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어두울 때 더 빛나는 믿음
본문: 다니엘 3장
설교자: 이병권
밤하늘의 별이 가장 잘 보일 때가 언제일까요? 밤이 깊을 때, 가장 어두울 때, 별은 더 잘 보입니다. 쉬운 예로 촛불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촛불이 내는 빛은 별것 아닙니다. 주변이 밝을 때는 촛불을 켜더라도 그 빛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변이 어두울 때는 다릅니다. 우리가 생일 파티를 할 때 촛불을 켜고 방안에 불을 끄면 촛불을 환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빛은 더 밝게 빛납니다.
우리 믿음이 그와 같습니다. 믿음은 빛과 같아서 주변이 어두울 때 더 밝게 빛이 납니다. 예를 들어 믿음이 좋은 사람과 믿음이 별로인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평소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어려운 일을 겪게 되었을 때 믿음의 차이는 분명해집니다. 믿음이 그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이 그러합니다. 어두운 상황입니다.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우리 삶의 여러 부분이 그냥 정지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당연하게 해왔던 것들이 이제는 당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누리고 있었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상황은 우리 믿음을 점검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우리 인생에서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것처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그렇게 보내는 시간은 나에게 아픔일 수 있지만, 하지만 그 아픔을 통해서 나의 믿음은 더 분명해지고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그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니엘의 세 친구가 그러한 축복을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선배로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어두운 현실에서 더 빛나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그들의 믿음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히 11:34)
그들은 믿음으로 불의 세력을 멸했던 것입니다. 맹렬한 불의 위력을 꺾어버렸던 세 친구의 믿음, 어두운 현실에서 그들의 믿음은 더욱 밝게 빛났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러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믿음으로 바이러스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해서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꿈을 해석한 다니엘을 왕궁에 머물게 했고 세 친구는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로 임명했습니다. 다니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고 하나님을 찬양했던 느부갓네살이 지금은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높이는 육십 규빗이요 너비는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지방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1)
느부갓네살은 금으로 신상을 만듭니다. 높이가 육십 규빗이고, 너비가 여섯 규빗인데 대략 계산하면 높이가 27m고 너비가 2.7m입니다. 어림잡아 생각했을 때 아파트 10층 정도의 신상을 만든 것입니다. 아마도 느부갓네살은 자신이 꾸었던 꿈에서 영감을 받은 것 같습니다. 이 거대한 신상을 만들어서 자신의 막강한 권력을 과시하며 사람들에게 자신을 높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상이 완성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읍니다. 2절을 보면, 그렇게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각 지방 모든 관원”
느부갓네살이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으는데 바벨론에서 한자리하는 사람들, 지방의 모든 관원까지 다 소집한 것입니다. 그렇게 부름을 받은 사람 중에 다니엘의 세 친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왕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것,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에 있는 일입니다.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 하였더라“(5-6)
여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겠습니까? 왕이 부른 많은 사람과 어울리게 악기의 목록도 대단합니다. 갖가지 악기들이 다 동원되어서 이 자리를 화려하게 장식합니다. 문제는 악기들의 소리가 울려 퍼질 때, 그 소리에 맞춰서 신상에게 절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왕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풀무불에 떨어질 것입니다.
절하지 않으면 언제 풀무불에 들어가게 됩니까? 즉시,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 왜 절하지 않았는지 이유를 들어보고 억울함이 없도록 재판 과정을 거치고 가족이랑 작별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고 이런 거 없습니다. 명령은 단순합니다. 모든 악기가 연주되면 절을 해야 합니다. 절하지 않는 것은 ‘나 지금 풀무불에 들어가겠습니다.’하고 말하는 겁니다.
절대군주의 명령입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왕이 직접 내린 명령입니다. 왕은 자신의 권위와 권세를 드러내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반드시 이 명령을 따르게 할 것입니다. 만약 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상에게 절합니다.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언어를 말하는 자들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자 곧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엎드려 절하니라”(7)
모두가 다 절합니다. 신상에게 엎드려 절하는 것이 당연한 것 같습니다. 절하지 않으면 목숨이 날아가는데 우선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백성과 민족들과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자들이 다 왕의 명령에 복종합니다.
