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전에…
본문: 창세기 32장 1~21절
설교자: 이병권

산 넘어 산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설교를 마치고 나면 또 다음 설교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런데 다음 설교 본문이 너무 어려운 겁니다. 그럴 때 ‘산 넘어 산이다’라는 말을 실감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힘든 일을 겪고 나면 좀 괜찮아질까 했는데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고 더 힘든 일을 만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상황이 그러합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에 들어서자마자 에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반’이라는 산을 넘었는데, 그 산 너머에 ‘에서’라는 더 큰 산이 있습니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에서가 여전히 마음에 분을 품고 야곱을 죽이려고 한다면, 야곱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야곱은 자신이 왔던 길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다시 라반에게 돌아갈 수도 없고, 에서와의 만남을 피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야곱은 어떻게 했을까요? 오늘 본문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은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전에…”입니다.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전에 무엇을 했는지 살펴보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전에 한 일을 세 단어로 생각할 수 있는데, 세 단어는 이러합니다. “사자, 기도, 그리고 예물”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의 제목을 따라 했습니다. 다만 말씀에 나오는 사자는 어흥, 사자가 아닙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자는 소식을 전하는 사람, 심부름꾼이라는 의미의 ‘사자’를 말합니다.

그럼 이 세 단어를 중심으로 본문을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단어 ‘사자’입니다.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1-2) 야곱에게는 정리하지 못한 일이 있습니다. 해결할 수 없었던 일, 20년 동안 마음 한 구석에 묻어 두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일을 직면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에서를 만나야 합니다. 그 일이 야곱을 두렵게 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야곱이 천사들을 만난 것입니다. 야곱은 이 천사들을 보고 “하나님의 군대라고 말하는데, 수많은 천사들이 무리를 지어서 ‘진영’을 이룬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군대’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마하네라고 하는데, 특별히 계속 반복되기 때문에 말씀드립니다. 이 마하네는 진영이라는 뜻으로, 오늘 본문에서는 ‘군대’, ‘떼’, ‘무리’ 등 다양하게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 땅의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마하네의 복수형입니다. ‘두 진영’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야곱이 천사들을 보고 ‘하나님의 진영이다’라고 말했고, 그리고 그 땅을 ‘두 진영’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두 진영일까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천사들이 두 진영으로 있었다는 견해입니다. 다른 하나는 천사들의 진영 하나와 야곱의 가족들의 진영 하나, 이렇게 두 진영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견해 중에 저는 두 번째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오늘 설교의 마지막에 설명하려고 합니다. 제가 마하네라는 히브리 단어까지 말하면서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저자가 ‘진영’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쓰면서 전하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 역시 마지막에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천사들을 만난 야곱, 본문의 표현대로 하면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난 야곱은 이제 무엇을 합니까? 재미있게도 야곱도 에서에게 사자들을 보냅니다. 사자들을 만난 야곱이 사자들을 보내는 것입니다. 에서가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야곱은 그 사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4-5)

야곱은 에서에게 은혜를 받기 위해 두 가지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동안 자신이 외삼촌 라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고,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에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은혜를 받기를 원한다면서 왜 이런 말을 할까요? 에서를 놀리는 것처럼 들리지 않으십니까? 그동안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몰랐지? 외삼촌 라반의 집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재산을 엄청나게 많이 모았어이렇게 말하면서 은혜 받기를 원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야곱이 이런 말을 전한 것은 야곱이 그동안 에서 모르게 뒤에서 일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라반의 집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미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으니 아버지의 유산을 챙기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서가 자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적대적인 감정을 조금이라도 낮추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자들을 보낸 야곱에게 돌아온 것은 무엇입니까? 에서가 400명을 이끌고 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당시 상황에서 400명은 상당한 규모의 군대입니다. 지난 20년 동안 에서도 야곱만큼이나 크게 번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에서는 군사력을 키우는데 더 많은 노력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야곱과 에서가 처음 소개될 때 이미 언급된 사실입니다. 야곱과 달리 에서는 능숙한 사냥꾼으로 자랐습니다(창25:27)

