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언약의 말씀, 언약의 삶(6)

본문: 시편 119편

설교자: 최종혁

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33-40절)

 

기도에는 여러 요소들이 있지만(감사, 찬양, 회개, 중보 등), 그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간구’, 즉 구하는 기도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하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기를 위해 구해 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서 하나님께 구할 때가 많다. 만약 내가 지금까지 기도한 내용을 모두 기록한 종이 같은 것이 있다면, 그 안에 어떤 내용들이 적혀 있을까? 내용 자체가 별로 없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식사에 대한 감사만 잔뜩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려움 중에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 어떤 필요를 채워주시기를 구하는 기도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기를 구하는 기도가 얼마나 있느냐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린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기를 구하는 그런 기도를 많이 하지 않는다. 어쩌면 거의 하지 않는 것 같다. 왜 그럴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은 그냥 내가 해야할 일로만 생각해서 그럴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하는건데,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이 뭔가 논리적으로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라고 하신 일이니 그냥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의무나 책임으로만 느껴서 기도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행위인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의 범주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구하지 않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생각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은 사실 (구원 받은)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오늘 본문은 모든 구절이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시작인 33절은 기도의 대상을 부르는 말인 “여호와여”로 시작된다. 그리고 40절을 제외한 모든 구절이 ‘하나님 저에게 이렇게 해주십시오’라는 간구로 시작된다. 40절은 “보라”(생략됨)로 시작되어 33-39절에 대한 결론임을 말해준다. 이 결론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의 안에서 살기를 원하고 있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한다고 말한다.

119:40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참된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구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사모한다. 기다린다. 간절히 원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태도다. 우리가 그렇게 바라는 ‘영생’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의미하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요일 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따라서 정말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생을 누리는 삶을 원한다면,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은 하라고 하니까 해야할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정말로 가장 원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런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의 소원을 오늘 본문 말씀에서 볼 수 있고, 그 마음의 소원은 시편 기자의 기도의 이유와 내용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119편의 제 5연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기도인데, 총 9개의 아주 ‘적극적인 간구’가 기록되어 있다. 이 간구가 ‘적극적’인 이유는 모든 기도에 직접적으로 자신을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33절 내게 가르치소서”, 34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35절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36절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소서”, 37절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소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38절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 39절 “내가 두려워하는 비방을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40절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가 간구의 내용이다.

시편 기자는 마치 하나님께 할일목록을 드리듯이 ‘하나님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라는 내용의 기도를 쏟아내는데, 그 내용은 자신과 관련되어 있고 자신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즉, 이 기도들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주시면 제가 이렇게 해보겠습니다’가 아니라, ‘하나님 제가 이렇게 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이렇게 해 주십시오’라는 태도에서 나온 기도들이다. 정말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기 때문에 드리는 기도이고, 동시에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기 때문에 드리는 기도다.

기도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33-34절은 “가르치소서”, 35-37절은 “지키소서”, 그리고 38-39절은 “세우소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40절은 이 모든 기도를 포함하는 마무리 기도다.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기 원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기도를 드려야하는지 함께 배워보자.

가르치소서(33-34절)

119:33–34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34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나를 가르치소서’가 시편 기자가 가장 먼저 구한 내용이다. 33절에서는 “주의 율례들의 도”, 즉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길을 가르쳐달라고 구했고, 34절에서는 그것을 깨닫게 하여 달라고 구했다. 그는 바로 앞 연의 기도에서도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넓혀주셔서 마음껏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기를 원하는 마음을 표현했었다(32절).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올바른 선택을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문이나 의심은 전혀 없다. ‘하나님 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라고 따지듯이 묻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필요한 말씀을 이미 주셨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24절에서 이미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니이다”라고 고백했었다. 96절에서는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라고 하나님 말씀의 충분성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도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부족한 듯이 다른 말씀을 달라고 구하지는 않는다. 혹은 좀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다시 말씀해 달라고 구하지도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잘 아는 것이다. 잘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충분한 말씀은 명료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그냥 다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찰스 브리지스는 “사람의 시력이 망가져 있으면 아무리 밝은 빛을 비추어도 사물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소경은 대낮에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영적으로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라며 이 기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문제는 말씀에 있지 않다. 명료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어리석음과 죄악됨이 문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여러 잘못된 생각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고 오해하게 만든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게 가르치소서”라고 구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셔야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다.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라는 기도도 같은 맥락에 있다. 남들에게는 없는 무슨 대단한 통찰력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말씀의 의미를 그대로 이해할 수 있기를 구하는 기도다. 이런 의도를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렇게 기도하는 목적에 대한 언급이다. 시편 기자는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께 말씀을 가르쳐 달라고, 깨닫게 하여 달라고 구하고 있다.

