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어린양의 신부, 새 예루살렘
본문: 요한계시록 21장 9절 – 22장 5절
설교자: 조정의
앞으로 살게 될 새집을 보는 것은 참 흥분되는 일이다. 낡고 허름한 집에서 깨끗하고 새로운 집으로, 좁고 답답한 공간을 벗어나 넓고 빛나는 거처로 이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하는 신랑과 함께 살게 될 신부라면, 단지 새로운 장소에 살게 된다는 기대를 넘어 남편과 함께 친밀한 사랑을 그곳에서 평생 나누게 될 것을 간절히 소망하며 기쁨으로 여기저기 집을 둘러볼 것이다.
성령님은 본문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위해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준비하신 신혼집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를 통해 당신이 천국을 더 구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신다. 그곳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누리게 될 친밀한 사랑, 영원한 사귐을 더욱 갈망하게 한다. 확실히 보장된 천국의 기쁨으로 이 땅에서 겪는 시험과 유혹을 이기게 하신다.
1. 천국의 조감(21장 9-11절)
조감은 ‘새가 높은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보는 것처럼 전체를 한 눈으로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10절에 보면 성령께서 요한을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였다. 높은 곳에서 천국의 도성, 새 예루살렘을 내려다본 것이다. 매우 흥미로운 안내자가 나오는데, 바로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다(9절). 이 천사는 전에 큰 음녀와 그녀가 받게 될 심판을 요한에게 보여줬다(계 17:1). 이번엔 정반대의 대상을 보여 준다: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9절). 당신은 장차 심판의 집 혹은 신부의 집, 둘 중 하나의 집으로 인도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신부가 살 집이 아닌 신부를 보이겠다고 했을까? 교회가 건물을 가리킬 때도 있지만, 결국 교회를 특징짓는 것은 교회를 이루는 사람인 것처럼, 성경은 새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서 그 특징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천국의 전체적인 모습은 한 마디로 ‘광채’다. 찬란하고 아름다운 빛의 향현이다. 요한은 환상 속에서 본 천국을 이렇게 묘사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11절). 새 예루살렘엔 하나님 영광의 빛이 가득하다. 그 빛은 진귀한 보석같이 아름답다. 투명한 벽옥(다이아몬드), 수정이 빛을 굴절시키듯 맑고 찬란한 하나님 영광의 빛이 온 성에서 뿜어져 나온다. 숨 막히게 경이로운 광경이다!
2. 천국의 측량(21장 12-21절)
자, 이제 가까이 가서 새 예루살렘을 자세히 살펴보자. 우리는 천국 도성의 크기도 측량하고, 건축자재도 꼼꼼히 볼 생각이다.
첫째, 구조: 크고 높은 성곽, 열두 문, 열두 기초석으로 구성된다(고대 건축물의 가장 기초가 되는 구조). 동쪽, 북쪽, 남쪽, 서쪽에 각각 세 문이 있어 사방에서 출입이 자유롭다(13절). 열두 문들 위에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써 있다(12절).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맺으신 하나님 언약의 은혜를 힘입어 사람들이 사방에서 이 성으로 들어온다. 또한 열두 기초석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다(14절). 열두 사도가 목격하고 증언한 예수 그리스도가 맺으신 새 언약의 은혜를 힘 업어 각처에서 사람들이 이 성으로 들어온다. 위협이 전혀 없는 새 예루살렘에 크고 높은 성벽이 왜 필요할까? 열두 문을 왜 천사가 지킬까? 아마도 거대한 성벽은 천국 백성의 영원한 안전을 드러내고, 천사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섬기기 위해 있을 것이다.
