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어리석고 위험한 사랑
본문 : 창세기 19장
설교자 : 이병권
“사랑”이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사랑은 아주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 있는 귀한 것입니다. 사랑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실천해야 할 중요한 삶의 원리입니다. 또한 사랑은 예수님을 믿은 우리의 삶에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열매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사랑의 대상에 따라 아주 어리석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할 가치가 없는 엉뚱한 것을 사랑한다면 어떨까요? 그 사랑은 아주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어리석고 위험한 사랑을 하는 롯과 그 가족들이 나옵니다. 그는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을 사랑했고, 그 결과는 끔찍합니다. 그가 사랑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죄악이 가득한 소돔을 사랑했습니다. 롯은 타락한 세상을 사랑하면서 세속적인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오늘은 롯을 거울삼아 우리를 점검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에게 롯과 같은 모습이 없는지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본문을 살펴보면서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저녁이 되어 천사들이 소돔에 이르렀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롯은 평소처럼 성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성문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단순히 의자에 앉아서 사람들을 구경하며 쉬고 있었다는 말이 아니고,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롯은 외부인이었지만 그런 위치에 올라갈 만큼 소돔에서 성공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롯은 낯선 두 사람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갑니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절을 하고는 정중하게 그들을 자기 집으로 초청합니다. 아마도 천사들은 일반 사람과 달리 좀 특별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롯의 초청을 받은 천사들은 거리에서 밤을 지내겠다면서 거절하지만, 롯의 간청으로 마음을 바꾸고 롯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롯은 급히 식사를 준비했고 그들을 친절히 대접합니다.
그리고 어느새 잠을 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깥에서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옵니다. 젊은이나 노인이나 나이 구분 없이, 남자들이 무리를 지어 몰려왔습니다. 무슨 소린가 들어보니 자기 집에 온 두 손님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들과 육체적 관계를 갖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소돔의 실상이었습니다. 밤이 되자, 소돔의 실체가 드러난 것입니다. 소돔은 이렇게 성적으로 타락했고, 예의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매우 폭력적이고 악한 도시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이라면 이런 곳에서 살겠습니까? 이곳에 살면 물질적인 풍요가 있을지는 모릅니다. 사회적으로 괜찮은 위치에 있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자녀를 바르게 교육하며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롯은 이곳에 자리를 잡지 말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롯은 포기할 수 없는 이익 때문에 이 악한 곳에서 살았습니다.
사람들의 무례하고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대해서 롯은 손님들을 보호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가서 문을 뒤로 닫습니다. 그리고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며 자신의 타협안을 내놓습니다. 자기에게 두 처녀 딸이 있는데 딸들을 주겠으니 원하는 대로 하고 자기 손님은 그냥 두라는 것입니다(8절).
그 당시 문화에서 생각하면 자기 집에 들어온 손님은 주인이 생명을 다해서라도 안전하게 보호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롯은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의 손님을 보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또한 당시의 아버지는 가정의 절대적인 권한을 가졌고 상대적으로 딸들은 매우 낮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롯의 행동은 잘못된 것입니다. 롯은 악을 행하지 말라고 하면서, 또 다른 종류의 악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롯은 어느새 소돔 사람들을 닮아있었던 것입니다.
롯은 딸들을 사람들에게 내어 놓지만, 그들은 딸들을 거부합니다. 결국 롯의 딸들을 범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롯, 자신입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롯의 인생에 벌어지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롯의 이러한 제안은 성난 무리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더 화나게 했습니다. 분위기가 더 험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뭔데, 밖에서 굴러들어온 주제에 아주 법관처럼 굴고 있네. 너부터 손을 봐야겠어!’ 그리고 롯에게 달려듭니다.