그런 에서가 지금 많은 군대를 이끌고 야곱에게 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야곱에게 너무도 두려운 일이고, 가슴 답답한 일입니다. 야곱은 에서를 대항해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에서를 이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고민하다가 자신의 진영을 두 진영으로 나눕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8) 지혜로운 선택일까요? 고민 끝에 내린 현명한 판단일까요? 여러분이 지금 야곱과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다행스럽게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전에 한 일은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본문에서 생각할 수 있는 두 번째 단어는 ‘기도’입니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9-12)

야곱은 곧 다가올 위험을 앞두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야곱의 이 기도는 모범적인 기도이며 야곱이 위험에서 벗어나는 올바른 방법을 알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야곱의 기도를 통해서 몇 가지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신 약속에 대해서, 자신도 그 약속의 대상자라는 것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은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9) 주께서 말씀하시기를…“(12)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래서 이 기도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기도를 다르게 만듭니다.

둘째로 야곱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합니다. 10절에 보면,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신 일에 대해서, 과거에 자신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지금 자신이 어떠한지를 돌아봅니다. 야곱은 지팡이만 가지고 집을 떠나 라반에게로 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크게 번성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서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할 때 이처럼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로 야곱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아뢰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에서에 대한 두려움을 고백하며 에서의 손에서 건져주시기를 구합니다. 자신의 현실과 상황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기도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닌 척, 괜찮은 척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 그 앞에 다 토로할 수 있는 것이 기도의 특권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야곱은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야곱에게 있었던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한 후에 에서를 달래기 위해 머리를 씁니다.

본문에서 생각할 수 있는 세 번째 단어는 ‘예물’입니다. 기도한 후에 야곱은 에서를 위해 예물을 준비합니다. 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13) 야곱이 고른 예물은 이러합니다. 암염소 200마리, 숫염소 20마리, 암양 200마리, 숫양 20마리, 낙타 30마리와 그 새끼들, 암소 40마리, 황소 10마리, 암나귀 20마리, 새끼 나귀 10마리, 총 계산하면 550마리가 넘습니다. 실제로 이 많은 동물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정신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움직이는 동물농장입니다.

야곱은 이 많은 예물을 주기 위해서 치밀한 계획을 세웁니다. 이 예물을 여러 떼로 나누어서 자신보다 먼저 이 예물을 순서대로 보내고, 각 예물을 맡은 종들에게 미리 에서에게 전할 말을 일러줍니다. 야곱의 계획은 기발합니다. 선물을 한 번에 다 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서 어느 정도 뜸을 들이며 나누어 줍니다. 그러면서 에서가 조금씩 마음의 변화를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마치 많은 짐승들로 에서를 에워싸서 꼼짝 못하게 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야곱이 예물을 통해 얻으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20)

여기 20절에 똑같은 단어가 네 번이나 나옵니다. 우리성경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데, ‘얼굴’이라는 단어가 네 번 나옵니다. 번역을 하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좀 직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내 앞으로(앞이라는 말이 얼굴 앞이라는 말입니다) 보내는 예물로 그의 얼굴을 덮은 후에 그의 얼굴을 보면 아마 그가 나의 얼굴을 들게 할 것이다.‘

야곱이 예물을 보내는 이유가 이러합니다. 야곱의 얼굴이 있고 에서의 얼굴이 있습니다. 이 두 얼굴은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대로 만나면 야곱의 얼굴은 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의 얼굴보다 먼저 예물을 보냅니다. 그 예물이 에서의 얼굴을 가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의 얼굴이 에서의 얼굴을 만났을 때도 얼굴을 들 수 있습니다.

 

