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는 이유
본문: 고린도후서 12장 1-10절
설교자: 조정의
우리는 보통 약한 것들을 기뻐하거나 자랑하지 않는다. 남들보다 낫다고 여기는 것들을 좋아하고 자랑한다(나이, 재물, 지혜, 재물, 명성).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은 “나를 위하여는…자랑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단호하게 말했다(5절). 그는 나아가 남들이 전혀 경험하지 못한 자신만의 강력한 경험을 자랑하지 않는 대신, 자신의 약한 것들에 대해서는 자랑한다. 이것은 당시 고린도 교회를 장악했던 거짓 사도(교사)와 완전히 구별되는 특징이었다. 그들은 혈통을 자랑했다(히브리인, 이스라엘인, 아브라함의 후손, 11:22). 그들은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직분을 내세웠다(11:23). 바울은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자신도 그들과 같이 자랑할 것이 있다고 변호하면서, 다른 교훈으로 교회를 망치는 거짓 교사들을 압도할 만한 자신의 경험을 최초로 고백한다.
1. 바울이 자랑하지 않은 것(1-6절)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2-3절). 바울이 ‘안다’고 반복하여 말한 “한 사람”은 바울 자신이다. 본인만 알 수 있는 정보가 가득하다(개인 회상: “십사 년 전”, 개인 경험: ‘몸 안 또는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신다’). 이것이 바울의 경험이라는 증거는 1절에도 나온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셋째 하늘(낙원, 4절)에 이끌려 간 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4절) 즉 주의 환상과 계시를 들었고, 7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다고 했다.
바울이 본 환상과 들은 계시는 너무나 신비롭고 놀라운 것이었다. 사도 요한도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천상에 관한 환상과 계시를 듣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는데, 지극히 큰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울고, 떨고, 두려워하고, 엎드리고, 놀라며 기뻐했다. 요한이나 바울처럼 하나님의 환상과 계시를 낙원에 직접 이끌려 가서 받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무엇보다도 고린도 교회에서 자신을 높이려고 여러 자랑거리를 내세운 자들의 입을 단번에 다물게 할 대단한 무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은 이 엄청난 무기를 자랑하지 않으려고 무척 애쓴다. 그는 철저하게 삼인칭을 사용하여 타인의 경험을 말하는 것처럼 진술하려고 노력한다(한 사람, 이끌려 간 자, 그, 이런 사람). 그리고 이 경험 자체는 진실로 자랑할 만하다고 인정하면서도(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자신을 위하여는 하지 않겠다고 결단한다: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5절). 이 특별한 경험 자체가 거짓이라 그런 게 아니다(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6절).
그런데 그는 왜 이 참된 자랑거리를 대놓고 내세우지 않는가? 유익하지 않아서다. 바울은 1절에서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한다고 했다. 왜 이것을 말하는 것이 무익한가? 먼저는 하나님이 말하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사람이 말해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우리말 성경), 4절). 그리고 또 다른 답은 6절에 있다: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자랑하려는 것을 멈추겠다). 바울은 자신이 지나치게 생각되는 것을 염려했다. 자기 능력이 대단하고 자기 지혜가 놀라운 것처럼 사람들이 받아들일까 두려워했다. 그래도 부득불 자랑한 이유는, 거짓 사도와 교사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그들을 앞세우면서 복음과 다른 거짓 교훈으로 교회에 해악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을 압도할 만한 경험과 환상과 계시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자랑하려고 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내세우려 했지만, 바울은 하나님이 드러나시는 데 방해가 된다면 자신이 내세울 만한 경험까지도 숨기려 했다. 이런 구별된 태도는 이어지는 본문에서 바울이 적극적으로 기뻐하며 자랑하는 것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2. 바울이 기뻐하고 자랑한 것(7-9a절)
앞서 말한 것처럼 바울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컸다. 그래서 바울은 “너무 자만하게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고 말했다(7절). 많은 사람이 “육체에 가시”를 주셨다는 표현 때문에 바울의 육체 속에 가시처럼 박힌 질병 따위의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 추측한다(간질, 눈병). 그러나 이어지는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는 표현은 인격체(남성형, 앙겔로스) 즉 사탄이 바울을 훼방하고 고통스럽게 하기 위하여 사용한 사람을 말한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실제로 “가시”로 번역된 단어(스콜롭스)는 70인역에서 세 번 모두 이스라엘 백성을 탄압하는 이방 민족과 방해 세력을 가리킬 때 사용됐다(민 33:55; 호 2:6; 겔 28:24).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통하여 자신을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신다고 확신했다(7절).