그 때에 집안에 있던 천사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끌어들이고 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을 멀게 만들어 버립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롯에게 천사들이 말합니다.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12-13절)
정신이 번쩍 든 롯은 부리나케 자신의 딸과 약혼한 두 사위에게로 갑니다.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망시킬 것이니 자네들은 이곳에서 떠나야 하네.’ 하지만 그의 사위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생각했습니다. 롯의 말은 사위들에게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롯은 참담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안의 분위기가 어땠을까요? 이제는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새 동이 트고 있습니다. 천사가 다가와서 롯을 재촉합니다.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15절) 롯은 떠나야 한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롯에게는 멸망당할 이 소돔에 대한 미련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사실이 여전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곧 멸망된다 하더라도, 그렇다하더라도 이곳이 너무 좋은 겁니다. 꾸물거리며 떠나기가 싫을 만큼 강한 애착이 있었던 것입니다. 소돔이 롯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하는 장면입니다. 롯은 당장 떠나야할 자리에서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소돔이라는 멋진 세상에서 그는 잘 나가고 있었고, 나름의 만족을 누리고 있었고, 적당히 쾌락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포기할 수 없습니다. 지금 멸망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도 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주저하며 망설이고 있는 롯을 보다 못해, 천사들이 롯과 그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채어 성 밖으로 끌어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멸망당할 소돔에서 머뭇거리는 롯을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건져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16절)
성 바깥으로 나오자 천사들은 롯에게 산으로 도망가라고 알려줍니다. 그러나 롯은 천사의 이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급하게, 그렇게 먼 거리를 갈 수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절박한 순간에 그는 천사와의 협상을 시도합니다.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저를 구해주셨지만, 저는 산까지는 갈 수 없어요. 가다가 무슨 재앙을 만날지 어떻게 압니까?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 옆에 있는 작은 성으로 도망가게 해주세요. 거리도 가까워서 도망하기에 좋고, 또 작으니까 안전할 것 같아요.’(19-20절)
이게 롯의 모습입니다. 자기를 위해 하신 일에 대한 감사는 없습니다. 롯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뭔지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소돔을 위해 중보 했던 아브라함과는 달리 롯의 관심은 자신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롯은 자기의 원대로 가족들을 데리고 소알로 도망갔습니다. 롯이 그 성에 들어갈 때에 동쪽 하늘에서 해가 돋았습니다. 잠시 후 하늘로부터 유황과 불이 비처럼 소돔과 고모라에 내려 그 도시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엎어 멸했습니다. 특별히 24절은 “여호와”를 반복하면서, 이 심판이 하나님께로 온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자 되셔서 그들의 죄악을 벌하셨습니다. 이 심판으로 인해, 롯이 아브라함과 헤어지면서 눈을 들어봤던 모든 평지, 롯이 마음에 들어 선택했던 그 모든 것이 폐허로 변해버렸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자랑했던 모든 것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도 언젠가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가짜 영광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은 믿고 계십니까? 이 세상에 임하게 될 심판을 말입니다. 이 심판의 메시지를 누구는 귀담아 듣지만, 누구는 흘려서 듣습니다. 롯의 사위들처럼 여전히 이 말을 농담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중에는 그런 사람이 한 명도 없기를 바랍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이 땅에 분명히 임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에서 구원받아 도망하는 중에 있던 롯의 아내는 소돔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여기서 돌아봤다는 것은 의식적으로 자세히 바라보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즉시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악한 소돔과 고모라에 관련된 모든 것은 멸하여졌습니다. 안타깝게도 롯의 아내도 그 멸망에 포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눅 17:32에서 이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뒤를 돌아보는 사람들은 그녀의 최후를 기억함으로 같은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잠시 장면을 바꾸어 아브라함이 있는 곳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일찍 일어나서 자신이 하나님께 중보했던 그 자리까지 가서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봅니다. 저 멀리서 거대한 연기가 치솟아 오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자신의 조카, 롯을 생각하며 안타까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의인 10명만 있어도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비록 의인 10명은 없었지만, 아브라함의 간구를 기억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소돔을 멸하실 때 아브라함을 생각하시고 롯을 구원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29절)