단순한 지적인 호기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원하는 것이 아니다. 시편 기자는 말씀을 지키기 원해서 배우기 원한다. 여기서 그가 ‘말씀’을 지칭하는 단어로 선택한 것은 “율례”“법”이다. 율례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구속력과 지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다. 법은 가르침으로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가르쳐 주신 삶의 원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지킬 것을 요구하기도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기도 하다. 시편 기자는 말씀의 그런 특성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지키기(순종하기) 위해 말씀을 배우기 원한다.

말씀을 지키는 것에 대해 시편 기자는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끝까지”, “전심으로” 자신이 배우는 말씀을 지킬 것을 말한다. “끝까지”는 삶의 끝까지, 즉 평생을 의미한다. “전심으로”는 최소한의 순종이 아닌 최대한의 순종을 의미한다. 순종의 정도는 ‘최대한’이고 순종의 길이는 ‘평생’인 것이다. 그렇게 하려고 말씀을 배우기 원한다.

말씀을 배우면 그만큼 순종해야한다는 생각에 죄책감만 커져서 차라리 배우지 않는 것이 나은 것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참 흥미로운 말이다.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순종하고 싶다는 마음은 없고, 순종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된 하나님의 자녀라면 여기 시편 기자처럼 순종하기를 원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더 배우기를 원해야 한다.

순종하기 위해서 대단한 신학적 지식이나 남들에게는 없는 통찰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신학자들이 최고의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당연히 지식이나 깊은 이해가 도움이 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이다. 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무엇이든 끝까지 전심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다. 안다고 다 순종하는 것은 아니지만, 알지 못하면 아예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많은 지식이나 깊은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올바른 지식은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혼자서 그렇게 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알게 하지 않으시면 성경 말씀의 참된 의미와 의의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내게 가르치소서”,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라고 구한 것이고, 우리도 마찬가지로 같은 기도를 해야 한다.

지키소서(35-37절)

이어지는 35-37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원하는 마음이 더 잘 표현되어 있다. 35절은 그 마음이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36절과 37절에는 순종을 위해서 시편 기자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시편 기자가 사용한 이미지는 우리 몸의 지체다. 발, 마음, 그리고 눈이다.

먼저 35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119:35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행하게 하소서”는 “길”에 해당되는 명사가 동사형태로 사용되어서 ‘걷게 하소서’라는 의미가 된 것이다. 그의 로 걷고 싶은 길은 바로 주의 계명들의 길이고, 그렇게 할 수 있게 하여주시기를 하나님꼐 구하는 것이다.  앞서 시편 기자는 마치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만 하시면 자신은 끝까지 전심으로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 수 있을 것처럼 기도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현실이 그렇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가능한 일이기에,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나님의 길로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구한다.

그런데 한가지 확신하는 것은 있다. 바로 그가 하나님의 길을 즐거워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길을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그 길을 가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닌 것이다. 때로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것이 어렵다는 이유로, 즉 그 길로 잘 행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정죄하고 죄책감에 빠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것 때문에 회개하고 괴로워하는 자신을 보면서 구원의 확신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애초에 이 길은 쉬운 길이 아니다. 나그네로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 시편 기자처럼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느냐다.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무엇을 즐거워하는지가 중요하다. 감정에 대한 말이 아니라 그 마음의 우선순위에 대한 말이다. 무엇을 더 원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기도 하고 또한 어떤 사람이 될지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길로 온전히 행하고 있지 못해서 회개하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한다면, 오히려 그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길을 즐거워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런 괴로움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기 길로 행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괴로움을 느낀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시편 기자는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길로 걷기 위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언급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먼저는 그 마음을 지켜달라는 기도다. 결국 그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그 발이 가기 때문이다. 한 두번은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에는 마음이 원하는 곳으로 우리는 발걸음을 옮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다.

119:36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

여기서 ‘-로 향한다’는 표현은 그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의미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마음은 탐욕으로 기울어져 있다. 여기서 탐욕은 기본적으로는 ‘이익’을 의미하지만, 많은 경우에 부정적으로 사용되어 부당하게 혹은 강압적으로 차지한 이익을 의미한다.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면서까지 그렇게 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은 기울어져 있다.

