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실패보다 위험한 성공
본문: 사사기 8장 1절 ~ 35절
설교자: 이병권
사람은 누구나 성공을 원합니다. 더 많이 성공하기 위해서 그리고 더 조금 실패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런데 누구나 성공을 바라고 성공을 위해 살아가지만 성공을 이룬 다음에 오는 위험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고난을 견디는 사람은 많지만, 풍요를 견디는 사람은 적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패를 딛고 성공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성공을 딛고 성숙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실패를 통해 겸손을 배우기는 쉽지만, 성공을 통해 겸손을 배우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실패보다 더 무서운 것은 성공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큰 승리를 거둔 기드온을 살펴보았습니다. 기드온과 함께 한 사람은 불과 300명이었지만, 기드온은 그 300명으로 13만 5천명과 싸워서 이기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기드온이 승리한 다음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지금 기드온은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로서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공이라는 위험한 선물을 받은 기드온, 그는 과연 어떤 자세로 성공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성공을 대처할까요? 오늘 본문에 기록된 세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공이라는 선물을 받았을 때, 뭔가 잘 되고 있을 때, 풍요로운 환경, 특별한 문제가 없는 상태에 있을 때, 삶의 크고 작은 성공들을 경험할 때, 우리가 어떻게 계속해서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과 겸손함을 이어갈 수 있을지 생각해보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사건입니다.
승리한 기드온에게 에브라임 사람들이 찾아와 말합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1)
힘 있는 지파 중에 하나였던 에브라임 지파가 뒤늦게 전쟁에 참여했는데 그에 대해서 불평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공로가 기드온에게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상황이라면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겠습니까? 기드온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하니라 기드온이 이 말을 하매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풀리니라“(2-3)
기드온은 예의 바르고 지혜롭게 대응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입니다. 겸손하게 대합니다. 상대의 무례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싸우지 않고 평화를 추구합니다.
에브라임은 도망가는 미디안의 두 장군, 오렙과 스엡을 잡았는데 기드온은 에브라임이 한 그 일을 치켜세워주며 자신이 한 일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이라고 높여줍니다. 기드온의 이러한 겸손은 에브라임의 분노를 풀리게 했습니다. 자칫 이스라엘끼리 싸우고 갈라지는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는데 그런 위험을 기드온이 평화적으로 잘 막은 것입니다.
12장에 가면 에브라임이 뒷북치며 불평하는 태도가 한 번 더 나옵니다. 기드온에게 했던 것처럼 입다에게도 불평하는데 입다는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 결과 에브라임의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와 비교하면 지금 기드온은 확실히 성숙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사건입니다.
에브라임과의 문제를 현명하게 처리한 기드온은 전쟁에서 패하고 도망간 미디안 사람들을 쫓아갑니다. 적들을 따라가 공격하고 달아나는 적들을 또다시 쫓아갑니다. 이정도로 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기드온은 미디안의 두 왕을 잡기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두 왕을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세바와 살문나가 도망하는지라 기드온이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고 그 온 진영을 격파하니라“(12)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기드온은 포기하지 않고 미디안의 왕을 잡기까지, 적을 완전히 소탕하기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힘들지만, 피곤하지만, 배가 고프지만, 많은 수고가 따르지만, 그 어려움들을 다 극복하고 적의 왕들을 사로잡습니다.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충성스러운 기드온을 성공이 주는 위험에서 승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세 번째 사건입니다.
미디안의 두 왕까지 무찌른 기드온은 전쟁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말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하는지라“(22)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드온이 미디안의 손에서 자신들을 구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기드온에게 요청합니다.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이게 무슨 말일까요? 단순히 당신이 우리를 다스려 달라는 것이 아니라 기드온을 비롯한 기드온의 자손까지 우리를 다스려 달라고 합니다. 이 말은 비록 ‘왕’이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백성들은 기드온에게 이방나라들처럼 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 요청에 대해서 기드온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23) 정말 멋진 말입니다. ‘내가 아니라 우리의 왕으로 계신 하나님이 너희를 다스릴 것이다.’ 기드온이 큰 승리를 거두고 성공을 경험하고 있을 때, 충분히 유혹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백성들에게 했던 말입니다. 기드온은 정말 중요하고 백성들이 꼭 들어야 하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본문의 세 사건을 간단하게 살펴봤습니다.
기드온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겸손하고 충성스러우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성숙한 사람입니다. 이 정도면 성공에 대해서 훌륭하게 대처했고 성공이 주는 위험을 극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가 이것만 보고 말한다면 그렇게 평가할 수 있겠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세 사건과 함께 봐야 하는 것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 전부를 함께 봐야지 기드온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혹시, 여기까지만 말씀을 들으면 오늘 말씀을 완전히 오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기드온에게는 반전의 모습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반전을 매력이라고 말하는데 기드온의 반전은 매력이 아니라 충격입니다. 우리에게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럼 기드온의 진짜 모습을 보기 위해 세 사건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첫 번째 사건입니다.
