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소속이 어디입니까?
본문: 사사기 19장 1절~30절
설교자: 이병권
누군가에게 소속이 어디냐고 묻는 것은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 같은데 사실은 우리가 때때로 만나는 질문입니다. 잘 모르는 누군가를 알기 위해 하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할 때가 많습니다. ‘어디서 오셨어요?’
상황에 따라 내가 사는 지역을 말할 때도 있고,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말할 때도 있습니다. 어떨 때는 나의 직업이나 내가 하는 일을 말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양하게 나에 대해서 말할 수 있고 나의 소속을 밝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서 영적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소속이 어디입니까?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하늘에 소속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나를 봤을 때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다른 사람들과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다르다는 평가를 할까요?
소속이 다른 두 사람을 놓고 지켜본다면 자연스럽게 구분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공군에 속한 사람과 해군에 속한 사람을 지켜본다면 분명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두 사람을 보는데 그 모습이 다르지 않다면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아마 두 사람이 같은 소속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가치나 삶의 목표가 그들과 다르지 않다면, 시간을 쓰는 것과 돈을 쓰는 것,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면 어떨까요? 우리의 소속이 어디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소속이 어디입니까?’
사사기를 보면 정말 소속을 알 수 없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보기가 어려운, 그렇게 부르기가 민망한 백성들입니다. 특히 결론 부분에서는 그러한 이스라엘의 타락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소속을 알 수 없는 백성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사기 첫 번째 결론이 종교적인 타락을 중심으로 기록했다면 오늘부터 살펴볼 두 번째 결론은 도덕적인 타락을 중심으로 기록합니다.
특히 두 번째 결론 부분은 너무도 끔찍합니다. 타락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잔혹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성경은 이렇게 인간의 악함을 그대로 기록하면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얼마나 추악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어떤 사건들이 벌어지는지 살펴보면서 배울 수 있는 교훈과 경계해야 할 것을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1)
사사기의 모든 문제의 원인이 언급되면서 두 번째 결론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문제의 원인은 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행하는 것, 그것이 문제의 원인입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한 사람이 소개됩니다. 레위 사람입니다. 첫 번째 결론에서 레위 청년이 사건의 중심에 있었는데 두 번째 결론에서도 레위 사람이 사건의 중심에 있습니다. 이 레위 사람은 에브라임 산지 외딴 곳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는 베들레헴 출신의 여인을 첩으로 맞이합니다. 아내가 임신을 하지 못할 때 첩을 얻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아내 외에 성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 첩을 두었습니다. 당시에는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하나님이 계획하신 가정의 모습은 아닙니다.
또한 사사기에서 첩이 기록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첩을 두어서 큰 어려움을 당한 일이 이미 기록된 적이 있습니다. 기드온이 첩을 두었고 그 첩으로부터 얻은 아들이 아비멜렉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은 그의 이복형제들 70명을 죽이는 일을 했었습니다.
그러니 이 레위 사람이 첩을 두었다는 언급을 좋게 볼 수 없습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안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불안감은 이렇게 현실이 되어 갑니다.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 동안을 지내매”(2)
첩이 남편을 떠나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말씀에는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났다고 합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첩이 바람이 나서 다른 남자를 만나기 위해 처가로 갔다는 말일까요? 아니면 다른 남자를 만나서 남편의 미움을 받아 쫓겨났다는 말일까요?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이 말씀을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3절에 레위 사람은 첩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첩을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오려고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범죄하고 집으로 돌아온 딸을 넉 달 동안 데리고 있습니다. 여기 말씀이 음행이라고 되어 있기에 상황이 잘 맞지 않는 것입니다. 첩이 음행했다면 남편은 왜 그녀를 찾으러 처가에 갔을까요? 그것도 그녀의 마음을 달래서 데려오려고 했을까요?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단어에 필사자의 실수가 있었음을 말합니다. 마지막 한 획을 붙여 쓰느냐 떨어지게 쓰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데, 다르게 읽을 경우에는 ‘음행하다’가 ‘화가 나다’, ‘미워하다’는 뜻이 됩니다. 공동번역과 새번역은 필사자의 실수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번역을 합니다. “그러나 무슨 일로 화가 난 그 여자는, 그를 떠나 유다 땅의 베들레헴에 있는 자기 친정 집으로 돌아가서, 넉 달 동안이나 머물러 있었다.“(새번역)
정확히 무슨 일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남편의 잘못으로 인해 화가 난 여인은 친정으로 갔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남편은 그녀를 다시 데리고 오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전체적인 문맥에서 더 나은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레위 사람은 하인 한 사람과 나귀 두 마리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떠납니다. 여기에 사소한 정보이지만 남편이 준비한 나귀는 두 마리입니다. 그런데 이 후에 돌아오는 사람까지 생각하면 한 사람은 걸어왔을 것입니다.
