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성령 충만 설교
본문: 사도행전 2장 14-36절
설교자: 조정의
오늘 우리는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에 각처에서 모인 유대인들에게 전파한 설교를 살펴볼 것이다. 성령 하나님은 이날 120여 명의 그리스도의 제자, 그리스도의 증인 위에 임하셔서 능력을 더하셨고, 그 능력은 제자들의 입술에서 나온 각 나라 방언을 통해 청중의 주목을 확실히 이끌었다. 바로 그때 베드로는 나머지 열한 사도를 대표하여 성령의 영감을 받은 말씀을 선포했다.
사도행전에는 총 19편의 설교가 나오는데(베드로 8, 스데반 1, 야고보 1, 바울 9), 전체 사도행전의 1/4 정도 분량이다. 본문에 기록된 사도 베드로의 설교는 사도행전 첫 설교이자 오순절 성령의 능력을 입고 성령 충만해진 증인이 외친 첫 증언이기도 하다.
오늘 설교를 통해서 성령 충만 설교가 어떤 특징을 가졌는지 발견하기 원한다. 초대 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는데, 과연 “사도의 가르침”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지 배워보자(행 2:42). 말씀을 통해 내 마음과 생각을 만족시키는 설교보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설교를 더욱 사모하고 합당한 마음으로 듣게 되길 원한다.
로또 1등 49억 원을 찾아가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1년 내내 1등 번호가 공지되었지만, 그것을 귀담아듣지 않아 놓쳐버린 돈, 얼마나 아까운가? 다윗은 주의 말씀을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라 말했다(시 19:10).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하며 이 땅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까지 이르고 거짓이나 오류 없이 다 의로워서 영혼을 소성시키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안다면 오늘 설교를 통해 어떤 말씀을 그냥 흘려보내거나 잊어버리지 않고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할지 귀 기울여 들어보라[본문 읽기]
제리 바인스와 짐 섀딕스는 <설교의 능력>이라는 책에서 설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설교란 “성령이 의도하는 의미와 동반하는 능력이 현대 청중들의 삶에 부여되게 하기 위해서 성경의 본문을 열어 보여 주는 과정”이다. 사도 베드로의 설교가 바로 이런 설교였다. ① 성령 충만 설교는 그 형식에 있어 성령이 의도하는 의미와 능력을 성경 본문을 열어 보여주는 과정이었다. ② 성령 충만 설교는 그 주제에 있어 성령이 증언하시는 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나타냈다. ③ 성령 충만 설교는 목적에 있어서 청중들의 삶에 부여되게 하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졌다. ① 성경 중심적(형식) ② 주님 중심적(주제) ③ 실천 중심적(목적).
1. 성령 충만 설교는 성경 중심적인 설교다(형식)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 설교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설교자가 성경 본문을 읽고 다시는 그 본문을 찾지 않은 채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또 많은 경우 본문을 이용만 하고 본문을 가르치지 않는다. 설교자 마음대로 본문의 의미를 왜곡되고 변형하여 자기주장을 뒷받침하는데 이용할 뿐, 성경의 참된 의미를 청중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떤 면에서 설교 시간 내내 설교자만 보게 하는 설교, 성경 본문을 볼 필요가 없는 설교는 위험하다. 성경 중심적 설교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사도 베드로의 성령 충만 설교는 달랐다. 성경 중심적인 설교였다. 베드로는 자기주장을 펴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지 않았고, 본문을 읽기만 하고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지도 않았다. 성령이 의도하신 본문의 의미를 성령의 능력과 함께 성경 본문을 열어 보여주는 형식으로 전파했다.
확실히 베드로의 설교는 성령의 영감, 능력에 따른 말씀이었다. 14절에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라는 표현에서 이르되는 그냥 ‘말하다’라는 일반적인 표현이 아니라 성령의 영감, 감동을 받은 사람의 증언을 가리킨다. 4절에는 이 단어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에 사용됐다.
성령의 능력이 동반된 설교는 반드시 성령이 의도한 의미를 올바르게 설명하는 과정을 요구한다. 성령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모든 성경은 성령께서 원래 의도하신 뜻대로 풀어 설명될 때만 성령의 능력을 온전히 맛볼 수 있다. 베드로가 오순절 설교를 통해 보여준 설교의 형식이 바로 그것이다. 베드로는 성경 본문을 열어 청중들에게 성령이 의도하신 성경의 의미를 보여주었다.
