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세계를 심판하시는 여호와

본문: 시편 94편

설교자: 최종혁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우리는 종종 상반되는 질문을 동시에 던진다. 공의는 주로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지어서 생각하게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지에 대한 질문과 왜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시는지에 대한 질문을 함께 하는 것이다.

노아의 대홍수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가나안 정복과 같은 사건을 보면 우리는 당시 사람들의 죄에 대한 심판이라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심판하셔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심판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심판 받아 마땅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특히 어린 아이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은 정말 아무 죄 없이 억울하게 죽은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인가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그 당시의 사람이었다면 반대의 의문을 가졌을 수도 있다. 소돔과 고모라 바로 옆에 살았다면, 혹은 그 안에서 정말 하나님을 바로 섬기며 살고 싶은 사람이었다면, 이 죄 많은 사람들을 왜 하나님께서 그냥 두시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을 수 있다. 우리가 엘리야였다면 하나님이 아합을 왜 그냥 두시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을 수 있다. 심지어 하나님은 심판의 메시지를 들은 아합이 베옷을 입고 풀이 죽어 다닐 때 심판을 연기하기까지 하셨다. 우리가 볼 때 아합은 심판 받아 마땅한데 그런 아합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니느웨에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분노하기까지 했던 요나와 같은 것이다. 유다의 악을 보며 하나님께서 공의의 심판을 행하시지 않으심에 의문을 가지고 기도했던 하박국과 같은 것이다.

성경의 사건들에 대해서만 우리가 이런 반응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가 매일 보고 듣는, 그리고 경험하는 일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렇게 반응한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악과 악인에 대해서 왜 심판하지 않으시고 가만히 계시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하나님께서 선과 선한 사람에 대해서 왜 그런 방식으로 행하시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욥과 같이 내가 그런 상황에 있다고 생각될 때는 더욱 그렇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성경이 침묵하지는 않는다. 욥기가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고 많은 시편의 말씀도 그렇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입장에서만 보면 죄를 알지도 못하는 완전한 의인의 가장 억울하고 비참한 죽음이다. 아무리 부활을 고려한다고 해도 납득하기 어렵다. 욥은 이해가 되는가? 결국 하나님께서 두 배로 갚아 주셨으니, 그 자녀들이 죽고 재산을 모두 잃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관계적으로, 영적으로 그런 고난을 겪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되는가?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면,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난다고 가정해 보라. 강도가 우리 집에 와서 내 가족들을 내가 보는 앞에서 모두 살해하고 모든 재물을 빠앗아 가고 내 목숨만 겨우 남겨놓고서는 나중에 나에게 100억을 주고 다른 배우자와 자녀를 데려다 준다면 괜찮겠는가? 그럴 수 없다. 무엇으로도 내가 잃은 것이 보상된다고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욥에게 하나님의 불의하게 행하신 것일까? 십자가는 인류 역사 상 가장 큰 불의가 행해진 장소일까? 이런 모순처럼 보이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타락, 공의에 대한 정의, 종교와 참된 믿음의 차이 등 우리가 성경을 통해 바로 잡아야할 생각과 가치관들이 많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도 우리 마음으로부터 “아멘, 그렇게 되는 것이 맞습니다”라고 동의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첫째는 하나님이 아닌 우리가 지식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해하는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지식적으로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고 해도 눈 앞에 보이는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에게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들이 반복적으로 하는 질문 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것이다. 답을 잊어 버려서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 또 다른 일을 겪게 되면 비슷한 의문이 또 생기는 것이다. ‘이래도 하나님은 공의로우신가?’라는 의문은 끝이 나지 않는다.