레위 사람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여인은 그를 집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는 사위를 반갑게 맞이하며 기뻐합니다. 삼 일 동안 사위를 극진히 대접합니다. 시간이 지나 넷째 날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장인은 보내지 않습니다. 배를 든든히 채운 후에 떠나라고 강권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앉아서 먹고 마시며 시간을 보냈고, 결국 하루를 더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다섯째 날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레위 사람은 일찍이 일어나 떠나려고 하는데 장인은 그냥 보내지 않습니다. 또 먹을 것을 준비하고 간청함으로 붙듭니다. 하지만 레위 사람은 더 이상은 머물 수 없다고 생각했고 자리를 일어나 길을 떠납니다.
“그 사람이 다시 밤을 지내고자 하지 아니하여 일어나서 떠나 여부스 맞은편에 이르렀으니 여부스는 곧 예루살렘이라 안장 지운 나귀 두 마리와 첩이 그와 함께 하였더라“(10)
레위 사람과 그의 일행은 베들레헴을 떠나 여부스에 이릅니다. 여부스는 예루살렘입니다. 아직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는 여부스 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해가 기울고 나서 길을 떠났기 때문에 이제 곧 해가 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인이 레위 사람에게 여부스에 하루 묵고 갈 것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레위 사람은 하인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돌이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이방 사람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 기브아로 나아가리라 하고“(12) 레위 사람은 이스라엘 성읍인 기브아까지 더 가야겠다고 합니다. 그의 생각에 이방 사람의 성읍에서 밤을 보내는 것보다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이스라엘 성읍까지 가서 밤을 보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레위 사람의 이 생각이 맞았을까요? 이스라엘 성읍이 이방 사람의 성읍보다 더 나을까요? 더 안전할까요?
그들은 다시 길을 떠나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에 이릅니다. 그리고 해가 집니다. 이제 더 이상 갈 수 없기에 기브아 성읍으로 들어갑니다.
“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그리로 돌아 들어가서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으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하게 하는 자가 없었더라”(15)
성읍 넓은 거리라는 것은 성문 안쪽에 있는 광장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고 장사를 하거나 재판이 열리는 곳입니다. 이 넓은 거리에 앉아 있었는데, 맞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베들레헴에 방문했을 때 극진한 대접을 받았던 장면과 지금 기브아에서의 장면은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나그네를 환영하며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고 있을 때 한 노인이 이들을 보고 다가옵니다. 이 노인은 본래 에브라임 사람인데 기브아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결국 기브아에 사는 베냐민 사람은 나그네에게 관심이 없었고, 타지에서 정착한 이 노인만 이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며 그들의 필요를 돌보는 것은 율법의 명령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당연한 의무였습니다. 하지만 기브아 성읍의 사람에게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반면 노인은 진심으로 나그네를 대접했고 레위 사람은 노인의 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분위기는 한순간에 모두 깨져버립니다. 기브아에 사는 불량배들이 그 집에 찾아와서 손님을 끌어내라고 합니다. 그 레위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가지겠다는 것입니다.
불량배들은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의 모습을 사사기 19장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롯의 집에 천사들이 갔을 때 소돔 사람들이 했던 일입니다. 그리고 결국 소돔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와 똑같은 일이 다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기브아입니다. 여기는 이방 지역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입니다. 베냐민에게 속한 지역입니다. 이렇게 가증한 일을 행하고 있는 자들이 베냐민 사람들입니다. 타락한 소돔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이런 악행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고, 그 은혜를 경험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자신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아는 자들이 그 은혜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반역하여 지금 이와 같은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백성이 소돔과 다르지 않습니다. ‘소속이 어디입니까?’질문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들을 두고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나마 노인은 이악한 일을 막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옛적에 롯이 했던 일과 똑같은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야말로 소돔에서의 일이 다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집 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하나“(23-24)
노인은 악을 행하지 말라고, 망령된 일을 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딸과 레위 사람의 첩을 대신 내어주려고 합니다. 특별히 노인이 하는 말은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마음대로 자신의 딸과 첩에게 하라는 겁니다. 다만, 이 레위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노인이 가지고 있는 여자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여자에 대해서 남자의 소유물과 재산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악을 막으려고 하면서 또 다른 악을 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노인의 이러한 요청에도 불량배들은 말을 듣지 않습니다.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25)
더 설명하기가 어렵고 불편한 장면입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분노하게 만드는 끔찍한 일입니다. 불량배들은 이 여인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은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을 짓밟으며 망가뜨립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을 잃어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쾌락의 노예가 되어, 죄의 종이 되어 심판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이 불량배들의 죄악뿐만 아니라 우리가 또 눈여겨 볼 것은 이 여인을 실제로 무리에게 내어준 레위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첩을 붙잡아서 그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래서 인지 오늘 본문은 레위 사람에게 더 이상 남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레위 사람을 주인이라고 기록할 뿐입니다. 남편으로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레위 사람에게 이 여인은 필요에 따라 버릴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이 여인은 밤새도록 능욕을 당했고 해가 뜰 때에 간신히 돌아와 문 앞에 이르렀고 엎드러져 아침을 맞습니다. 기력을 다하여서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레위 사람은 여인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일찍이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여인을 발견합니다. 문 앞에 엎드려져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봅니다. 정말 필사적이었던 그녀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 레위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이처럼 레위 사람은 이기적일 뿐만 아니라 냉혹하고 잔인한 사람입니다. 정상이 아닙니다. 자신을 대신해서 불량배들에게 끌려간 아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관심도 없고, 자신은 혼자서 집으로 가려고 합니다. 밤새도록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그 상황에서 편히 잠을 잘 수 있는지, 어떻게 걱정이나 애통함이 없을 수 있는지, 어떻게 이렇게 매정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문 앞에 엎드러져 있는 아내에게 하는 말이 ‘일어나라! 가자!’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오늘 본문에서 이 여인에게 전해진 유일한 말입니다. 아무도 이 여인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이 여인에게 의견을 묻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이제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 주석가는 이 여인의 비참함을 이렇게 생생하게 설명합니다.
