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

본문: 요한계시록 14장 1-5절

설교자: 조정의

예수님은 참 제자를 알곡, 거짓 제자를 가라지로 분류하셨다. 추수 때에 알곡은 곳간에 넣고, 가라지는 불사를 것이라고 하셨다(마 13:24-30). 대환난 때, 적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가장 뚜렷하게 일어날 일이 바로 알곡과 가라지의 구별이다. 거짓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고 적그리스도를 충성스럽게 섬길 것이다. 참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온갖 박해를 받을지라도 죽기까지 충성하며 참 그리스도만 따르고 섬길 것이다. 

중요한 건 결국 ‘누가 최종 승리자가 되는가’이다. 요한이 본문에서 본 환상이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결국 참 그리스도,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다는 것이다(계 14:1). 시온 산은 그리스도가 세우실 지상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구약 성경에서 자주 하나님의 이름과 주권적 통치, 그분 편에 남은 자들과 관련하여 언급된 장소다(사 24:23). 선지자 이사야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고(사 37:32), 선지가 미가는 “나 여호와가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다스리리라”라고 선포했다(미 4:7).

그리스도 편에 선 남은 자를 가리켜 본문은십사만 사천이라 말한다(계 14:1). 그들은 어린 양과 함께 서 있다. 그들은 알곡이다. 모두가 적그리스도를 숭배할 때, 참 그리스도께 둔 믿음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고 죽기까지 충성하며 살아남은 승리자들이다.

일곱 대접 심판(15-16장)과 최후 심판(19장)을 앞두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맞이할 최종 승리를 예고편처럼 환상으로 보여주셨다. 그리스도께서 가라지인 적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을 불로 심판하시고, 알곡인 자기 백성을 그분의 나라에 들이실 것이다. 천년왕국 백성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 어떤 정체성을 갖는지 살펴보고,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인 교회, 참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정체성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1. 하나님이 소유하신 백성(1절)

십사만 사천의 정체는 계시록 7장에서 이미 밝혔다. 그들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각각 만이천 명씩 택하심을 받은 자들로, 어린양의 진노와 심판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대환난 기간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전도자로 충성하며 적그리스도의 박해를 끝까지 견디고 살아남아 많은 사람을(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어린양께로 인도할 것이다(계 7:9). 이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자기 물건에 이름을 적는 이유는 그 물건을 자기 소유로 알리며 더욱 소중히 여기고 보호하기 위해서다. 십사만 사천의 이마어린 양 예수님의 이름아버지 하나님이 이름이 쓰였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소유하시고 보호하시고 돌보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실제로 대환난 기간 동안 마귀가 최후의 발악을 할 때, 자기 백성을 예비된 장소로(광야) 이끌어 보호하시고 돌보실 것이다(계 12:6, 14).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부른다(벧전 2:9). 그들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고(계 3:5), 예수님은 참 교회 위에 “하나님의 이름”과 주님 “이름”을 기록하신다(계 3:12). 이스라엘을 지으시고 구속하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라고 말씀하셨다(사 43:1). 마찬가지로 구속받고 지음받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것’으로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다(엡 1:13). 하나님은 하나님의 소유로 삼은 백성을 결코 잃거나 버리지 않으신다(요 6:39; 히 13: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2.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2-3절)

요한은 보았고 이어서 들었다. 그가 들은 소리하늘에서 나는 소리였다. 지상에서 어린 양과 십사만 사천이 시온 산에 섰을 때, 하늘에서는 크고 웅장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았다. 하나님의 강력하고 엄위하며 무한하신 영광을 반영한 소리다(겔 43:2). 그 소리는 또한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은 소리였다. 성전 예배에 사용되는 비파(수금) 소리는 요한이 들은 소리가 아무런 의미 없는 소리가 아니라 엄청난 기쁨과 감사와 경배가 담긴 찬양 소리라는 걸 말해준다. 누가 부르는 찬양인가?

예배자의 정체는 그들인데(3절), 그들은 하나님이 좌정하신 보좌 앞, 보좌를 둘러싼 높은 반열의 천사들인 네 생물, 그 주위를 둘러싼 거룩함을 입은 성도의 대표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불렀다. 결국 그들은 하늘 성전 예배의 구성원 중 가장 바깥에 서 있는 수많은 천사들과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대환난 기간에 구원받고 순교 등을 통해 하늘 보좌 앞에 서서 예배하는 성도들이다. 네 생물과 장로들도 화답하며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다(계 7:11-12).

새 노래는 어떤 내용일까?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하며 기쁨의 찬양으로 경배하는 내용이다. 그들이 입고 있는 흰 옷은 어린 양의 피로 씻은 거룩하고 정결한 옷이다(계 7:14). 그들이 부르는 찬송은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이다(계 7:10). 어린양과 시온 산에 함께 선 십사만 사천도 이 노래를 배워 부른다.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3절). 그들도 하나님 구원을 경험하고(속량) 그 능력과 은혜에 감격하여 하늘의 예배자와 같은 크고 기쁨에 찬 소리로 구원자 하나님을 예배한다. 

구원을 경험한 모든 성도가 하나님을 새 노래로 예배한다. 우리는 예배자다.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신 은혜, 이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속량하신 은혜, 복음으로 우리를 부르신 은혜, 값없이 의롭다 칭하신 은혜, 날마다 옛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을 입게 하시는 성화의 은혜, 마침내 죽음을 이기고 하나님과 영생을 누리게 하실 영화의 은혜. 하나님은 아침마다 새로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 우리가 새 노래로 예배할 수 있도록.