실제로 성경에도 그렇게 마음이 탐욕을 향했던 사람들이 있다.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아간은 자신의 탐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도둑질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훨씬 수월할 수 있었던 아이 성 정복에는 실패하고 말았었다(수 7장).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너무나 원해서 근심하며 식사도 거부할 정도가 되었었고, 결국 그의 아내인 이세벨이 꾀를 내어 나봇을 죽이자 기쁜 마음으로 그 포도원을 차지했었다(왕상 21장). 신약으로 와서 보면 돈을 사랑했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다(마 26장). 큰 부자였던 청년은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났었다(마 19장). 베드로에게 거짓말을 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들의 마음이 탐욕으로 향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행 5장).

사실, 이 사람들만 특별히 어리석은 선택을 했었던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 그냥 자기 마음을 따랐을 때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로마서 1장도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그냥 내버려 두셨을 때의 참혹한 결과를 잘 말해준다. 시편 기자는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자신하지 않았다. 남들은 다 자기 탐욕으로 향하는 성향이 있어 그릇 행할지라도, 자기는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마음도 그렇게 탐욕으로 향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

마음을 변화시키고 지키는 것도 결국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래서 다윗도 회개하면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구했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으시면 이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기준에서야 ‘천성이 착한 사람’, ‘원래부터 좋은 마음을 타고난 사람’이 있지만,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두 탐욕으로 향하는 마음이 있고, 따라서 하나님의 길로 행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향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필요하다.

이런 마음을 생각하자 시편 기자의 기도는 그 마음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119:37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결국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주의 길에서 사는 것인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내 눈이다. 내 눈이 자꾸 허탄한 것, 무의미한 것, 무가치한 것을 보려고 한다는 것이 문제다. 내가 보려고 하지 않아도 자꾸 내 눈에 그런 것들이 보인다는 것이 문제다. 우리가 그런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허탄하다고 하시는 것들을 실상이라고 하고 믿을 수 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무의미하다고 하는 것을 의미있다고 하고, 무가치하다고 하는 것을 가치있다고 한다.

윌리엄 템플이라는 주교는 이 세상이 마치 가격표가 뒤바뀐 물건들로 가득찬 가게와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무가치한 것에는 비싼 가격표가 달려 있고 정말 중요한 것들은 싸구려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사라질 것들은 귀하게 취급을 받고 영원에 속한 것들은 하찮게 취급 받는 것을 넘어서, 그런 것에 노력을 쏟는 것을 ‘광적’이라고 표현하여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더 좋은 집, 좋은 차를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 경력을 쌓아야 한다고 말한다. 집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남편을 돕는 일은 여자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남자가 자기가 번 돈을 모두 아내의 통장에 넣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 교회 쫓아다닐 시간에 열심히 공부해서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성공이라고 말한다. 결혼은 하지 않고, 혹시 하더라도 최대한 늦게 하는 것이 좋고, 솔로로서의 자유를 즐기며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한다. 이런 것들이 세상이 말하는 실체이고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허탄한 것,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복음을 전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이런 전제적 가치관을 깨는 것이다. 이 가치관이 깨지지 않으면 아무리 복음이 ‘좋은 소식’이라고 말해도 좋게 들리지 않는다. 아무리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말해도 그것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고, 하나님 안의 기쁨을 말해도 그게 왜 기쁜 것인지를 모른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가격표가 뒤바껴있고, 사람들은 그 가격표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원 받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허탄한 것을 모르고 보면 문제겠지만, 알고 보는데 문제될 것이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어차피 이런 세상에 살면서 그런 것들에 대해서 눈을 감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적당히 보고 적당히 즐기는 것은 괜찮은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찰스 브리지스, 174. “우리가 ‘허탄한 것을 따르지’ 않아도 ‘허탄을 보는 것’만으로도 해가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와가 금단의 실과를 “보았을 때” 그 실과를 따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땄을 때 먹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죄의 시작은 ‘물이 스미는 것’과 같습니다. 일단 물이 스밀 틈이 생기는 일이 계속 진행되면 그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무너뜨립니다.”

우리 마음에 대해서 교만한 자신감을 가지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눈에 대해서도 그렇다.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세상에도 있을 정도다. 무언가를 보면 그것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물론 대개는 마음이 먼저 있어서 그것을 보는 경우가 많기는 하다. 하지만 그럴 경우라도 계속해서 보면 그 마음이 커져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가질 수 없으니까 보는 것으로만 만족해야지’라는 생각으로 계속 보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고 어리석은 생각이다.