첫 번째 사건에서 봤던 기드온의 모습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첫 번째 사건만으로는 알기 어려웠던 기드온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겸손한 태도를 보이며 같은 이스라엘 민족과 싸우지 않았던 기드온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에는 너무도 다른 기드온을 발견합니다. 기드온이 300명과 함께 도망가는 적을 쫓고 있을 때 숙곳이라는 곳에 이릅니다. 기드온과 함께한 사람들이 배고픈 상태로 지쳐있었기 때문에 기드온은 숙곳의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청합니다. 그 요청에 대해서 숙곳의 지도자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숙곳의 방백들이 이르되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 하는지라”(6)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그동안 미디안에게 압제 받았던 숙곳 사람들은 미디안의 눈치를 봅니다. 기드온을 도와줬을 때 받을 수 있는 미디안의 보복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미디안의 왕들을 이미 사로잡은 것이 아니라면 미디안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도와줄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기드온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에브라임에게 했던 것처럼 겸손하고 지혜로운 방법으로 설득하는 모습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기드온의 행동은 완전히 다릅니다. “기드온이 이르되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넘겨 주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 하고“(7)
기드온이 한 말은 굉장히 강하고 잔인한 말입니다. 특별히 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에게 쌓인 게 많아서 이러는 걸까요? 아닙니다. 기드온은 브누엘로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도 같은 요청을 합니다. 그리고 같은 대답을 듣습니다. 그러자 기드온이 말합니다. “기드온이 또 브누엘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에 이 망대를 헐리라 하니라”(9) 자신을 홀대한 것에 대해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엄포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은 이방사람들이 아닙니다.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반응이 이러합니다. 물론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의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위험이 있더라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기드온에게 고마워하며,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도와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기드온이 보여주는 태도는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것입니다. 만약 기드온이 에브라임에게 했던 것처럼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고 한다면 이렇게 말해야 했을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며 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으니 미디안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설득하는 과정이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말한 그대로 그들에게 행합니다. “그 성읍의 장로들을 붙잡아 들가시와 찔레로 숙곳 사람들을 징벌하고 브누엘 망대를 헐며 그 성읍 사람들을 죽이니라“(16-17)
기드온은 동족을 죽이는 사사가 되었습니다. 이방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오히려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대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사건을 다시 생각하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기드온은 같은 편끼리 싸우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를 수 없는 상대와 싸우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힘이 있었기 때문에 기드온이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싸우지 않은 것입니다. 기드온이 평화를 위해서 혹은 동족을 위하는 마음으로 했던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은 기드온이 상대할 수 있는 약한 위치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나를 무시해? 그래 내 힘을 보여주마!’악으로 갚아준 것입니다.
다음으로 다시 두 번째 사건입니다.
기드온은 포기하지 않고 미디안의 두 왕을 잡기 위해 수고했습니다. 그럼 이렇게 끈질기게 추격하며 미디안의 왕들을 잡았던 이유가 뭘까요? 맡겨진 일에 대한 충성일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그가 세바와 살문나에게 말하되 너희가 다볼에서 죽인 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더냐 하니 대답하되 그들이 너와 같아서 하나 같이 왕자들의 모습과 같더라 하니라“(18)
기드온이 사로잡은 미디안의 왕들에게 다볼에서 죽인 자들을 묻습니다. 두 왕은 자신이 죽인 자가 기드온과 같은 왕자들의 모습이었다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이 전쟁이 있기 전에 미디안 왕이 다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였는데 그들이 죽인 사람이 기드온의 형제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말합니다. “그가 이르되 그들은 내 형제들이며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니라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만일 그들을 살렸더라면 나도 너희를 죽이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19) 지금 기드온은 그들에게 복수를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을 죽였으니 나도 너희에게 갚아주겠다고 하는 겁니다.
기드온은 복수의 의미를 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자기 집안의 명예 회복시키고 미디안 왕들에게 수치를 더하기 위해서 맏아들에게 왕들을 죽이라고 명합니다. “그의 맏아들 여델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들을 죽이라 하였으나 그 소년이 그의 칼을 빼지 못하였으니 이는 아직 어려서 두려워함이었더라“(20) 기드온의 아들은 아직 어렸기에 두려워서 왕들을 죽이지는 못합니다. 결국 기드온이 직접 두 왕을 죽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드온이 두 왕을 절실히 쫓았던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끝까지 두 왕을 쫓았던 것은 복수를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목적이 자신에게 있었고 개인적인 욕망에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세 번째 사건입니다.