바울은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이것을 없애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하나님께 구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8절). 그리고 이러한 기도 응답을 받았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9절). 한마디로 ‘안 돼’라는 응답이다. 잠깐, 바울이 주를 위하여 어떤 수고를 했는가?(고후 11:23-28). 이렇게 충성하는 종이 괴로워서 제발 옮겨달라고 간구한 것을 하나님은 어떻게 이렇게 냉정하게 거절하시는가?
“내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라는 말은 1) ‘지금까지 충분했다’ 2) ‘지금이 충분하다’로 해석된다. 1) ‘너의 요구를 거절해도 나는 이미 충분히 은혜를 베풀었다’ 2) ‘너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 오히려 지금 나의 은혜를 충분히 너에게 주는 것이다’라는 의미다. 뒤따르는 설명이 후자의 의미가 맞다는 것을 확실하게 한다. 바울이 사탄의 가시로 공격을 받고 연약한 자로 여겨지고 능욕과 고통을 받고 궁핍한 상황에 처하는 것이 더 온전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그 가운데 분명히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바울이니까, 바울이라면 저런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 당연하지’가 아니라 ‘바울은 흠모할 만한 것도 특별해 보이는 것도 없지만, 그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이 분명해’라고 고백하게 하는 것이다. 가시는 바울이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온전하게 경험하게 하고 그분의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누리게 하는 은혜의 도구였다. 바울은 이를 깨닫고 다음과 같이 크게 기뻐하며 고백했다.
3. 바울이 자랑한 이유(9b-10절)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9b-10절). 바울은 자신의 여러 약한 것들을 기뻐하고 자랑했다. 그 안에는 능욕(모욕, 피해), 궁핍(환난, 필요), 박해(핍박), 곤고(고난, 어려움) 등이 포함됐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어려움들과 사탄의 사자로 공격받는 어려움 등 다양한 원인으로 바울을 연약하게 만들고 연약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모든 것을 망라한다.
왜 그것이 크게 기뻐하고 자랑할 이유가 되는가? 바로 그 약한 것들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그에게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머문다’는 것은 ‘거주한다’의 의미를 갖는데, 구약시대 성막과 성전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님은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능력으로 거주하신다. 연약한 우리 안에 강력한 은혜로 함께하신다. 이것은 바울이 그토록 닮기 원했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법칙이기도 하다. 주님은 바울처럼 세 번 아버지께 심판과 저주의 잔을 ‘내게서 떠나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셨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당하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능력과 은혜가 충만하게 드러나는 길이라고 응답하셨다. 그리고 아들이 그 연약한 것들을 기뻐하며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랑하셨을 때,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충만한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풍성하게 머물게 되었다(엡 1장, 빌 2장). 이것이 바로 복음의 공식이다. 우리가 약한 그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가 이루어진다.
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에게 고난을 주실까? 자기 백성이 탄탄대로를 걷고 무병장수하고 세상이 원하는 복을 빠짐없이 누리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고 하지 않을까?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도 항상 크게 기뻐하고 복의 근원인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을까? 왜 주님은 우리에게 약한 것들을 주실까? 죄인의 특성을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이다. 죄인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것들과 바꾼다. 조물주가 아니라 피조물을 더 경배하고 섬긴다(롬 1:23, 25). 그러므로 연약한 육체를 입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복되고 선한 길은 하나님이 주시는 무언가가 아니라 하나님 그분을 구하고,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이 아니라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 약한 것들을 허락하신 이유는 그분의 은혜를 우리 안에 충분히 머물게 하시려는 것이고, 또 그분의 능력이 우리 안에 더욱 온전히 나타나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것을 가장 기뻐하고 또 자랑한다.
파도 앞에서, 어떤 이는 두려워하고 어떤 이는 기대하며 기뻐한다. 겹겹이 몰아치는 파도처럼 인생의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을 만난 성도가 ‘힘들긴 하지만, 오히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실지 정말 기대됩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서핑의 달인이 되어가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이 약한 데서 아버지의 전능하심과 풍성한 은혜를 가장 강력하게 드러내신 것처럼, 우리도 약한 것들을 발견할 때마다, 바울처럼, 주님처럼 크게 기뻐하고 하나님을 자랑하게 해달라고 구하자. 자기 독자를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 항상 풍족한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 안에 머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