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어는 것이 더 나은가?
본문: 사사기 18장 1절~31절
설교자: 이병권
우리는 살면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결정이라고 하는 것은 그 결정을 한 후에 따라오는 결과가 크고 여러 면에서 그 결과가 오랜 시간동안 지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커피를 먹을까 하는 것은 중요한 결정은 아닙니다. 그 결정으로 인해 따라오는 결과나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머리 모양을 바꾸는 것은 어떨까요? 커피보다는 더 중요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커피보다는 더 많은 면에서 영향을 주고 더 오랜 시간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이와 비교할 수 없는 중대한 결정들을 합니다. ‘나는 누구와 결혼할까? 나는 어디로 이사를 갈까? 나는 어느 회사에 다닐까? 나의 진로는 어떻게 할까? 나는 어느 교회에 다닐까?’ 이런 결정들은 아주 중요한 결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결정을 앞두고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고 고민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둡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무언가를 결정할 때 그 결정은 내 마음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게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내가 하는 결정을 통해서 ‘내가 무엇에 더 가치를 두고 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더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 나의 직업적인 성공과 보장된 미래, 돈과 같은 물질적인 가치에 있다면 그것을 우선순위에 두고 그것을 위한 결정을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단순히 어떤 결정을 두고 점수를 매기며 좋은 선택, 나쁜 선택을 구분하며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다른 사람의 상황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결정을 두고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나에 대해서 내가 하는 결정에 대해서는 스스로 점검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에 더 우선순위를 두고 결정하고 있는지, 이것이 정말 나에게 유익한지, 나의 신앙과 영적인 만족에 부합하는지, 이것이 정말 주님을 우선순위에 두고 한 결정인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람은 자신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러한 중요한 결정을 하는 백성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이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사기의 첫 번째 결론 부분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먼저 미가라는 이름의 타락한 가정의 모습을 보았고 이번에는 한 가정의 모습에 이어서 한 지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정에서 한 지파로 규모는 훨씬 더 커졌지만 그들의 모습은 별반 다를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사사기 첫 번째 결론은 오늘 본문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단 지파 이야기하기 위해 17장에서 미가의 가정과 그 배경을 설명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 단 지파의 상황과 그들이 어떤 결정을 했는지 보겠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그 때에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그 때까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음이라”(1)
오늘 본문도 사사기 문제의 핵심을 언급하며 시작됩니다. 그들에게 왕이 없었고 그리고 생략되어 있지만 백성들이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행합니다. 단 지파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말씀에 보면, 그들은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고 그 이유가 그들이 그 때까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단 지파는 땅을 분배 받지 못했기 때문에 거주할 땅을 구하고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수아 때 각 지파별로 땅을 다 분배받았습니다. 우리말로 “분배 받지 못했다고”기록했기에 조금 오해할 수 있는데, 의미대로 하면 단 지파는 땅을 분배받았지만 그 땅을 정복하지 못했고 그래서 단 지파는 분배받은 땅이 아닌 다른 땅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저자는 이미 단 지파의 상황을 이렇게 언급했었습니다.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1:34) 단 지파는 그 땅을 차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아모리 족속에게 밀려서 산지로 내몰렸고 그들에게 눌려서 어찌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한 것은 그 땅을 버리고 다른 땅을 찾는 것입니다. 아모리 족속을 상대하기 힘드니까 다른 길을 찾은 것입니다.
단 지파는 주어진 기업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 땅을 차지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는 포기합니다. 하지만 순종이 없는 곳에는 안식도 없습니다. 단 지파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나름의 안식을 얻기 위해 그들이 지낼 만한 땅을 찾기 위해 다섯 명의 정탐꾼을 세웁니다. 이렇게 단 지파가 정탐꾼을 보내는 장면은 옛적에 모세가 가나안 땅에 정탐꾼을 보냈던 일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정탐꾼을 보내는 배경은 전혀 다릅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정탐꾼을 보냈지만, 단 지파는 약속의 땅을 포기하고 다른 땅을 찾으려고 정탐꾼을 보냅니다.