이런 의문 속에서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그것은 성경의 분명한 진리를 거절하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래도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고 믿지만, 때로 그 믿음은 마치 강요된 믿음처럼 느껴진다. ‘그냥 그렇다 하면 그런 줄 알아’라며 성경이 (혹은 그런 말씀을 인용해서 위로하는 성도가) 내 입을 막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를 그렇게 수동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지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가 결국은 알고 인정하게 될 결론일 뿐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가르친다. 계시록에 기록된 하나님의 심판은 곧 공의의 하나님의 현현(나타나심)이다. 시편 94:1-2의 기도에 대한 궁극적인 응답이다. 하지만 그 말씀은 최후에는 결국 이렇게 공의가 선포될거니까 지금은 억울해도 그냥 조용히 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최후의 승리에 대한 확신 가운데 오늘을 치열하게 싸울 것을 말한다. 그래서 승리자가 되라고 말한다. 지금의 승리는 최후의 승리에 대한 확신과 기대감도 더욱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고 그것은 또 다시 오늘의 치열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선순환이 종말을 알고 있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시편 94편의 메시지도 그러하다. 시편 94편의 저자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확신에서 시작해서 또 다른 확신으로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세 개의 교훈을 배울 수 있다.

  1. 확신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자, 끝까지(1-7절)
  2. 확신할 수 있는 이유를 기억하자, 언제나(8-15절)
  3. 확인이 주는 결과를 만끽하자, 지금도(16-23절)

하나님의 공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되는지는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이상 결국은 다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있겠지만,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확신은 가질 수 있고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

확신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자, 끝까지(1-7절)

시편 94편은 국가(사회)의 불의(1-15절)와 개인의 고난(16-23절)을 모두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시편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애통이나 슬픔이 아니라 확신이다. 하나님의 공의,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이 시편의 기저에 강하게 깔려있다. 그래서 시편 기자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된다.

1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 2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 3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1-3절)

“여호와”(1절)

이 시편에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여호와라고 불린다. 시편 기자가 보고 있는 상황은 특별히 언약의 백성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호와가 어떤 신이신지를 반복해서 강조한다.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1절)

복수는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는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 표현이다. 하지만 2절에서(“세계를 심판하시는 주”) 분명히 밝히는 것처럼여기서 말하는 복수는 감정적인 보복이나 앙갚음의 의미가 아니다. 당한대로 혹은 그 이상으로 내 감정이 풀릴 때까지 갚아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한 기준에 따라 보응하는 것을 의미하고 따라서 공의, 공의로운 심판을 의미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강조한다. 좀 더 정확하게는 ‘복수의 하나님’이라고 강조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면 사랑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을 의미하는 것처럼 ‘복수의 하나님’이라고 하여 복수(보응, 공의)가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임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즉, 사랑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닌 것처럼 복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도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본질 상 공의로운 분이셔서 행한대로 갚아 주신다. 이는 선이든 악이든 마찬가지다.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하나님은 어떤 선도 상주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악도 벌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확신을 가져야할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확신한다면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공의의 하나님이심도 확신해야 한다. 여기서부터 우리의 기도가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서 시편 기자의 기도도 이렇다.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1절), “주여 일어나사”(2절)

빛을 비추어 달라는 기도는 주로 얼굴 빛을 비춰 달라는 기도로 은혜를 구하는 기도이지만, 여기서는 다르다. 이 기도는 영광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주시기를 구하는 기도다. 일어나 달라는 기도도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움직여 주시기를 구할 때 사용되는 단어와는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다. 가만히 계시지 말고 움직여 달라는 의미보다는 몸을 일으켜 자신을 드러내 달라는 의미다. 세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심판 주로서 자신을 나타내달라는 기도다. 즉, 1-2절의 기도는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이스라엘 뿐 아니라 세계를 심판하실 권리를 가지신 분이심을 전제로 두고, 그런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즉, 이 기도는 하나님께 ‘좀 공의롭게 심판해 주세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공의의 하나님께 ‘심판해 주세요’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공의롭기 때문이다.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2절)

심판의 대상은 교만한 자들이고 심판의 내용은 마땅한 벌이다. 교만한 자들은 8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이다. 그리고 3절에서 밝히는 것처럼 이들은 악인들이다. 4절은 이들을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이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힘으로 남을 압제하고 원하는대로 악을 행한다. 시편 기자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들의 행위에 따라 마땅한 벌을 주시기를 구한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그들의 악한 행위를 나열한다.