그런데 세 사람은 허리를 굽히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엎드려 절하는데 세 사람은 허리 꼿꼿하게 세우고 서 있습니다. 왕의 명령이 그들의 믿음과 맞지 않기 때문에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상상이 되십니까? 다들 엎드려 절하고 있는데 세 사람은 꿈쩍하지 않습니다. 세 사람은 이 일에 목숨을 겁니다.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킵니다.
다행히 왕은 이 상황을 알지 못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있으니 누가 절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 다 확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감히 누가 왕의 명령을 어기겠습니까?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일이 그냥 조용히 넘어가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 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나아와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니라”(8)
꼭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면 배가 아파서 그냥 두지 않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왕의 총애를 받은 것을 시기하여 어떻게 해서든 꼬투리를 잡으려고 했는데 지금 딱 걸렸습니다.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참소합니다.” 여기 참소하다는 말은 ‘집어삼키다’는 의미입니다. 갈대아 사람들은 세 친구를 시기하여 자신의 먹이로 생각하고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세 가지를 가지고 세 친구를 고발합니다.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게 하신 자이거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12)
이들은 왕이 세운 사람들이고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첫째, 왕을 높이지 않았습니다. 둘째,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셋째,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참소하는 자들은 이 일을 왕에 대한 인격적인 무시로 몰고 갑니다. 왕의 인격과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왕으로서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명령이 무시되었다는 말을 들은 느부갓네살은 어떻게 했을까요? 관대한 마음으로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너그럽게 생각해야지’ 이러면 좋겠지만, 13절을 보면 “왕이 노하고 분하여” 합니다. 좀 더 실감나게 표현하면 제대로 열 받았다는 말입니다. 격노한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온 주제에 그동안의 호의를 잊어버리고 나의 명령을 무시하다니!’
왕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이 일을 바로 잡으려고 세 사람을 잡아오게 합니다.
이제 모든 사람이 주목할 수밖에 없는 무대가 만들어졌습니다.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신상에게 절하지 않는 세 사람이 무대에 등장했고 그 모습을 모든 사람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왕이 세 사람에게 질문합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14)
갈대아 사람들이 고발한 내용이 사실인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이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대답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려고 합니다.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15)
느부갓네살은 세 사람을 회유합니다. ‘전에 절하지 않은 것은 봐주겠다. 이제라도 절하면 아무 문제없을 거다.’ 이제라도 절을 하면, 이제라도 마음을 바꾸면, 이제라도 내 말을 들으면, 이제라도 현실을 받아들이면 괜찮을 거다.
하지만 거절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어지는 것은 협박입니다.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15)
느부갓네살의 회유와 협박에도 세 사람의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뒤돌아서지 않습니다. 확고한 결심으로 믿음을 끝까지 지킵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17-18)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왕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들은 이미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서 왕 앞에 끌려온 상태입니다. 그리고 왕이 직접 그들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세 명 중에 누구 하나, 다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풀무불을 두려워하기보다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믿음을 지킵니다.
세 사람의 대답은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까지 뜨겁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풀무불까지도 더욱더 뜨겁게 합니다.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얼굴빛을 바꾸고 명령하여 이르되 그 풀무불을 뜨겁게 하기를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19)
느부갓네살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릅니다.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차라리 죽겠다고 하는 자들, 많은 사람에게 본보기가 되도록 엄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풀무불을 일곱 배나 더 뜨겁게 하라’
당시 풀무불의 온도가 1000도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일곱 배나 뜨겁게 하라는 말은 7000도로 온도를 높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할 수 있는 대로 가장 뜨겁게 하라는 표현입니다. 왕의 명령에 따라 풀무불은 최고로 뜨거운 상태가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뜨거운 풀무불의 위협도 세 사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풀무불보다 더 뜨거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 사람은 풀무불에 던져집니다. 맹렬히 타는 불꽃이 이들을 덮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불 가운데 있는 세 사람을 보호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느부갓네살이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25)
분명 세 사람을 불 속으로 던졌는데 불 속에는 네 사람이 걸어 다닙니다. 이 모습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는 기적이고 가슴 벅찬 장면이지만, 당시 느부갓네살에게는 어땠을까요? 사람이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고 걸어 다니고, 세 사람을 넣었는데 한 명이 추가되어서 네 사람이 있는 겁니다.
