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언약의 말씀, 언약의 삶(3)

본문: 시편 119편

설교자: 최종혁

 

베트: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9-16절)

지난 말씀에서 우리는 본성적으로 복을 원한다는 얘기를 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런 존재로 창조하셨다. 우리는 복을 원하고 하나님이 바로 그 복이 되시는 것이다. 그래서 1-8절(알레프)에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는 일반적인 삶의 원리를 제시했다. 하나님이 복이시고 우리에게 모든 복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이 복 있는 삶이다. 그것이 여러 복 있는 삶 중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복 있는 삶이다.

오늘 본문인 9-16절은 우리가 이런 복을 누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나를 행복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은 외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가정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거나, 내가 가지고 싶은 무언가를 가질 수 없는 환경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교회나 하나님이 내가 행복해지는 것을 방해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행복을 근본적으로 방해하는 것은 우리 밖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다. 바로 ‘죄’다. ‘죄’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깨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복이신 하나님을 등지고 멀어지게 하는 죄가 바로 우리의 행복을 방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우리로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하셨다는 복음은 정말로 복음이다. 그 자체로서 복된 소식이기도 하고 또한 참된 복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에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을 통해 복이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죄는 여전히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다.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끊어지지는 않지만 관계의 친밀함은 잃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은 행복에서도 멀어진다는 의미가 된다. 죄가 행복을 방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자는 죄와 싸운다. 그 삶에 죄를 그냥 용납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들 삶의 가장 분명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성화’라 하고, 오늘 본문이 바로 이 성화에 대한 말씀이고 그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를 위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에서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의 올바른 태도와(9-12절) 올바른 노력(13-16절)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음을 배울 수 있다.

올바른 태도(9-12절)

119:9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여기서 “청년”은 시편 기자 자신을 직접적으로 지칭하는 표현은 아닐 것이다. 여기 사용된 표현은 어린 소년에서 부터 아주 젊은 청년을 지칭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시편 119편을 읽어 보면 저자는 그런 젊은 사람이라기 보다는 경험이 많고 영적으로도 성숙한 어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청년”은 일반적인 원리를 제시하기 위해 선택한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행실을 깨끗하게 해야할 필요가 가장 큰 청년의 경우를 통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를 통해서만 거룩해 질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청년이라도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하려면 주의 말씀을 지키는 방법 밖에 없다.

청년은 왜 행실을 깨끗하게 할 필요가 클까? 그들이 처한 상황의 위험성과 중대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의 위험성은 그들이 행실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게 만드는 많은 방해물에 대한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청년의 때는 죄의 유혹이 여러 면에서 더 크다. 부모의 보호 아래 있다가 조금씩 벗어나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다. 경제적으로도 조금씩 독립을 추구한다. 전보다 훨씬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경제적으로, 관계적으로, 여러 면에서 자유로워지고 그 자유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이런 마음을 세상은 너무 잘 알아서 그들을 죄로 이끄려고 한다. 죄를 누리는 것이 자유이고 해방인 것처럼 속인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인생에서 큰 손해를 보는 것처럼 속인다. 이 거대한 흐름을 거부할 수 없게 만든다. 특히나 교회 안에서 자란 청년들이 이런 거대한 흐름에 속절없이 떠내려 가는 경우들도 상당하다. 교회에서 배운 것들이 맞고 그래서 세상의 대부분도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실제로 접하면서 가치관이 무너지는 것이다. 교회가 상식이고 세상이 비상식인 줄 알았는데 막상보니 안그런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동성애를 거부하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고, 혼전순결을 지키는 내가 천연기념물이다. 또래와의 관계가 중요한 청년들에게는 ‘행실을 깨끗하게 하기가’ 너무 어렵고 힘든 상황인 것이다.