둘째, 크기: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 자를 사용했다(15절). 먼저, 성은 네모반듯하다. 길이, 너비, 높이가 같다(16절). 정육면체 혹은 피라미드형일 것이다. 만 이천 스다디온은 약 2,200km로, 면적으로 비교하면 한반도의 22배, 미국의 절반 크기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성곽은 백사십사 규빗, 60m인데, 아마도 두께를 가리키는 것으로 만리장성보다 두껍다. 압도적인 크기와 견고한 두께는 천국의 웅장한 위엄을 나타낸다. 어떤 사람은 말도 안 되는 크기라고 단정하며 측량이 잘못되었다고 여기지만(상징), 요한은 이것이 단순히 사람의 측량이 아니라 곧 천사의 측량이기도 하다고 분명히 못 박는다(17절).
셋째, 자재: 먼저 성곽은 벽옥이고, 성은 맑은 유리같은 정금이다(18절). 맑고 투명하며 고귀한 재료다. 특히 빛을 찬란하고 아름답게 투과하는 재질이다. 성곽의 열두 기초석은 각각 벽옥, 남보석(청금석, 사파이어), 옥수(녹색 규산염), 녹보석(에메랄드), 홍마노(적색과 흰색 층으로 구성된 돌), 홍보석(진홍색 홍옥수), 황옥(금색 벽옥, 감람석), 녹옥(녹주석), 담황옥(토파즈), 비취옥(녹옥수), 청옥(붉은 오렌지 색깔 보석), 자수정(자주색 석영)이다(19-20절). 어떤 사람은 대제사장의 흉패에 붙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상징하는 열두 가지 보석과 유사하다는 이유로(출 28장, 39장), 하나님의 임재 앞에 모든 민족이 나아갈 수 있는 천국의 기쁨과 연관 짓지만, 핵심은 각색 보석에 있다(19절). 새 예루살렘을 가득 채운 하나님 영광의 빛은 맑고 투병한 성곽을 통해 찬란하게 뿜어져 나오고, 성곽 기초석의 각색 보석을 통해 여러 가지 색깔로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열두 문은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다(21절). 광물이나 쇠붙이를 가공하는 것이 아니라 생물이 오랜 세월 소량으로 만들어 내기 때문에, 진주는 진귀하다(마 13:46). 문 하나가 하나의 진주로 되어있다면 얼마나 값진 것인가? 또한 새 예루살렘의 길은 맑고 투명한 정금, 거룩하고 아름다운 하나님 영광을 담아내기 위한 재료다.
건물의 크기와 넓이, 외벽의 두께를 측량하는 것, 어떤 건축 자재가 사용되었는지 조사하는 것 자체가 어떤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우리는 새 예루살렘 성전 자체가 아니라 그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분이 누구신지 주목해야 한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이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기 때문에 성곽이 견고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크신 분이시기 때문에 성이 거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하고 아름답고 영화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영광을 맑고 투명하게, 형형색색으로 아름답고 찬란하게 비추는 진귀한 보석이 사용된 것이다. 결국 우리가 천국 도성을 사모하고 기대하며 바라는 이유는 그 천국 도성을 풍성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을 사모하고 기대하며 바라기 때문이다. 그분의 참모습을 보고, 그 영광에 완전히 사로잡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3. 천국의 예배(21장 22-27절)
많은 사람이 천국에서 영원히 무얼 하며 지낼지 궁금해하고 심지어 걱정한다. 천국은 영원한 예배의 처소다. 새 예루살렘이 정육면체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성경에 나오는 정육면체 건물은 성전의 가장 거룩한 곳인 지성소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 대제사장에게만, 그것도 일 년에 한 번 허락된 예배의 장소다.
22절을 보면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한다.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방 도시국가에도 가장 높고 중요한 자리에 신전이 있는데 말이다. 천국 도성에 성전이 없는 이유는 그 자체가 성전, 거룩한 지성소이기 때문이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으로 영원히 임재하신다(22절).
성전 예배는 밖에 해나 달이 비칠 때, 안에 등불을 켜둘 때 가능하다. 밤에는 성전에 예배드리러 갈 수 없기 때문에 문을 닫아둔다. 하지만 천국의 예배는 다르다.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시기 때문에(23절) 예배를 멈출 필요가 없다. 거기에는 밤이 없기 때문에(25절), 항상 낮에처럼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않는다(“온종일 대문을 닫지 않을 것입니다”, 새번역). 천국에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 임재 가운데서 영원토록 예배드리게 될 것이다.