보는 것을 절대 과소 평가해서는 안된다. 사도 요한은 “안목의 정욕”이라는 표현을 따로 사용할 정도로 눈으로 보는 것으로 인한 유혹을 중대하게 생각했다. 욥은 자신의 눈과 언약을 세웠다고 말하기도 했다. 보는 것은 우리 마음에 영향을 주고, 그리고 그 마음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한다. 허탄한 것을 볼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길에서 멀어지고 그만큼 생명에서도 멀어진다. 성경에서 ‘허탄한 것’이 곧 ‘우상’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사실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세상의 허탄한 것을 원하는 것이 곧 우상 숭배다.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소서”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 제 눈을 지키시고, 제 마음을 지키시고, 제 발을 지켜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라면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세우소서(38-39절)

지금까지 “가르치소서”와 “지키소서”라는 간구를 살펴봤다. 마지막으로 38-39절의 간구는 “세우소서”인데, 여기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구한다.

119:38–39 주를 경외하게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 39내가 두려워하는 비방을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주의 규례들은 선하심이니이다

38절에서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라고 구한다. 여기 “말씀”은 “약속”을 의미하는 단어다. 그리고 “세우소서”는 무언가를 확실히 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시편 기자는 지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가 확실함을 알 수 있게 해달라고 종으로서 겸손하게 구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마음과 눈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연약함을 암시했던 것을 고려해보면, 아마도 여기서 구하는 것은 내적인 확신일 것이다. 이 세상 속에서 마음이 연약해 지고 혹 의심이 생길 수도 있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에 대한 확신을 구한다고 볼 수 있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구하는 것이다.

39절은 좀 더 외적인 확신을 구하는 기도다. 시편 기자는 실제로 지금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는 비방을 떠나게 하여 주시기를 구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규례가 선하심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39절의 표현을 보면 ‘그래야지만 하나님의 규례들이 선하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선하시다는 사실에 기초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객관적인 선도 나타내 보여 주시기를 구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 더 큰 확신으로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도에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말씀에 대해서 “주를 경외하게 하는 주의 말씀”이라고 표현한 부분이다(38절).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한 특징으로서 “선함”을 39절에서 말하는데, 그 선한 말씀은 결국 우리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목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많은 것들을 기대한다. 위로 받기를 원하고 교훈을 받기를 원한다. 분별력을 원하고 지혜를 원한다. 바른 길을 걸을 수 있는 힘을 원한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어야 한다. 말씀이 결국 나를 하나님 경외하는데까지 이끌어 가지 못한다면, 나는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닌 것이다. 아무리 말씀을 많이 알게 되었어도 그렇다. 아무리 말씀에 따라 많은 봉사를 하고 헌신을 해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실제적인 결과를 만들어 낸다. 궁극적으로 말씀은 나를 더 겸손하게 하고 하나님을 높이며, 그 하나님을 경외하여 순종하고 싶게 우리를 변화시킨다.

우리는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라고 구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해달라고 구하고, 나를 다른 거짓의 유혹으로부터 지켜 달라고 구한다. 그리고 말씀에 대한 확신을 구한다. 그렇게 구할 때, 결국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게 되는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가 바라는 바가 되어야 한다.

도전

하나님의 길을 걷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이 길에 분명 어려움이 있지만,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길을 걷기 원해야 한다. 끝까지 진심으로 그렇게 하기를 원해야 한다. 그냥 ‘그렇게 살긴 해야죠’라는 식의 태도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면 이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가끔 생각날 때마다 한번씩 할 기도가 아니라 매일의 기도도, 매순간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면서 이 기도들에 내포되어 있는 바도 잊지 말아야 한다. 시편 기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무엇을 해달라고만 구하고 있지 않다. 배울 생각이 없으면서 가르치소서라고 구하지 않는다. 그 길로 걸을 생각이 없으면서 걷게 하소서라고 구하지 않는다. 마음을 탐욕에 내버려 두고서 그 마음을 주의 말씀으로 향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그 눈으로 허탄한 것을 주목해서 보면서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그는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에 따라 살기를 원한다. 진정한 삶을 원한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그냥 “하나님 이렇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하나님, 제가 이렇게 할 수 있게 도와 주십시오.”다. 간구이면서 동시에 그렇게 살겠다는 결단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고 우리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진실된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