상황의 중대성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청년 때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인생에 있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삶에는 ‘습관’이라는 것이 있다. 단순히 어떤 행동을 반복하는 버릇 같은 것도 있지만, 좀 더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습관이 있다. 잠 자는 습관, 먹는 습관 같은 것들이 그럴 것이다. 말하는 습관도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습관적으로 부정적인 표현을 하거나 혹은 남을 낮추는 표현을 사용해서 관계의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신앙에도 습관이 있다. 히브리서 10:25는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에 대해서 말한다. 이런 습관은 아마 처음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히브리서의 배경을 생각해 보면 주변의 박해가 이유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습관이 되면 이유가 없어도 습관에 따른다. 이유가 있어서 모이지 못했던 것이 이제는 그냥 모이지 않는 것이 되는 것이다.

죄도 ‘습관’처럼 범하는 죄가 있다. 죄가 습관이 되면 본인은 그 심각성을 알지 못하거나 심지어 그게 죄라는 사실도 잊게 된다. 거짓말이 습관이 되고 자기 변명이 습관이 된다. 남을 미워하는 것도 습관이 되고 음란한 생각을 하는 것도 습관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범하는 많은 죄들이 날마다 새로운 것이기 보다는 습관처럼 범하는 죄들이기 쉽다.

청년의 때는 앞서 말한 것처럼 독립(자유)의 시기이고 신앙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자기 신앙”을 세우는 시기다. 그리고 이 때 만드는 신앙의 습관이 매우 중요하다. 9절에 사용된 “행실”이라는 단어는 1절의 “행위”와 비슷하게 “길”이라는 의미인데, 성경에서는 거의 비유적으로만 사용되어서 “삶”을 의미한다. 길은 ‘걸어가는 곳’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거기에 내포된 또 다른 의미는 그 길을 따라가면 어떤 장소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가 그 운명을 결정한다.

청년 때의 ‘행실’이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이 습관이 되어 앞으로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습관을 만들어야 하고 나쁜 습관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좋은 습관은 계속해서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하지만 나쁜 습관은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잘 이어진다는 사실도 기억하고, 특히 나쁜 습관이 나에게 생기지 않았는지 주의해야 한다. 좋은 자세로 앉는 것은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하지만, 나쁜 자세로 앉는 것은 너무 쉽다. 차를 앞으로 가게 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연료를 사용해야 하지만, 멈추기 위해서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 좋은 습관은 만들기 어렵지만 나쁜 습관은 너무 쉽게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청년의 때에 이런 영적인 습관에 주의하지 않으면, 어느새 내가 별로 원하지 않았던 모습이 되어 있게 된다. 내가 선택한 길이 나를 그곳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중요하고 위험한 청년의 시기에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하는 것, 정결하게 하는 것, 하나님과 같은 거룩함을 추구해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하는 것, 그래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보여주신 길이 유일한 길이다. 필요가 많은 청년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하니, 다른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분하다.

당연히, 세상의 것들은 우리를 더욱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못한다. 그럴 가능성이 없다. 세상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여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할 뿐이다. 야고보는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약 4:4). 세상에 속한 것이 나를 더욱 거룩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를 거룩하도록 돕는 것들은 많다. 주변의 좋은 신앙인들이 분명 그렇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런 사람들을 주의하여 보고 본받을 것을 권하기도 했다(히 6:12; 13:7). 좋은 신앙 서적, 찬양도 분명 도움이 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 좋은 사람, 좋은 책, 좋은 음악 등은 말씀이 없다면 사실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더구나 이 모든 것들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그 시대의 사람들을 거룩하게 할 수 있다.

9절 말씀이 제시하는 원리는 분명하다. 거룩한 삶을 위한 어떤 영적 필요가 있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채운다는 것이다.

17: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 다른 무엇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 도움은 얻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면 마치 나의 신앙 생활이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내 신앙이 무너질 것처럼 의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정결한 삶을 살 수 없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모든 것들 위에 있는 권위이며 우선순위이다. 따라서 내가 의존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말씀이다. 내가 생명으로 여기고 의지해야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간절함과 사모함은 바로 여기서 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여담일 수 있지만,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말씀을 읽고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마치 아이가 태어나면 처음에는 부모가 모든 것을 해주어야 하지만 성장해 가면 스스로 음식을 먹는 것처럼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성장해도 부모의 도움이 필요한 면이 있다. 아이가 먹고 싶은대로 두면 아이는 영양이 아닌 입맛에 맞는 것만 먹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스스로 잘 먹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분업화된 세상에 살면서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말씀은 은사 있는 사람들이 잘 연구해서 가르쳐주면 그거 잘 들으면 된다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안된다. 그것이 중요한 부분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 안에 그런 가르치는 은사자들을 세우시지만 그들에게만 의존해서는 안된다.