3. 하나님만 사랑하는 신부(4절a)

본격적으로 십사만 사천의 정체성이 소개된다. 먼저, 이 사람들은…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다. 여자와 더불어라는 말 때문에, 이들이 성적 순결을 지킨 독신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영적 순결을 말한다. 하나님은 구약시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가리켜 처녀(왕하 19:21), 신부라고 말씀하시고(사 61:10),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긴 죄를 간음이라 하셨다(렘 3:8). 성경은 교회를 가리켜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려진 신부라고 말한다(고후 11:2). 그리스도 외에 무언가(재물) 혹은 누군가를(부모, 자녀, 자신) 사랑하는 것은 영적 간음이다(마 10:37; 약 4:4).

십사만 사천은 대환난 때 온갖 핍박과 미혹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충성한다. 하나님만을 사랑한다. 이것이 그들의 정체성이다. 이것은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 무엇도 겸하여 사랑할 수 없다(마 6:24).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할 대상은 오직 한 분이시다(마 22:37). 하나님은 우리의 전심, 나뉘지 않은 마음을 원하신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신 성령의 음성을 교회는 들어야 한다. 

4. 하나님만 따라가는 제자(4절b)

네 번째 정체성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다. 앞의 것이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사랑을 말한다면, 이것은 전적인 충성을 말한다. 십사만 사천은 환난의 때에 숨어지내며 목숨을 건지라고 인침받은 게 아니다. 목숨 걸고 전도의 소명에 충성하도록 인치시고 보호하신 것이다. 그들을 통해 구원받은 셀 수 없이 많은 무리는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그것이 온갖 핍박과 순교라 할지라도 끝까지 따라가며 충성한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가 각오한 길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를 부르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부르심을 소수 열정적인 그리스도인에 한정한다. 하지만 주님은 이 정체성을 벗어난 자들에게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 한다고 경고하셨다(눅 14:27). 

사랑 없이 충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껏해야 억지로 쥐어짠 외식적인 행위만 잔뜩 양산할 뿐이다. 충성 없는 사랑도 잘못됐다. 단지 말만 그럴듯하게 할 뿐,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거짓 사랑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사랑과 충성을 늘 바쳐야 한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버지께 죽기까지 충성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어라.

5. 하나님이 구별하신 일꾼(4절c)

다섯 번째 정체성은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다. 이들은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았다. 특별한 목적을 위해 값을 주고 사셨다는 말이다. 그 특별한 목적은 처음 익은 열매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데 선봉이 될 사람들, 도구가 될 일꾼으로 사용하신다는 말이다. 구약시대 첫 소생과 소산은 모두 여호와께 특별히 귀속됐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을 속량하여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로 삼으셨다(렘 2:3). 그들을 통해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도록. 십사만 사천도 같은 역할을 감당한다. 첫 열매로서 그들을 통해 모든 민족, 나라, 백성, 방언이 구원을 받아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나님은 그들을 특별히 부르시고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오늘날 교회를 택하여 무엇을 맡기셨는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다(마 28:18-20).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다. 그리스도인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특별한 부르심을 위하여 아들의 목숨값으로 산 자들이다. 그러므로 결코 이 부르심을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전도는 의무이자 특권이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시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에 감사함으로 동참하라!

6. 하나님을 닮아가는 성도(5절)

마지막 여섯 번째, 십사만 사천의 정체성은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다. 거짓은 마귀의 특기다(요 8:44). 적그리스도는 거짓으로 온 세상을 미혹하는 권세를 받는다. 끝까지 마귀 세력에 대항하며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의 특징은 그래서 거짓이 없고 진실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적그리스도가 아니라 참 그리스도를 닮았다. 그리스도께서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고 죄를 범하지 않으신 분인 것처럼(벧전 2:22; 사 53:9), 그리스도인도 언제나 사랑으로 진리를 말한다(엡 4:15). 십사만 사천을 비롯하여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은 거룩하게 구별된 성도다. 그들은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요구하신 하나님을 닮는다(벧전 1:15-16). 하나님께서 성도를 거짓도 흠도 없으신 아들의 형상대로 빚으시기 때문이다(롬 8:29). 거룩한 성품과 훌륭한 인격과 죄로부터 깨끗하고 선행을 풍성하게 맺는 삶은 몇몇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이례적인 덕목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외 없이 입어야 할 정체성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현실은 언제나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최후 승리를 얻는 그날, 시온산에 어린 양과 함께 서게 될 그날까지는. 두 가지 극단에 빠진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라. 확실한 신분을 얻었으니, 상태는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방종. 게으르고 악한 삶을 낳을 뿐이다. 반대로 어떻게든 상태를 끌어올려 내 힘으로 신분을 얻으려는 행위 역시 위험하다. 결국 자포자기하고 무거운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 것이 분명하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정체성과 현실의 차이를 인정한다. ‘이미’ 얻은 구원에 항상 감사하고, ‘아직’ 이루지 못한 구원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이룬다(빌 2:12). 정체성과 현실의 차이가 만들어 내는 긴장을 무시하거나 무거운 짐처럼 여기는 것이 아니라 달려갈 길을 마치기까지 인도하실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오늘 내 앞에 주어진 길을 걷는다. 주저앉을 수도 있고 뒷걸음칠때도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전진한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신뢰하며, 예배자로서, 신부로서, 제자로서, 전도의 일꾼으로서, 성도로서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