본문은 천국의 예배를 이렇게 표현한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24절).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고 들어가겠고(26절). “땅의 왕들”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사람도 많지만, 핵심은 따로 있다: 모든 나라, 모든 민족, 모든 백성이 큰 자나 작은 자나, 하나님의 영광의 빛 가운데 행하고, 각각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께 그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릴 것이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천국엔 하나님의 거룩한 예배자만 들어갈 수 있다. 영원히 하나님만 예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 죄로 더럽혀진 삶을 살면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가증한 일을 행하면서, 입술의 신앙 고백과 거리가 먼 삶으로 ‘거짓말하는 자’처럼 살면서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성경은 분명히 말씀한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27절).
그럼 누가 천국에 들어가는가? 거룩한 예배자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가는 자다: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27절). 어떤 사람은 한 번 깨달음으로 생명책에 기록되면 어떻게 살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지만 죽은 자’라고 평가하신 거짓말하는 사데 교회에게 회개하고 깨어서 그 옷을 더럽히지 말라고 요구하셨다. 그런 “이기는 자”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않겠다고 하셨다(계 3:5). 행위로 생명책에 이름을 보존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반드시 흰 옷을 입고 거룩한 예배자의 삶을 산다는 말이다. 그런 자만 들어간다.
4. 천국의 생명(22장 1-5절)
마지막으로 천국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이 장면은 생명의 근원을 말하는 첫 창조의 더 나은 회복, 새 창조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자기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다. 그리고 그들과 동산에서 영광 가운데 친밀한 사귐을 누리셨다. 하지만 죄가 모든 걸 망쳤다. 죄 때문에 만물이 저주를 받았다. 사람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생명의 주를 떠났고, 죄의 삯으로 사망에 이르게 됐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섬기게 됐고, 생명나무 그리고 동산 자체가 금지됐다.
하지만 회복된 에덴, 천국의 동산을 보라.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생명수의 강이 흐른다(1절; 창 2:9-14).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 강물은 영원한 삶에 필요한 모든 필요를 흡족하게 채운다. 생명수의 강은 길 가운데로 흐르는 데,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다(2절). 생명나무는 열두 가지 열매를 달마다 맺는데,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다(2절). 여기서 치료는 아픈 상태에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건강한 생명력을 풍성히 누리게 하는 것이다.
새로운 에덴, 천국엔 다시 저주가 없다(3절). 모든 죄와 그 결과물이 사라졌다. 그래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좌정하신다: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3절). 하나님의 종들이 오직 하나님만 섬긴다(3절).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이마엔 하나님 이름이 있다. 영원히 그분의 소유다.
여기 우리가 감격하며 부르는 찬송 가사의 출처가 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다시 한번 제약이 없고 멈추지 않는 기쁨의 예배, 하나님의 영광, 그 임재 가운데서 드리는 거룩한 예배가 창세기의 언어로 표현되었다. 생육하여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여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첫 사명은 회복되어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대리인이 되어(종), 새 하늘과 새 땅의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세세토록 예배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고 순종하는 일에 충성하면, 천국에선 그 보상으로 아무것도 안 해도 되고 단지 안식하며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제약 없이, 죄악 없이, 온전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고 예배하고 순종하며 살게 될 것이다. 영원히! 천국을 갈망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래서 천국을 진정으로 갈망하는 자는 이 땅에서도 성실하게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만 예배한다. 하나님께 충성하며, 하나님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한다. 그리고 그런 자만이 천국에 들어간다.
눈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천국에서 단지 볼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볼 것을 기대한다. 손이 없는 신자는 천국에서 단지 손을 사용할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 손으로 주를 만지고 주를 위해 일할 것을 갈망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이것으로 요약된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천국이 보배로운 것은 보배로운 분이 거기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을 얻기 위해 살고, 온전히 누리게 될 천국을 사모하며 기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