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약함이 자랑인 이유, 세 가지
본문: 사사기 7장 1절 ~ 25절
설교자: 이병권
여러분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에게 약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내가 주님을 닮아가며 더 온전해지고 싶은데 계속 방해가 되는 것, 주님을 향한 헌신을 가로막거나 주님을 높이는데 걸림이 되는 것, 때로는 나를 좌절하게 만드는 나에게 가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각나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연약한 부분, 나의 단점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랑이 될 수 있을까요?
세상에서 약함은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약함은 골치 아픈 문제이거나 혹은 감추어야 하는 비밀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약함을 알면 그 사람을 깔보거나 이용하려 합니다. 누군가의 약한 부분이나 단점은 뒷담화에 주된 소재가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약함을 숨기려하고 어떻게든 좋게 보이려고 꾸밉니다.
하지만 믿음 안에서 약함은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약함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나의 약함이 어떻게 자랑이 될 수 있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큰 용사라고 말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기드온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거듭되는 요청을 들어주시고 함께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은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드온의 약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의심 많고 겁이 많은 기드온의 연약함입니다. 기드온은 자신이 맞서야 하는 수많은 적들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이야기는 더 이해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2)
기드온을 따르는 백성들은 미디안의 연합군과 비교하면 크게 적은 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나마 모인 백성들을 돌려보내려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전쟁을 보다 실제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과 미디안 연합군의 규모를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드온을 따르는 백성의 수는 3만 2천명입니다(3). 그리고 이에 맞서는 미디안 연합군의 수는 13만 5천명입니다(8:10). 미디안이 대략 10만 명이나 더 많은 숫자입니다. 수적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3만 2천명이 많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돌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렇게 돌아간 백성이 2만 2천명입니다. 이제 남은 백성은 1만 명입니다. 모인 백성들 중에 3분의 2가 떠난 것입니다. 세 명 중에 두 명이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지금 남아 있는 1만 명도 많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돌려보낼 백성들을 선택하십니다.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 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개가 핥는 것 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들을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누구든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도 그와 같이 하라 하시더니”(5)
하나님은 물을 마시는 자세에 따라 두 무리로 사람을 구분하십니다. 손으로 물을 떠서 핥아 먹는 자가 3백 명이고 나머지 9천 7백 명은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는데, 하나님은 3백 명을 택하시고 그들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3백 명만 남았습니다.
하나님이 여기 3백 명을 택함에 있어서 질문이 생깁니다. 두려워 떠는 자를 집으로 돌려보낸 것은 쉽게 이해가 되는데, 물을 마시는 자세에 따라 선택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물 마시는 자세에 대해서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시는 것은 전쟁을 앞둔 자로서 주위를 경계하는 합당한 자세이며 민첩함을 보여주는 자세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물 마시는 자세를 가지고 의미를 두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자세가 아니라 숫자입니다. 하나님은 그 뜻에 따라 백성들을 택하시고 또 돌려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뜻하신 것은 백성들의 수를 줄이는 것입니다. 만약 반대로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시는 백성의 수가 9천 7백이고 무릎을 꿇은 백성의 수가 3백이었다면, 하나님은 무릎을 꿇은 자들을 택하셨을 것입니다. 지금 이 과정은 전쟁에 알맞은 용사를 선발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전쟁에 나갈만한 최후의 300을 뽑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수를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 이 일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세상 어디에도 없는 전쟁의 기술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어떤 군사도, 어떤 지략가도, 어떤 전문가도 이런 전략은 세우지 않습니다. 나보다 훨씬 많은 수의 적을 상대하면서 오히려 아군의 수를 줄이다니요! 이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할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유리합니다. 그것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확률을 높이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정반대되는 일을 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처음 모인 사람의 99% 이상이 떠났습니다. 100명이 모였는데 99명이 집으로 돌아가고 한 명만 남았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전쟁을 할 마음이 생길까요? 적은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데 그나마 모였던 사람들마저 돌려보내고 3백 명만 남았습니다. 이런 상태로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을 네 손에 넘겨 주리니…”(7) 어떻게 될지, 어떻게 가능할지, 지금 상황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기 있는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겠다.’
이스라엘의 수와 미디안 연합군의 수를 비교하면 지금의 대결은 1대 450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한 명이 미디안 450명을 상대해야 합니다. 상식적으로 이길 수 없는 싸움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계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상식이 통하지 않는 전쟁을 계획하시고 상식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나타내십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사람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분명히 하시는 겁니다.