“4 그들이 마구 지껄이며 오만하게 떠들며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 다 자만하나이다 5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백성을 짓밟으며 주의 소유를 곤고하게 하며 6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들을 살해하며”(4-6절)

의로운 분노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들을 짓밟고 곤고하게 한다. 그들을 압제하고 괴롭게 한다는 말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서 과부와 나그네, 고아들, 즉 가장 약하여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자들을 살해한다. 6절은 일반적으로 약간의 시적인 과장이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사실 현실은 더한 경우도 많다. 직접적으로 살해하지 않더라도 힘 있는 자들이 그렇지 않은 자들의 생활을 무너뜨려서 결국 살 소망을 끊어 버리는 경우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도 많이 볼 수 있다. 교묘하게 약자들을 죽이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과부와 나그네와 고아는 항상 선이고 부하고 권력을 가진 자들은 항상 악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많다. 누구든 자신이 가진 것을 악용하여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반대로 그들의 삶을 망가뜨리면서 자기 배만 불리고 그것을 자랑하는 자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교회 밖의 세상에서만 이런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된 기독교를 자칭한 이단들의 교주가 하는 일들도 이런 일이다. 그들은 믿고자 하는 사람들을 거짓으로 속여 그들의 삶을 파괴한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이나 대제사장 같은 사람들이 했던 일도 동일하다. 교회 안이든 밖이든 이런 악은 계속해서 이 세상 가운데 있어 왔다.

이런 악을 행하면서도 이들은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4절을 보면 이들은 교만하게 말한다. 이들은 마구 지껄인다. 교만한 말이 쉬지 않고 그들이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자신들의 악행이 대단한 성취라도 되는 것처럼 자랑한다. 3절에서 시편기자는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라고 묻기도 했다. 개가는 승리로 인한 즐거움의 노래다. 즉, 이들은 승리자가 되어 그 기쁨을 한껏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이들이 이런 악을 숨어서도 아니고 이렇게 자랑스럽게 대놓고 행할 수 있는 이유는 이렇다.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하나이다”(7절)

이들은 심판하시는 하나님, 복수하시는 하나님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좋은 말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은 그들의 악행을 보지 못하거나 혹은 보았어도 관심이 없거나 혹은 관심이 있어도 심판하지 못한다고 믿는다. 이것이 악인들의 주장이며 확신이다. 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다면 그들은 절대 이런 악을 자랑하며 기뻐할 수는 없다.

이런 의로운 분노 가운데 시편 기자는 기도하고 있다. 3절에 나오는 “언제까지”라는 표현은 이런 불의한 상황이 오래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시편이 기록된지 최소한 2천년 이상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는 여기 시편 기자와 같은 상황을 보며 분노하고 있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교묘하고 은밀한 악이 자행되고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정도다. “지금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에게 미안해 하셔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결코 이미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보다 낫지 않다. 이런 공의롭지 못한 세상을 보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이 시편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바로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 가운데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기도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불의한 일을 당하더라도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셨다(눅 18:1). 불의한 재판장도 귀찮아서라도 과부의 원한을 풀어줄텐데, 하물며 공의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시겠냐고 예수님은 물으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칼을 들고 불의한 자들을 제거하여 이 땅에 공의를 세우라고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그렇게 세워질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어떻게 세워질지는 지금 우리가 계시록 말씀을 통해 배우고 있다. 하나님께서 세우실 것이다. 모든 불의를 바로 잡고 의와 화평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우리는 계시록의 말씀을 보면서도 하나님이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공의의 하나님은 선과 악에 합당하게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하나님에 대한 확신 가운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해야 한다(마 6:10). 끝까지 그렇게 기도 해야 한다.