롯은 왜 구원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은 왜 그렇게 꾸물대던 롯을 기다리며 은혜를 베푸셨을까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습니다. 마지막 때, 두려운 재앙이 온 세상에 임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무시무시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이 우리의 어떠함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중보와 그분의 대속의 피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우리는 자격이 없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할 말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건져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중보와 하나님의 은혜로 구조된 롯은 자기가 원하던 소알로 갔습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그곳에 머물기를 두려워하여 딸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 굴에 거주합니다. 롯은 어려움을 만나자, 그 두려움에 휘둘리는 삶을 삽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내가 겪는 상황이나 내 주위의 환경이 나를 압도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이는 겁니다. 롯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눈을 돌려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두려움에 휘둘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롯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소알에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롯이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자기 안에 살아있는 소돔의 생활 방식이었습니다. 비록 소돔을 떠나 왔지만, 그리고 소돔은 멸망당했지만, 하지만, 소돔은 여전히 그의 마음에 남아있었습니다. 롯은 그것을 정말 두려워하고 경계해야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극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롯의 딸들은 후손을 남기겠다면서 자기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아버지가 취해 있는 사이, 그와 동침하는 부끄러운 일을 벌입니다. 그들은 소돔의 생활 방식과 가치관이 깊숙이 배여 있어서 이런 일을 하면서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일을 벌인 딸들도 문제이지만, 두 번씩이나 딸들과 술을 마시고 같은 계략에 넘어간 롯도 마찬가지입니다. 롯과 그 딸들은 세상을 사랑하는 자, 그 세속적인 모습의 끝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과 기준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롯의 길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소개하는 질문에 답하며, 종교 란에 기독교라고 쓰면서 동시에 주량은 소주 두병이라고 적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눈에 초점이 흐려지면서 깊은 묵상에 빠져들지만, 드라마를 볼 때는 그 어떤 때보다 집중하며 감동을 받습니다. 주중에 성경을 보는 일은 거의 없고, 무엇이 필요하거나 아쉬운 일이 있을 때만 기도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성공, 자녀교육에 관한 생각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차이가 없습니다. 어떤 것을 결정할 때 말씀의 원리보다 실용적인 기준을 따릅니다. 돈을 사랑하며 이기적이며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깁니다. 삶의 태도나 성품에 있어서 예수님의 향기를 느낄 수 없습니다. 어떨 때는 믿는 사람처럼 보이다가 어떨 때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 그들이 하는 선택을 볼 때 물음표가 생기는 겁니다. 이것이 롯의 길을 따르는 사람,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롯의 노년의 삶이 어떠했을까요? 그는 자기를 아버지라고 불러야 할지,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는 아이들을 보면서 여생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롯의 이야기를 더 이상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롯에 대한 기록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창세기의 이야기는 계속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진행되다가 오늘 19장에서 롯의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이 두 사람, 아브라함과 롯은 얼마나 다른가요? 똑같이 실수가 있고 부족함이 있지만, 두 사람의 삶은 너무도 크게 차이가 나며, 대조됩니다.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요? 무엇보다 이들이 사랑하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결과는 그들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사랑은 없습니다. 결국 이 세상은 그냥 지나가고 말 것입니다. 사라질 것입니다. 남는 것이 없습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최악의 짝사랑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사랑은 없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현재 삶을 오염시키며 미래를 어둡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한일서 2:15-17)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우리가 세상을 사랑해도 세상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돌보지도 않으며 책임지지도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인생을 병들게 만들며 우리의 미래를 망가뜨릴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사랑에 빠지는 세상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다가올 심판을 경고하기 위해 천사가 방문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경고의 말씀이 이미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천사가 올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심히 부패해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우리가 속한 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에 익숙해짐으로 물들어가고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도 위험한 일입니다. 세상과 그 안의 가득한 죄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는 것만큼 어리석고 위험한 사랑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여러분, 롯이 갔던 길을 따라 가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그분을 사랑하십시오. 세상은 우리를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의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마땅히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인 그 한 분, 하나님을 바로 알고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만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