우리의 약함도 그러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습니다. 나의 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거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아닙니다. 우리 삶의 시작부터 그 끝까지 하나님의 능하신 손, 그 아래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완벽함이 아니라 약함을 허락하셨고 그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이루어 가십니다. 나의 약함이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안에 있기에 우리는 약함을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약함이 하나님이 계획안에 있다는 것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왠지 이것만으로 우리가 약함을 자랑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번째 이유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나의 약함이 어떻게 자랑이 될 수 있습니까?
둘째로 하나님의 격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은 전쟁을 위해 여기 저기 사신을 보내서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모은 사람들을 돌려보내셨습니다. 이제 기드온의 곁에는 3백 명만 남아있습니다. 기드온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하나님은 기드온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 밤에 기드온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 주었느니라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와 함께 그 진영으로 내려가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그 진영으로 내려가리라 하시니…“(9-11)
하나님은 또다시 기드온에게 승리를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미디안 진영으로 내려가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이번에는 기드온이 먼저 요청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기드온을 아시고 그가 두려움을 이길 수 있도록 특별한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 기드온을 잘 아시기에 그를 격려하시며 이끌고 계십니다.
두려웠던 기드온은 자신의 부하와 함께 적의 진영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메뚜기와 같은 수많은 적들과 해변의 모래와 같은 그들의 낙타들을 봅니다. 이렇게 많은 적들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 때 기드온은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꿈을 말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의 한 장막을 무너뜨리는 꿈이었습니다. 그 꿈에 대해서 친구가 해몽을 합니다.
“그의 친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더라”(14)
이 말을 들은 기드온은 두려움을 이겨냅니다. 하나님께 경배하고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와 이제 싸우자고 말합니다. 3백 명에게 하나님이 승리를 주셨다고 외칩니다. “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며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와 이르되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고”(15)
하나님 말씀을 듣고도 두려워했던 기드온이 적들이 하는 말을 듣고 나서야 두려움을 극복합니다. 기드온의 약함을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보다 사람의 말이 더 크게 다가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고 기드온을 이끄시어 다시 한 번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다시 확인시켜주셨습니다. 그가 확신할 수 있도록 또 한 번의 기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약함을 아시고 그에게 맞춤으로 도와주셨습니다. 윽박을 지르거나 억지로 밀어붙이거나 강제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격려하십니다. 반면에 우리는 나에게 약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약함을 보면,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할 때가 있습니다. 왜 저렇게 밖에 못할까? 왜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걸까? 화를 내기도 합니다. 좀 똑바로 하라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말라고 버럭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러시다면 어땠을까요? 우리는 벌써 옛날에 사라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으로 이해하십니다.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인자한 손길로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마치 어린 자녀가 달리기 하는 것을 보는 부모와 같습니다. 부모는 아이가 달리기를 잘하든 못하든 등수에 관계없이 아이를 응원합니다. 주어진 경주에서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달리기를 바랄뿐입니다. 우리 주님도 그렇게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여러분에게 약함이 있으십니까? 계속해도 잘 안 되는 연약함이 있으십니까? 그 약함을 하나님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 약함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하나님의 강함으로 채우십니다.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고 현실의 무거움으로 버거워하며 두려움으로 떨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나의 약함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격려도 함께 하기에 나의 약함이 자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격려가 있으면 나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마지막 이유가 남아있습니다. 나의 약함이 어떻게 자랑이 될 수 있습니까?
셋째로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출전입니다. 기드온은 3백 명을 이끌고 미디안 진영으로 내려갑니다. 여기서 기드온의 군사적인 재능이 나타나는데, 기드온은 3백 명의 손에 나팔과 빈항아리를 들게 했고 항아리 안에 횃불을 넣어서 감추어둡니다. 그리고 1백 명씩 세 무리로 나누어서 미디안 진영을 둘러싸게 합니다.
때마침 미디안의 파수꾼들이 교대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공격하기에 가장 좋은 때라 할 수 있습니다. 3백 명이 일제히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부수어 횃불을 듭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3백 명이 한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들은 단지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불며 소리칠 뿐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미디안의 군사들이 난리가 납니다. 극심한 혼란과 공포에 빠집니다. 그 모습을 세 단어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 온 진영의 군사들이 뛰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21)
더 생생하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군사들이 갈팡질팡 뛰어다녔고, 아우성치며 부르짖었고, 허겁지겁 도망하였습니다. 아수라장이 된 것입니다. 의문이 생기는 것이 있습니다. 3백 명이 횃불을 들고 소리를 지른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정신없이 두려워하며 혼란에 빠질 수 있을까요?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13만이 넘는 군대를 고작 3백 명이 둘러싸서 소리치고 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이게 무슨 소리야!’ 일어나서 나가 싸우면 되지 않을까요? 비율적으로 계산해보면, 450명이 모여 있는 곳에서 한 명이 크게 소리친다고 했을 때 그렇게 큰 일이 생길까요?