유평교회가 어떤 면에서는 듣기 어려운 강해 설교를 계속해서 하는 이유 중 하나도 이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하는 것이 첫째 목적이지만, 또 다른 목적 중 하나는 성경을 어떻게 읽고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는지를 계속해서 보여주기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성도들 각자가 성경을 읽을 때도 그렇게 읽고 해석하고 적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삶을 깨끗하게 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우리의 행실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거룩하게 하기 때문에 시편 기자는 자연스럽게 말씀에 대해서 이런 태도를 보인다.

119:10–12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11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12찬송을 받으실 주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먼저 10절에서 저자는 이 모든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을 언급한다. 거룩한 삶의 목적은 그것으로 어떤 사람들을 감동시키거나 그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명에서 떠나지 않기 원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기 원해서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원해서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 친밀함을 누리기 원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궁극적인 이유다.

그래서 11절에서도 “주께 범죄하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죄’가 문제인 이유는 그 궁극적인 대상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 어떤 죄도 하나님과 관계 없는 죄가 없다. 그래서 다윗은 밧세바와 우리아에게 범한 죄를 회개하면서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적에 악을 행하였사오니”라고 고백했던 것이다(시 51:4). 사람에게 범한 죄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를 가져왔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기도 했다.

51:11–12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편 119:8에서 저자가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한 것과 같은 맥락에 있는 기도다.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를 가져왔기 때문에, 다윗은 그 회복을 이렇게 구했던 것이다. 여기 시편 기자가 범죄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11절에는 특히 중요한 표현이 나온다. 저자는 하나님의 계명에서 떠나 범죄하지 않기 위해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고 말한다. 여기 “두었나이다”라는 번역은 조금 아쉽다. 이 맥락에서 이 단어는 그냥 어떤 물건을 어디 둔다는 의미 이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한국어 번역 성경들은 “(깊이, 고이) 간직합니다”를 많이 사용했다. 때로 이 단어는 “숨기다”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귀한 것을 안전한 장소에 보관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고 마음에 간직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단지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에 담아두기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특히 성경에서 “마음”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기관을 의미하기 때문에,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무엇을 결정하고 판단하고 그에 따라서 행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게 할 때 주께 범죄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예전에 영어 단어 외우면서 사전을 찢어 먹듯이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실제로 어떤 노력을 했는지는 13-16절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시편 기자의 태도다. 그는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에 따라 살고 싶었다. 거룩하기 원했다.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기 원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12절의 기도를 한다. “찬송을 받으실 주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을 깨닫는 것도 불가능하고, 말씀을 마음에 두는 것도 불가능하고, 말씀에서 떠나지 않는 것도 불가능하다. 행실을 깨끗하게 할 수 없고 주께 범죄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 합당한 찬양을 드리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삶에 죄가 있는 것이 괜찮을 수 없다. 정말로 구원 받은 사람, 영생을 가진 사람이 원하는 것은 죄가 없는 삶이 되어야 한다. 단순히 그렇게 해야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원하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죄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죄는 지을 수 있는 것이고 지어도 괜찮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죄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이 정상이다.

우리가 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는 말은 죄가 좋은 것이라는 의미도 아니도 죄를 지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런데 마치 그런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죄 없는 완전한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은 죄에 대한, 그리고 그 죄를 버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것은 9절 시작과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 제가 어떻게 저의 행실을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요?”라고 하나님께 묻느냐는 것이다. 나의 행실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있느냐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젊은 사람에게는 왜 지금 그렇게 살아서 삶을 낭비하려고 하냐고 묻는다. 그래서 무슨 삶의 낙이 있겠냐고 말한다. 지금 즐기지 않으면 나중에 즐길 수 없다고 한다. 어차피 시간 지나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들은 지금 하고, 거룩한 삶 같은 것은 나중에 신경쓰면 된다고 한다. 어차피 때가 되면 그렇게 살게 될 것이라고 한다.