확신할 수 있는 이유를 기억하자, 언제나(8-15절)

사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도 기도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이 없고 그런 시간이 길어지면 확신은 약해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공의를 나타내실 것인지, 아니면 나만 그냥 손해보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공의의 하나님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는 이유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언제나 그 이유를 기억할 때 우리는 실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8-15절은 확신할 수 있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하나님은 모르지 않으신다(8-11절)

먼저 8절은 7절의 악인들의 말에 대한 대답이다.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8절)

어리석은 자무지한 자는 92편 6절에서도 사용된 표현이다. 거기서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크신 일을 알지 못하는 악인들에 대한 표현으로 사용되었고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시편 기자는 이들의 어리석은 확신에 한탄하면서 생각을 좀 하라고 책망한다. 그들이 해야할 생각은 이것이다.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9절)

너무나 쉽고 단순한 논리다. 아무리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이라도 이 정도는 알 수 있다. 귀를 지으신 이는 들으시고 눈을 만드신 이는 보신다. 어떤 능력을 주신 분은 먼저 그 능력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요즘 AI가 뉴스에 많이 나오는데, 어떤 면에서 사람이 만든 AI가 사람을 뛰어 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인다. 사실 AI 뿐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낸 기술이라는 것이 다 그렇다. 사람보다 빠른 자동차, 사람보다 기억력이 좋고 빠르게 계산할 수 있는 컴퓨터를 사람은 만들어 냈다. 심지어 날 수도 없는 사람이 비행기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하지 않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으로서 모든 능력에 있어서도 그렇다. 귀를 지으신 하나님은 들을 수 있으실 뿐 아니라 완전하게 들으신다. 우리의 어떤 말 하나도 하나님께서 놓치시는 것이 없다. 눈을 만드신 하나님은 보실 수 있으실 뿐 아니라 완전하게 보신다.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8절의 표현처럼 지금 말하고 있는 악인들은 “백성 중”에 있는 자들이다. 이들도 말로는 하나님을 창조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시편기자는 그들의 고백과 실제 삶이 얼마나 일관성이 없는지를 지적하는 것이다. 10절도 마찬가지 논리다.

“뭇 백성을 징벌하시는 이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이가 징벌하지 아니하시랴”(10절)

하나님은 그 온전한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고 또한 때로는 징벌하시는 분이시다. 악행하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자신들의 일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으실 것처럼 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편 기자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도 공의를 행하실 것을 지적한다. 11절은 이 논리에 대한 결론이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11절)

하나님은 모르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악인들의 계획이 얼마나 치밀하고 그들의 생각이 깊어도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그 모든 것을 의미 없게 만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께서 내 일은 모르시고 내 생각은 모르셔서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이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창조를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지어서 말했다. 우리가 창조에 대해서 바르게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창조의 하나님이 없다면 심판의 하나님도 계시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 세상이 어떻게든 창조를 부인하고 거절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기 나오는 악인들처럼, 세상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는 여기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정확히 아시고 그에 따라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우리는 다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지식에 따라 하나님께서 어떤 작은 불의도 그냥 두지 않으시고 바로 잡으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르지 않으신다. 보지 않고 계시거나 듣지 않고 계시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 가운데 끝까지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신다(12-15절)

다음으로 12-15절은 우리가 기억해야할 확신의 두번째 이유를 말해준다. 바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12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13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12-13절)

결국에 하나님께서 공의를 행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도 현재의 환난은 확신을 약하게 만든다. 이에 대해 시편 기자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함을 말한다. 현재의 환난은 ‘징벌’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징벌은 죄에 대한 형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훈계 혹은 훈련을 의미한다. 힘들다는 것은 비슷할 수 있지만 목적이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욥을 비롯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어려움들을 허락하셨다. 그들로 더 하나님을 알게 하셨다. 그래서 오히려 그런 고난은 복이기도 하다. 이것이 시편 기자가 제시하는 생각의 전환이다.

결국에 하나님은 의인은 환난을 견디게 할 것이고 악인의 악에는 보응하실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의인을 위하여 악인을 사용하시지만 결국 악인은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받게 된다는 말이다. 하박국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원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어떻게’에 대해서 우리가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든 확실한 것은 이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14절)

어떤 고난 속에서 우리는 욥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악인의 손에 그냥 내버려 두셔서 압제를 당하고 살해당하게 하시는 것 같다. 악인만 형통하고 의인은 고난만 당하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절대로 버리지 않으신다. 지금 나에게 세상이, 그리고 나의 상황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관계없이, 하나님은 자기 소유로 삼은 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바울이 로마서 8장의 끝에서 분명히 선포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가장 확실한 증거다.