기드온이 백성들에게 정말 멋진 말을 했습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청을 거절하며 분명하게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릴 거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잘 살펴봐야 하는 것은 이 말을 믿을 수 있나 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말이 진심이라면 당연히 행동으로 증명될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기드온이 하는 행동들은 그가 했던 말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왕이 되는 것을 말로는 거절했지만, 실제로는 왕이 되어 있습니다.
기드온이 어떤 일을 했을까요?
첫째, 기드온은 전리품을 자신이 취합니다.
“기드온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요청할 일이 있으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내게 줄지니라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마엘 사람들이므로 금 귀고리가 있었음이라“(24) 여기서 갑자기 이스마엘 사람이라고 언급되는데 미디안 사람과 같은 말로 볼 수 있습니다. 미디안 족속은 이스마엘의 후손인데, 그들이 금귀고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들을 죽이고 금귀고리를 탈취했던 것입니다.
기드온은 백성들에게 탈취한 금귀고리를 요구합니다. 이렇게 해서 기드온이 받은 금의 무게가 천칠백 세겔입니다. 대략 19킬로가 되는 무게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드온은 미디안 왕이 입었던 자색 의복과 장식들을 가집니다. 왕을 상징하는 의복과 그 장식을 스스로 취한 것은 의미가 있는 행동입니다.
둘째, 기드온은 금으로 에봇을 만듭니다.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27) 에봇은 대제사장이 입는 옷입니다. 대제사장이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입어야 했고 또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서 자기 성읍에 둡니다. 기드온이 한 이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일을 생각나게 합니다. 결국 기드온은 자신이 있는 곳을 특별한 곳으로 만들고, 백성들이 자신을 주목하게 만듭니다. 또 하나의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셋째, 기드온은 많은 아내를 둡니다.
“기드온이 아내가 많으므로 그의 몸에서 낳은 아들이 칠십 명이었고”(30) 기드온은 왕이 하는 것처럼 많은 아내를 둡니다. 기드온이 그 아내들을 통해 낳은 아들만 칠십 명이 되는데, 아내뿐만 아니라 첩을 통해서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특별히 첩을 통해 낳은 아들의 이름이 “아비멜렉”입니다. 그 이름의 뜻이 ‘내 아버지는 왕이다’입니다. 누가 왕이라는 말입니까? 기드온이 왕이라는 말입니다.
기드온이 왜 이런 일들을 했을까요? 삶의 중심이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기준도, 삶의 목적도, 삶의 이유와 동기도 모두 나 자신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냐? 옳지 않은 일이냐?’ 이것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중심이니까 행동의 기준도, 선택의 기준도 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내 입맛대로 행하며 사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영광을 위한 목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삽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위해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바뀝니다. 어느새 내가 목적이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삶의 목적이 바뀌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나의 욕망을 숨기고 겉으로는 그럴 듯하게 포장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그 목적을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래도 정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정답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왕이시라고, 하나님이 다스리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행동은 다릅니다. 삶을 움직이는 동기가 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알고 있는 답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내가 말한 답으로 살지는 않습니다. 내 삶의 중심이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기드온의 삶이 그러합니다.
성공은 우리를 이런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에 차이를 만들고 점점 더 그 차이를 크게 하는 겁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다고 말하면서 다른 것으로 만족을 구합니다. 주님이 나의 목자라고 말하면서 다른 것을 의지합니다. 주님이라고 말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왕이라고 말하면서 교묘하게 내가 왕이 될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가 에봇을 만들어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기드온을 보십시오. 기드온이 자신의 약함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함으로 승리했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하지만 성공한 후에는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에봇을 만들고 자신이 왕이 되어 버렸습니다.
비록 그 땅이 평온했지만 그 평온은 온전한 평온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 빠진 평온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사라진 평온입니다. 이러한 평온에 빠져 만족하고 있다면 그런 평온은, 그런 성공은 차라리 없는 편이 더 낫습니다.
우리는 성공을 통해 너무도 쉽게 잊어버립니다. 나를 부르시고, 나를 붙드시고, 나에게 확신을 주시고, 나에게 승리를 주신 분을, 나에게 성공을 허락하신 분을 잊어버립니다. 나에게 공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삶의 주인이 내가 되어서 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셨고, 함께하고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성공이 위험한 것은 그 가운데 함께 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내가 이루어낸 성과라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과 성공이 가져오는 만족과 부와 명예, 안락함과 자기 자랑은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앉게 되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니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실패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성공했다면 우리는 더 많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은 세상의 성공보다 세상의 부와 명예보다 하나님 뜻에 따라 사는 것을 최우선 순위에 두셨습니다. 순종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두셨고, 말씀하신 그대로 사셨습니다. 사탄이 보여주는 천하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거절하셨습니다. 왕이신 분께서 왕의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셨습니다. 자기 생명을 내어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은 성공에 대한 우리의 욕심과 성공이 주는 위험에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 주님을 바라보며 겸손히 주님을 의지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