야곱이 보낸 예물은 효과가 있을까요? 야곱이 생각한대로 에서의 얼굴을 덮을 수 있었을까요? 야곱은 예물을 보내고 자신의 진영에서 밤을 보내게 되는데, 그 날 밤에 엄청난 일이 벌어집니다.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전에…” 그 두 번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에서를 만나야하는 위험하고도 피할 수 없는 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무엇을 했습니까? 야곱은 자신의 진영을 둘로 나누어서 만일의 일을 대비합니다. 그리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의지하며 나아가 은혜를 구한 것입니다. 그런 후에 야곱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치밀하게 계획했고, 그 일을 즉시 실행합니다. 에서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선물을 아낌없이 보냈던 것입니다. 야곱은 이 모든 일을 하면서 에서와의 만남을 준비합니다. 야곱이 한 일을 두고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그럼 우리도 이렇게 하면 될까요?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 야곱처럼 해야 할까요? 머리를 써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뭔가 상황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없는지 고민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될까요? 네, 그렇게 하면 됩니다. 야곱이 그렇게 했고,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것을 하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내 나름의 공식을 가지고 이렇게 하면 이런 답이 나올 거야 예상합니다. 머리를 짜내며 계산합니다. 계산기를 두드리며 뭐가 더 이득인지 따집니다. 그래서 상황이 나아집니까? 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내 생각대로 원하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만, 하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뭘까요? 야곱이 얼마나 많은 예물을 보냈는가? 이게 중요할까요? 아니면 야곱이 얼마나 간절히 오랫동안 기도했느냐 하는 걸까요? 아니면 야곱이 얼마나 바람직한 내용으로 기도했느냐 하는 걸까요? 아니면 야곱이 얼마나 치밀하게 에서를 만날 준비를 했느냐 하는 걸까요?

초점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오늘 본문 처음부터 시작해서 계속 ‘마하네’라는 말로 반복되며 나타납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이 거기에 있습니다. 야곱은 ‘마하나임’, 두 개의 ‘마하네’를 보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야곱은 먼저 하나님의 ‘마하네’을 보았습니다. 세상 어떤 군대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그러면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두려워 할 필요가 있을까요?

야곱이 본 또 하나의 ‘마하네’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진영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마하네’에 대해서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지팡이만 가지고 집을 떠났었는데, 지금은 두 떼를 이루었습니다(10). 이게 누가 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하셔서, 그가 큰 진영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야곱이 직접 눈으로 보며 고백했던 “마하나임” 그것은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이고, 또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그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야곱이 봤던 수많은 천사들, 천사들을 본 것이 야곱에게 있어서 처음 있는 일인가요? 전에 이와 비슷한 일이 또 있지 않았나요? 어디서 그 일이 있었죠? 혼자서 집을 떠나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으로 가고 있던 야곱, 두려워하고 있던 야곱에게 수많은 천사들이 나타났습니다. 어디서 있니까? ‘벧엘’입니다.

지금 창세기의 저자는 ‘마하나임’과 ‘벧엘’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특별히 1절에 “하나님의 사자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와 똑같은 표현은 구약에서 ‘벧엘’의 사건 때에만 나옵니다. 구약에서 천사를 기록할 때 흔히 ‘여호와의 사자’로, 드물게 ‘하나님의 사자’로 기록합니다. 그런데 복수 형태로 ‘하나님의 사자들’이라고 나오는 건 ‘마하나임’과 ‘벧엘’이 두 사건뿐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겁니까? 하나님이 야곱에게 하셨던 약속. 그 약속이 이루어졌고, 또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하나님이 끝까지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무엇이 중요한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시작부터 바꾸십시오. 나로부터 시작하면 답이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십시오. 그 때에 우리는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고,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약속하셨나? 그것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전에 많은 일을 했습니다. 무엇이 제일 중요합니까? 시작이 누구죠? 야곱인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야곱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하네’를 야곱에게 보내셔서 그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하셔서 야곱이 ‘마하네’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 두 개의 ‘마하네’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마하나임”입니다. 그 모든 일 가운데 그 일을 이루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만나는 어려운 일들, 그 어려운 상황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나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나 중심의 생각에서 하나님 중심의 생각으로 바꾸어보십시오. 나를 먼저 생각하고 나 중심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한 없이 작아질 뿐입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나?’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나?’ 이것이 정말 중요한 질문이고, 정말 필요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 하나님이 무엇을 약속하셨는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기에 지금까지 그러하셨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고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때로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지만, 그 어려움을 주님 안에서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약속을 성취해 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남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약속이 아니면, 내가 무엇을 하든, 내가 어떻게 하든, 내가 얼마나 하든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에 그 모든 것이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고 힘이 있고 올바른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약속을 기억하고 약속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이고,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비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