“심판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따르리로다”(15절)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의로 돌아갈 것이다. 불의한 재판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마땅히 마음이 정직한 자는 그 의를 따라야 한다. 확신을 가지고 의를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성경에 속는 일은 없다. 하나님에게 속는 일은 없다. 그러니 계속해서 확신 가운데 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럴 수 있는 이유를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모르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신다.

확신이 주는 결과를 만끽하자, 지금도(16-23절)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지금의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지만, 사실은 그 이상의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는 모든 것이 바로 잡힐 끝날을 기대하며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은 어떻게든 슬픔만 견디며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했는데, 이는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지금 우리에게 남 다른 기쁨을 준다.

남 다른 기쁨(16-19절)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행악자들을 치며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악행하는 자들을 칠까”(16절)

지금의 불의를 누가 바로 잡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답은 이미 분명하다. 하나님 외에는 없다.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17절)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벌써 악행하는 자들에 의해 의미 없는 죽임을 당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외면하지 않으셨다. 악인들의 말을 듣고 행위를 보시고 그 생각을 다 아시는 하나님은 의인의 말과 행위와 생각도 아신다. 악인에게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공의의 심판을 의미하지만 의인에게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사랑의 구원을 의미한다.

“18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19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18-19절)

고난 중에 우리는 근심한다. 때로 확신이 흔들리기도 한다. 우리 발이 미끄러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도 변하지 않는 성실하신 사랑을 보여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흔들리지 않게 붙드시고 위로하신다. 결국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다른 누구나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위로하실 때,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

이 기쁨은 정말 남 다른 기쁨이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때 우리의 기쁨도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 고난 중에 기뻐하는 것이다. 친구들이 ‘넌 어떻게 그런 일을 당하고도 이렇게 괜찮을 수 있어?’라고 묻게 되는 그런 기쁨이다.

우리가 이런 기쁨을 누려야 한다. 만끽해야 한다. 나중에 그렇게 하게 될 것이지만,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세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 가운데 거할 때,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또 다른 확신으로 나아갈 수 있다.

또 다른 확신(20-23절)

“20 율례를 빙자하고 재난을 꾸미는 악한 재판장이 어찌 주와 어울리리이까 21 그들이 모여 의인의 영혼을 치려 하며 무죄한 자를 정죄하여 피를 흘리려 하나 22 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 23 그들의 죄악을 그들에게로 되돌리시며 그들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끊으시리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 그들을 끊으시리로다”(20-23절)

악한 재판장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여호와와 어울릴 수 없다. 그들이 하려고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반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의 악은 끊어지게 될 것이다. 공의의 심판관이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과 결과에서 나의 요새이며 피할 반석이 되어 주실 것이다.

지금의 상황이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끝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참된 감사와 기쁨의 예배를 드릴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는 않는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여전히 교만한 자들은 개가를 부를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짓밟으며 곤고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같은 일이 반복되더라도 혹은 더 악화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은 또 다른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결국은 악을 끊으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자기 백성을 지키시며 보호자가 되어 주신다는 확신이다. 이 확신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지금의 고난을 또 다시 이겨낼 수 있다.

도전

세상의 불의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세가지 교훈

  1. 확신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자, 끝까지(1-7절)
  2. 확신할 수 있는 이유를 기억하자, 언제나(8-15절)
  3. 확인이 주는 결과를 만끽하자, 지금도(16-23절)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일들은 많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 확신은 지금 우리로 기도하게 하고 기뻐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확신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계속해서 의문이 생기겠지만 또한 계속해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세계를 심판하실 분은 우리가 믿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시다.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불의하게 행하지 않으신다. 과거에도 그러셨고 앞으로도 그러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은 긍정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지금을 살아갈 수 있다. 조급해 하지 말라. 확신의 이유를 언제나 기억하고, 하나님의 위로와 기쁨을 만끽하는 가운데 끝까지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자. 그것에 세계를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편에 선 자들의 지금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