그렇게 땅을 찾으러 길을 떠난 다섯 명의 정탐꾼은 가는 길에 미가의 집에 이르렀고 미가의 집에 쉬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미가 집에 있던 레위 청년을 만납니다. “그들이 미가의 집에 있을 때에 그 레위 청년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리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으며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 하니”(3)
정탐꾼들이 레위 청년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그 사연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정탐꾼들이 레위청년의 음성을 알아들었다는 게 무슨 말일까요?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정탐꾼들이 레위 청년과 아는 사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반가워서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왜 여기에 있는지 물어봤다는 견해입니다. 다른 견해는 레위 청년이 다른 지역에서 왔기 때문에 에브라임 방언이 아닌 다른 억양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물어봤다는 견해입니다. 레위 청년과 단 지파의 사람들과 친분이 있다고 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두 번째 견해가 더 타당할 것입니다.
레위 청년은 자신이 미가의 집의 제사장이 된 상황을 알려줍니다. 그러자 정탐꾼들은 자기들이 가는 길이 형통할 것인지 하나님께 물어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볼 수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이 알았던 것은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많은 신들 중에 하나인 하나님이었습니다.
레위 청년은 그들의 복을 말하고 평안히 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정탐꾼들은 다시 길을 떠납니다. 정탐꾼들은 에브라임 산지를 거쳐서 라이스라는 곳에 이르게 됩니다. 라이스는 이스라엘 지역에서 제일 북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7절에는 그 땅에 대한 평가가 나옵니다. “이에 다섯 사람이 떠나 라이스에 이르러 거기 있는 백성을 본즉 염려 없이 거주하며 시돈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평온하며 안전하니 그 땅에는 부족한 것이 없으며 부를 누리며 시돈 사람들과 거리가 멀고 어떤 사람과도 상종하지 아니함이라”(7)
정탐꾼들이 발견한 땅은 부족할 것이 없는 좋은 땅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지역과 거리가 있었고 교류가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공격을 받더라도 도움을 얻을 수 없는 소외된 지역이었고 전쟁의 위험이 없는 곳이었기에 군사력도 빈약했던 곳입니다. 단 지파가 정복하기에 최적화되어 있는 아주 좋은 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을 발견한 정탐꾼들은 집으로 돌아와 그 땅에 대해서 보고 합니다. 그들의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가면 평화로운 백성을 만날 것이요 그 땅은 넓고 그 곳에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는지라“(10)
정탐꾼들은 백성들을 선동하며 하나님이 그 땅을 주셨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이방나라에게 압박을 받고 있는 이 땅에서 계속 사는 것보다는 새로운 땅, 더 좋은 땅, 그 땅으로 가는 것이 더 좋아 보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합니다.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하면서 겉에만 하나님의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마치 중국산인데 겉에 스티커만 국산이라고 붙이는 것 같습니다. 거짓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좋을 대로 행하는 죄악입니다.
이렇게 해서 단 지파는 이주를 시작합니다. 단 지파의 모든 사람이 여기에 동참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그 땅에 남은 사람들이 있었고 일부가 새로운 땅으로 갑니다. 육백 명이 무기를 가지고 그의 가족들과 가축들을 데리고 집을 떠나 새로운 땅, 라이스를 향해 갑니다. 그리고 정탐꾼의 인도대로 단 지파는 에브라임 산지를 거쳐 미가의 집에 이릅니다. 그 때 정탐꾼이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전에 라이스 땅을 정탐하러 갔던 다섯 사람이 그 형제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집에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있는 줄을 너희가 아느냐 그런즉 이제 너희는 마땅히 행할 것을 생각하라 하고”(14)
그들이 하는 말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 집에 가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값진 것들이 많이 있어! 그러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이 뭘까?’이건 도둑들이 하는 이야기 아닐까요? 다섯 명의 정탐꾼은 미가의 집에 들어가서 우상들을 들고 나옵니다. 그리고 육백 명의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문 입구를 지키고 있습니다. 아무 거리낌 없이 미가의 집에 들어가 도둑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볼 수 없는 도적떼의 모습과 같습니다.