사실 미디안이 이렇게 된 원인은 3백 명이 아닙니다. 미디안 군대가 큰 혼란에 빠진 진짜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22)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미디안 연합군은 서로를 적이라 생각하고 같은 편끼리 싸웠습니다. 3백 명이 한 일은 나팔을 불며 그 시작을 알린 것뿐입니다. 3백 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수많은 군대를 무력하게 만드셨습니다. 드보라 이야기에서 이스라엘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철병거 900대를 순식간에 무력하게 만든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두려움이었던 메뚜기 떼와 같은 수많은 미디안 군대를 한순간에 무력하게 만드셨습니다.
전쟁은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숫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숫자에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몇 대 몇인지 그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 계산하고 주목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 숫자를 줄이시고 이길 수 없는 대결을 계획하십니다. 그리고 상식을 넘어서는 일을 행하시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이스라엘의 승리가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분명하게 알려주십니다.
만약에 나에게 약함이 없다면 어떨까요? 좋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나에게 유익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에게 약함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나에게 약함이 있기 때문에 내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나에게 약함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약함이 자랑이 될 수 있는 것은 나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약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갓난아기가 가장 약할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약한 갓난아기가 세상에서 어떤 사람보다 걱정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부모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아기와 함께 있어 아기의 약함은 보살피고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능력이 아기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약함이 있는데 도움 받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면 어떨까요? 어떻게 해서든 혼자서 약함을 해결해야 되고 다른 방법이 없다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나의 약함은 자랑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약함 그 자체는 자랑이 아니지만, 나에게 있는 약함이 자랑이 될 수 있는 것은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능력의 원천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내 능력과 비교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임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약함을 채우시고 역사할 때 사람들은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을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요. 그것이 정말 우리가 바라는 일 아닐까요?
내가 아니라 주님이 드러나는 것, 내가 잘해서 나의 능력이 나타나고 나의 자랑이 늘어가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나를 통해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주님의 이름 높아지는 것, 주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주님은 우리 삶의 가시와 같은 약함을 허락하십니다. 우리를 너무도 잘 아시기에 우리가 원하지 않는 약함을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함이 떠나가도록 주님께 간절히 구했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를 위해 세 번이나 간구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
이 말씀의 의미를 잘 담아낸 찬양 가사를 읽어드리면서 오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찬양인데 저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 찬양입니다. ‘가시’라는 곡입니다.
“어느 날 내 삶속에 가시가 돋아났네
불쑥 내 삶에 찾아온 가시는 나를 찌르고 또 넘어지게 해
완전하고 싶은 나를 절망으로 이끄는 가시를
버릴 수도 없고 또 안을 수도 없어서 나는 수많은 밤을
이 고통을 알기 전으로 되돌려 주시기를 눈물로 지새웠지
가시를 빼 주시기를 나를 살려주시기를
가시가 날 이끌고 간 고독한 자리에서 주님과 나만 아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보게 되는 건 내 가시를 통해 나를 붙들고 계신 주님
가시가 날 이끌고 간 은혜의 자리에서 주님과 나만 아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보게 되는 건 내 아픔이 아닌 자기 생명을 주신 사랑“
우리는 나의 약함, 나의 가시를 통해서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나를 붙들고 계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약함이 없다면 경험 수 없는 은혜를 만나게 됩니다. 그 모든 아픔을 친히 경험하면서 나에게 생명을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의 약함을 통해 보게 되는 것은 약함 그 자체가 아니라, 나의 약함을 아시고 그 약함을 사용하셔서 뜻을 이루시는 주님입니다. 나의 약함을 통해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나의 약함이 나를 겸손하게 하며 나의 약함으로 오직 주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에 우리는 약함을 은혜라 말할 수 있습니다. 약함을 자랑하며 주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연약한 부분이 있으십니까? 그 또한 은혜입니다. 그러니 그 약함을 통해 영광 받으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나에게 있는 약함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약함으로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알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따뜻한 손길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격려하십니다. 주님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 능력을 기대하며 다시 일어나 주님의 영광을 위해 달려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