나이 든 사람에게는 뭐라고 하는지 아는가? 어차피 늦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변화되겠다고 하냐고 한다. 그냥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적당히 살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이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되어서는 안된다. 나이가 몇이든지 우리는 여전히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 “하나님, 제가 어떻게 저의 행실을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요?”라고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 말씀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그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시편 기자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자.

올바른 노력(13-16절)

119:13–16 주의 입의 모든 규례들을 나의 입술로 선포하였으며 14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15내가 주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길들에 주의하며 16주의 율례들을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먼저 13절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모든 규례를 선포하였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이 또한 나의 입에서도 나온 것이다.

언젠가 청년들에게서 성경을 공부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 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생각해 보니 제일 좋은 것은 설교를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설교를 준비하고 전하는 모든 과정이 나의 영적인 삶에 있어 가장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입술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여러 면에서 말씀에 따라 사는데 도움을 준다. 말씀을 읽고 바르게 해석하는 것 뿐 아니라, 실제로 나도 그 말씀에 따라 살고 있어야(최소한 그런 노력을 하고 있어야) 말씀을 선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꼭 앞에 나와서 설교하지 않더라도,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은 나에게 가장 먼저 유익이 되는 일이다.

다음으로 14절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선순위를 두었다고 말한다. 사람은 자기가 즐거워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는데, 시편 기자는 재물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그러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왜 재물을 즐거워할까? 돈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음식처럼 내 입을 즐겁게 해주지 않는다. 음악처럼 내 귀를 즐겁게 해주지 않는다. 칭찬처럼 내 마음을 즐겁헤 주지 않는다. 돈 자체는 그저 종이일 뿐이다. 그나마 재밌는 글이 써져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 위에 무슨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돈을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 하는 이유는 그것으로 정말 자신이 즐거워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궁극적인 즐거움을 사실 돈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임을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즐거워했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성경은 말한다(히 11:26). 다니엘을 생각해 보면, 그는 모든 것을 잃을 것을 각오하고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을 정결하게 했던 것도 볼 수 있다. 재물보다 하나님을 더 귀하게 여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다니엘과 같은 경험을 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즐거워하고 삶의 우선순위에 둘 수 있었을까? 우리에겐 그런 경험이 없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지 못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반대로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에 우선순위를 두면 말씀이 주는 즐거움을 우리는 경험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말씀을 삶의 우선순위에 둘 수 있을 것이다. 음식이 맛있는지는 먹어봐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다. 내가 말씀을 먼저 우선순위에 두면 그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15-16절은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일반적인 노력일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연구하는 것이다(“주의 길들에 주의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주의 깊게 읽고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계속해서 되뇌이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삶에서 잊지 않고 계속해서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이렇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암송이다. 어느덧 암송은 주일학교와 모친님들의 전유물이 된 것 같지만, 성경 암송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다.

앞서 말한 것처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의 책임이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는 경우는 사실 성경에서 그리 많지 않다. 특히 거룩함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있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자원을 주시고 우리에게 그 거룩함을 추구하며 이루어가라고 말씀하신다. 그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도전

하나님 말씀의 필요성에 대해서 물으면 부정적으로 답할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말도 한다. “중요한 건 아는데, 시간이 너무 없어요.” 이게 논리적으로 맞는 말일까? 이 말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그만큼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고, 그만큼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내 시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점검해 봐야 한다. 그것들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만큼 중요한 것인지, 그것들이 나의 행실을 정결하게 하는 것인지, 하나님께로 이끄는 것인지 점검해 봐야 한다.

특히 죄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면서, 그로 인해 좌절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가장 강력한 무기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모순적인 행동이다. 싸움에서 이기고 싶어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거룩을 추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긴다. 성경책을 집안 금고에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헤어지고 낡도록 읽어서 마음의 금고에 보관한다. 그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119:9–16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10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11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12찬송을 받으실 주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13주의 입의 모든 규례들을 나의 입술로 선포하였으며 14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15내가 주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길들에 주의하며 16주의 율례들을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