음을 지키고 끝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었다. 광야가 못이 되기도 하고 못이 광야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때로는 자기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기도 했을 것이고, 때로는 대적들로 인한 환난을 겪기도 했을 것이다. 때로는 이유를 모른채 어려움을 겪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의 끝에 결국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경험하고, 마침내 그 모든 일들을 보고 기뻐하며 자랑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을 부정하며 보이는 것만을 따라 산 사람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그 입을 봉하게 될 것이다. 더 이상은 할 수 있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평생을 부인했던 진실을 마주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영원히 낮추실 것이고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행하시는 일들을 보면서 깨달아야 할 삶의 원리다.

교훈(43절)

그리고 이 원리는 우리에게 궁극적인 교훈을 준다.

107:43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깨달아야하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 특히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깨닫고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마찬가지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시편 기자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변하지 않는 사랑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욥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주권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은 아니었다. ‘절대신’에 대해서는 고대 사람들이라면 익숙한 개념이었다. 하지만 그 신이 자기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은 생소한 개념이다. 그래서 욥기에서 그 많은 논쟁이 오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절대신은 잘하면 복을 주고 잘못하면 화를 주는 존재였지 그 이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지 ‘절대신’이 아니라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을 그렇게만 이해하면 안됐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계실 뿐 아니라 자기 백성을 언제나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했다. 그래서 시편 107편이 강조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어떤 일들을 하셨다는 것보다,  백성들이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들을 건져주셨다는 사실이다. 그 고통이 무엇으로 인한 고통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몇번을 부르짖었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 인자하심을 버리지 않으셨고 그 백성을 구원하셨다. 이 작은 구원들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인자하심을 증언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궁극적인 구원을 소망하게 한다.

그러니 결국 이런 하나님의 일을 보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깨닫는 자가 지혜로운 자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그런 하나님께 인생을 거는 사람이 지혜로운 자다. 물이 많아 풍성한 소출을 거두는 땅에 소망을 두는 것은 어리석다. 역세권이나 사거리에 위치해서 투자하기 좋은 건물에 소망을 두는 것도 어리석다. 세상의 명예나 권세에 소망을 두는 것도 어리석다. 재물에 소망을 두는 것도 어리석다. 자녀에게 소망을 두는 것도 어리석다. 그 모든 소망이 무너지고 하나님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될 때가 올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 인자하심으로 그 백성을 인도하실 흔들리지 않는 나라에 소망을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하실 하나님께 참된 소망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소망 가운데 지금을 사는 것이 정말 지혜 있는 사람이다. 고난이 있어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변하지 않음을 믿고, 지금을 인내하며, 구원에 감사하는 사람이 참된 지혜를 소유한 사람이다.

도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심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처한 상황을 바꾸신다. 광야가 샘이 되기도 하고 샘이 광야가 되기도 한다. 푸른 풀밭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되기도 하고 그 반대의 일도 일어난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일을 결과로 생각하는 것과 과정으로 생각하는 것은 삶을 바라보는 태도를 전혀 다르게 만든다. 집을 짓기 위해 벽돌을 나르는 과정을 결과로 보면 굳이 그런 힘든 일을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집을 짓기 위한 과정으로 보면 힘들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집을 짓는 것이 평생의 꿈과 같은 것이었다면 그 힘든 일을 기쁨으로 할 수도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배운 것처럼 남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결과로만 보면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사랑을 더 깊은 친밀함, 하나됨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보면 사랑할 수 있다. 하나됨의 기쁨을 안다면, 지금 어려운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일들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과정 중에 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그 경험하는 모든 것에 일희일비할 수 밖에 없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것이다. 다르게 반응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과정이라면, 그리고 그 결과가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좋은 것이라면, 우리는 그 모든 과정에서 기뻐할 수 있다. 마지막 결과에서 느낄 기쁨도 당연히 있지만, 그 전에 과정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결국 하실 일에 대해서 기뻐할 뿐 아니라, 지금 하시는 일을 보면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면서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서 날마다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신다. 궁극적인 영혼의 구원에 비하면 어쩌면 작은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이 모든 일들이 기적이며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 모든 기적들은 하나님이 인자하시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이런 면에서 성경을 공부할 뿐 아니라 내 삶도 공부해야 한다. 그냥 살면서 힘든 일있을 때 기도하고 좋은 일 있으면 감사하고, 그렇게만 할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이 계속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지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나에게 그 인자하심을, 그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를 여러 모습으로 보여주고 계시다. 그것을 내가 볼 수 있을 때 제대로 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입술의 예배 뿐 아니라 삶의 예배는 그렇게 드려진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3절, “많은 위험과 고생, 유혹을 지나 나는 결국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 이 순간까지 안전하게 이끈 것이 은혜이고 이 은혜가 나를 본향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들을 보면서 우리가 배워야할 지혜이다. 지금도 많은 위험과 고생, 유혹 가운데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본향으로 인도하고 계신지 의심스러울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정말로 인자하신지 모르겠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여기까지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셨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이 계신 본향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지금 나는 그 과정 중에 있다. 이 지혜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