단 지파가 새로운 땅을 정복할 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들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얻기 위해서 힘을 앞세워 우상을 빼앗고 있는 것입니다. 우상이 빼앗으면 하나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때 레위 청년이 말합니다.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그들이 할 수 없는 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기에 그들을 멈추게 하려고 한 말입니다. 다섯 명의 정탐꾼은 이전에 미가의 집에 묵으며 신세를 졌습니다. 라이스 땅을 가기 전에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은혜를 악으로 갚고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정탐꾼들은 레위 청년에게 뜻밖에 제안을 합니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 하는지라”(19)
만약 여러분이 이러한 제안을 받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느 것이 낫겠느냐?’ 한 사람의 집에 제사장으로 있는 것보다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떠돌이로 신세였던 레위 청년에게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한 것입니다.
레위 청년은 어떻게 했을까요? 미가는 그동안 머물 곳을 찾는 레위 청년에게 모든 것을 제공해주었습니다. 레위 청년을 아들처럼 대하며 보살펴주었습니다. 물론 이런 제안 자체가 말씀을 어기는 것이기에 거절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것 말고도 미가에게 받은 호의를 생각하더라도 거절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레위 청년은 더 좋은 자리가 생기자 미가를 배신합니다. 그의 반대편에 서서 도둑질에 동참합니다. “그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받아 가지고 그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니라”(20) 레위 청년은 기쁜 마음으로 우상들을 받아 가지고 그들과 함께 합니다.
레위 청년의 모습을 보십시오. 자신에게 더 좋은 것이 생기면 언제든 더 좋은 것을 위해 다른 것은 희생할 수 있습니다. 삶의 기준이나 지침 없이 그 때 그 때 자기 눈에 좋은 것을 선택합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돈을 주면 제사장이 되어 섬깁니다. 올바른 선택인지 관계없이 더 괜찮은 조건이 있으면 그것을 선택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아갑니다. 스스로 왕이 되어서 자기를 위해 삽니다. 그리고 이런 선택은 하면 할수록 하나님께는 더 멀어지게 됩니다.
미가의 모습이나 레위 청년의 모습이나 단 지파의 모습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왕이 없었고, 스스로가 왕이 되어서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행하며 자기를 위해 살고 있습니다.
그럼 우상과 제사장을 빼앗긴 미가는 가만히 있었을까요? 미가는 자신의 사람들을 모아서 단 지파 사람들을 쫓아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미가가 이르되 내가 만든 신들과 제사장을 빼앗아 갔으니 이제 내게 오히려 남은 것이 무엇이냐 너희가 어찌하여 나더러 무슨 일이냐고 하느냐 하는지라”(24)
미가는 자신이 빼앗긴 우상에 대해서, “내가 만든 신들”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상의 정체입니다. 그들이 차지하려고 하는 것은 ‘만든 신’입니다. 사람이 만든 것을 신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서로 섬기려고 합니다.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미가는 우상을 만들고 레위 자손을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배신과 후회와 실망과 좌절 밖에 없습니다.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상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미가는 단 지파 사람들을 쫓아가봤지만 자신의 힘으로 그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다만 쓸쓸히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이렇게 미가는 자신이 만든 신상과 자신이 발굴한 레위 청년을 남겨두고 퇴장합니다. 그리고 그가 만든 신상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어려움이 됩니다.
미가의 집을 떠난 단 지파는 우상들과 제사장과 함께 라이스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무자비하게 그곳에 사는 백성들을 죽이고 그 땅을 정복합니다. 그런 후 성읍을 세우고 그 이름을 조상의 이름을 따서 “단”이라고 부릅니다.