‘성경의 모든 인물 가운데, 이 여인이 가장 작은 자입니다. 자신을 욕보이는 이야기의 맨 처음과 끝에 나오는 이 여인은 남자들의 세상 가운데 혼자 있습니다. 이야기의 다른 인물들은 그녀의 사람됨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녀는 재산이었고, 사물이었을 뿐입니다. 이름도 없고, 말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그녀의 삶에는 그녀를 도와줄 친구, 죽음을 슬퍼해 줄 친구도 없습니다. 자기들끼리 그녀를 주고받으며 남자들은 그녀를 철저히 죽입니다. 사로잡히고, 배반당하고, 능욕당하고, 고문당하고, 살해당하고, 몸이 찢기고, 또 그 몸은 흩어집니다.‘
이렇게 한 여인이 비참하게 희생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희생마저도 레위 사람은 이기적인 복수를 위해 이용합니다. 레위 사람은 여인을 나귀에 싣고 집으로 돌아와 그 시체를 열 두 조각으로 나누고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냅니다. 그 결과 이 일은 이스라엘 전역을 충격에 빠뜨립니다. 이 일을 상의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더 심각한 결말을 예고하며 끝이 납니다.
오늘 본문은 참 무겁고 슬프고 화가 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얼마나 잔인하고 추악하며 비인간적일 수 있는지 단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30)
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여기가 어디인가? 저들은 누구인가?’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 이곳에 사는 저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주소는 있습니다. ‘베냐민에게 속한 기브아’라고 기록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주소에 맞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레위 사람이라는 무늬만 있을 뿐입니다.
지금 이 일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을 어디를 봐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들을 그냥 소돔 사람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심판이 마땅한 가나안 족속이라고, 하나님을 모르고 죄악 가운데 사는 백성들이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이렇게 살고 있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무엇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가나안 족속과 구별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별된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죽기 전에 그렇게 강조하며 이스라엘을 가르쳤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모아두고 그렇게 당부의 말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렇게 쉽게 가나안처럼 삽니다. 자신의 소속을 잊고 삽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스라엘과 다를까요?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시기 바랍니다. 소속이 어디입니까? 나는 지금 어디 소속으로 살고 있는지요? 정말 하늘나라에 소속된 하늘 백성으로 이 땅을 살고 있습니까? 혹시 사람들에게 소속이 어디인지 혼란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 땅에서 마치 스파이가 된 것처럼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분명하게 정체를 밝히시기 바랍니다. 정말 하늘에 소속된 자라면 하늘에 속한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들과 내가 다르게 생각하고, 그들과 내가 다르게 말하고, 그들과 내가 다르게 살 때 가능한 것입니다. 다르게 살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소속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라면 그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와 어울리는 삶이 따라와야 하는 겁니다. 약속의 땅에서 가나안 백성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서도 약속의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 겁니다. 타락한 소돔 땅에 살더라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나의 소속이 어디인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소속에 어울리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다시금 내 삶을 점검해보십시오. 스펄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에 대해 너무나도 적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한 가지 이유는 바로 세상이 교회에 너무나도 많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여러분이 얼마나 세상에 영향을 받느냐 하는 것이 여러분의 소속을 헷갈리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에 자리 잡고 있는 세속적인 것들을 버리고 하늘의 속한 것들로 채워 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르게 살며 그럴 때 우리가 하늘에 속한 자임을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