느부갓네살은 넷째의 모습이 신들의 아들과 같다고 고백합니다. 그 모습이 사람이 아니라 사람과 구별되는 신적인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 넷째에 대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로 보는 견해도 있고 성육신하기 전의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떤 견해이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자가 세 사람을 구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능력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세 사람은 믿음으로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맡겼고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에 대해서 놀라운 능력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친히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는 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려주셨습니다.
느부갓네살은 너무도 교만하게도 이런 말을 말했습니다.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15) 하나님은 그 교만한 말에 대해서 이렇게 응답하신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유일한 하나님이며 이들을 능히 구원할 자이니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불 속에서 어떠한 해도 받지 않고 심지어 불에 탄 냄새도 없는 상태로 무사히 불 속에서 나옵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이 놀라운 일을 본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을 높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솔히 말하는 자는 엄벌하겠다는 조서를 내리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그 지방에서 더욱 높여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 사람이 만난 어두움은 목숨이 걸린 위태로운 상황이었고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이었으며 타협하고 싶은 유혹이었습니다. 하지만 세 사람은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믿음을 통해 역사하셨고 그 선하신 뜻대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그들의 믿음은 더 밝게 빛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세 사람의 믿음은 이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개인적으로 이 말씀은 이전 번역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의 손에서 능히 그들을 건져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선하신 뜻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행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른 결과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 결과를 받아들입니다. 믿음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변하지 않기에 변하는 상황과 상관없이 “그리 아니하시는”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은 항상 올바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뜻에 순종할 뿐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어려움 가운데 더 빛나는 것이 이러한 믿음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두고 하나님을 그 결과에 맞추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우리 믿음을 자극합니다. 세 친구가 경험했던 놀라운 기적을 원하고 구할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일곱 배나 더 강해지더라도 우리가 아무런 해를 받지 않는 겁니다. 그런 놀라운 일을 하나님이 하실 수 있습니다. 기적적인 방법으로 지금의 어려움을 당장 끝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다른 방법으로 다른 시간에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우리에게는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이런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결국,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면 지금 우리 상황에서 위로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 친구에게 있었던 기적 같은 일이 지금 나에게는 없는데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오늘 이야기가 지금 우리의 모습과 우리가 만나는 현실과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이 지금 우리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좀 더 길게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해피엔딩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을 좀 더 길게 보셔야 합니다. 아직은 아닙니다. 우리의 진짜 해피한 이야기는 조금 이따가 이 땅을 떠난 후에 시작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 날을 바라보며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세 친구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의 믿음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하셨습니까? 세 친구가 믿음으로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을 때 풀무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뜨거워졌습니다. 왕의 마음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분노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켰지만, 결국 그들은 풀무불에 던져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호하셨습니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지키셨습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풀무불은 여전히 대단한 위력으로 우리를 두렵게 만듭니다. 어려운 상황과 알 수 없는 미래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최악의 상황을 만나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우리의 믿음은 죽음을 이기는 소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세 친구에게 있었던 기적 같은 일이 우리에게 생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적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불 가운데 있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셨던 하나님은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진짜 놀라운 기적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풀무불보다 더 뜨거운 영원한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으로 우리의 믿음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으로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이 우리를 믿음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상황이 어렵다하더라도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어두울 때 더 빛나는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우리는 믿음으로 기뻐할 수 있고, 믿음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