특별히 본문에는 그 땅에 살았던 백성들에 대한 언급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염려 없이 거주하는 백성(7), 평화로운 백성(10),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사는 백성(27). 이러한 반복은 단 지파가 한 일과 크게 대조를 이룹니다. 그러면서 단 지파의 난폭함과 그들의 죄를 드러내주는 겁니다. 라이스의 백성들은 평화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단 지파가 그들을 죽이며 그 땅을 차지할 권리는 없습니다. 단 지파가 한 일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했던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기 위해서 가나안을 정복하도록 하신 것은 아닙니다. 가나안의 죄악이 너무도 심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런데 라이스의 백성들은 그것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단 지파는 이기심과 욕심으로 그 땅을 빼앗은 것입니다.
이렇게 단 지파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땅에서 살기보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 땅을 정복하기보다, 다른 땅을 찾았고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악을 행합니다. 단 지파가 새로운 땅으로 이주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도 손쉽게 자기 힘으로 차지할 수 있는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단 지파는 그 땅에서 자신들을 위한 예배의 자리를 만듭니다. 하나님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을 만듭니다. 그 자리에 도둑질한 우상을 세워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레위 청년을 제사장으로 세웁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제야 밝혀지는 사실이 있습니다.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레위 청년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그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드러납니다. 마치 출생의 비밀을 감추고 있다가 이제야 그 비밀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이 레위 청년의 이름이 나오는데 요나단입니다(30). 이 요나단의 아버지는 게르솜이고, 요나단의 할아버지는 모세입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악을 범하고 있는 이 레위 청년은 다름 아닌 모세의 손자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모세, 이스라엘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했던 모세,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었던 모세, 그런데 그 모세의 손자는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자기 좋을 대로 예배를 드립니다. 백성들을 타락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나은 헛된 예배를 드리는 거짓 제사장이 됩니다. 그리고 단 지파가 단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곳은 앞으로 계속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주도하는 곳이 됩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오늘 본문의 마지막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31) 하나님의 집은 실로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막은 실로에 있습니다. 그런데 단 자손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 우상을 세우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어느 것이 더 나은가? 이 질문에 대해서 단 지파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보다 자신이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땅을 선택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곳에 나아가 예배드리기보다 자기 임의로 우상을 세우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것이 그들이 선택한 더 나은 것입니다.
어느 것이 더 나은가? 이 질문에 대해서 모세의 손자는 어떠합니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레위 자손이 되기보다는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사장이 되기보다는 우상을 섬기며 우상을 섬김으로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선택합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더 나은 조건이 있을 때 미련 없이 그것을 선택합니다. 그것이 그가 선택한 더 나은 것입니다.
왜 이런 결정을 하는 걸까요? 왜 이런 선택을 할까요? 그 때에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왕으로 계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따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좇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엉망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엉망이고 종교가 엉망이고 도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죄악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가 왕이 되어서 왕의 명령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떠합니까? ‘어느 것이 더 나은가?’ 오늘날 우리가 계속해서 만나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질문들이 우리의 욕심을 자극합니다. 우리의 욕심을 키우고 말씀을 뒤로 하고 하나님의 기준을 낮추게 만듭니다. 말씀을 따르기보다 우선 내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따르게 합니다. 마치 하와가 선악과를 앞에 두고 하나님 말씀을 보다 선악과를 더 좋게 본 것처럼 말입니다.
‘어느 것이 더 나은가?’이 질문이 우리에게 생길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따라 합당한 기준으로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눈앞에 있는 이익과 세상의 가치와 명예와 만족이 우선시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왕 되시는, 내 삶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단 지파가 결과적으로 거둔 성과를 볼 때 어떻습니까? 새로운 땅, 그들에게 좋은 땅,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제사장의 말을 들으며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그들의 선택에 대해서 좋은 결과를 거두었고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일이 옳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겉으로 보이는 성공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폭력을 행하며 그들의 입으로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어느 것이 더 나은가?’라는 질문이 생길 때 하나님이 어느 것이 옳다고 하셨는지를 먼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왕의 명령에 따라 행하는 것이 가장 옳은 길이며 합당한 길입니다. 만약 우리가 나의 유익과 나의 욕심을 우선시 한다면 그렇게 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주님과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방향은 주님이 가신 길과 반대되는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