베드로는 구약 성경 요엘서 2장 28-32절(17-21), 시편 16편 8-11절(25-28), 시편 132:11(30), 시편 110편 1절(34-35)을 가르쳤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한 설교의 요약본이지만, 설교의 절반을 성경 본문을 인용하는 데 사용했고, 나머지는 그 본문에 대한 설명에 할애했다. 예를 들어 처음에 인용한 요엘 말씀을 생각해보자.
120여 명의 제자가 각 나라 언어로 방언을 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기적이다. 오늘날 오순절 계통 교회에서 은사 주의 운동을 하면서 비슷한 기적을 흉내 내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은사 주의 운동에는 성경 중심적 설교가 따라오지 않는다. 성령 충만의 능력만 강조하기 때문에 청중들이 병 고침이나 초자연적 경험만을 추구하게 만든다. 하지만 베드로는 달랐다. 그는 성령의 능력이 충만한 상황에서 성경 중심적 설교를 했다. 본문의 의미를 보여주는 과정을 통해 일어난 일의 의미를 설명했다.
17-21절까지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서 2장 28-32절 말씀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베풀어주실 구원의 약속에 관한 말씀이다. 요엘 선지자가 바라본(BC 800-400)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선 패역한 모습이었지만,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언젠가 그들을 회복하실 것이라 약속하셨다. 베드로는 16절 말씀에서 바로 선지자 요엘을 통해 말씀하신 것이 지금 성취되었다고 분명히 선포했다(페셰르). 어떻게 성취되었나?
요엘 말씀에 따르면, 말세 곧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사이의 시간을 가리키는 시기에(17절), 하나님은 자기 영을 모든 육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자녀들, 젊은이들, 늙은이들, 17절),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남종과 여종들, 18절),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그 뜻을 예언 곧 선포하게 하실 것이다. 이 말씀은 청중 가운데 지금 성취되었고, 베드로는 그 의미를 성경 본문을 통해 밝히 설명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성경 중심적 설교가 필요하다. 뛰어난 소통 전문가, 달변가, 웅변가, 스타강사가 필요한 게 아니다. 우리에겐 성경의 의미를 바르게 설명할 설교자가 필요하다.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키고 거듭나게 하는 것은 사람의 말과 지혜가 아니다. 썩지 아니할 씨,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벧전 1:23). 성령이 의도하신 말씀의 의미를 성경 본문을 열어 설명해주는 것을 통해서만 말씀에 동반한 성령의 능력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베드로의 설교는 본질적으로 강해 설교였다. 그가 일어나 전달한 것은 최신 사건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거나 심리학 교습을 하거나 사람들이 매료될만한 내용들을 제공해 가려운 곳을 긁어 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청중들을 직접 하나님의 말씀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교회 안에서 있을 수 있는 참된 설교의 유일한 형태이다”(스프로울 인용).
그러므로 우리가 듣기를 사모해야 하는 설교는 성경 중심적 설교여야 한다. 아무리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고 흥미를 유발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미있어도, 설교자가 본문을 열어 성령께서 의도하신 의미를 보여주는 과정 없이 설교한다면 베뢰아 사람처럼 진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것이 (정말) 그러한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며 “이것이 과연 그런 의미인가?” 질문하라.
<설교 잘 듣는 실제적인 방법> 책에 건강한 설교 듣기를 위한 7가지 요소가 나오는데, 3번째가 바로 “설교자가 본문이 말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점검하라”이다. 강단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기대하고, 하나님이 나보다 더 잘 아시니 겸손히 들어야겠다는 자세를 갖는 것은 매우 훌륭한 설교 듣기 자세다. 하지만, 일단 그런 자세를 갖췄다면, 무엇이 전파되든지, 어떻게 전파되든지 듣기에 좋으면 좋다고 여기지 말고, 설교가 성경 중심적인지 점검하라. 성령 충만 설교로 성령의 능력을 당신 삶에 가져다줄 설교는 오직 성경 중심적 설교이기 때문이다.
2. 성령 충만 설교는 주님 중심적 설교다(주제)
성령께서 베드로를 통해 전파한 첫 설교는 형식에 있어서 성경 중심적 즉 성경 본문의 원래 의미를 풀어 설명하는 과정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오직 주님을 나타내는 주님 중심적 설교였다. 다른 말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다(설교 주제). 베드로는 본문 의미 설명이 전부가 아니라 그 설명을 통해 그리스도를 전했다.
베드로의 설교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① 사역하시고 ② 돌아가시고 ③ 부활하시고 ④ 승천하셨다는 증거가 차례대로 제시된다. 그 증거가 확증하는 사실이자 설교의 핵심 주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주와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1) 사역: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증언하셨다(22절)
설교의 청중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거나 갈릴리 지방에서 와서 이미 예수님의 사역에 관해 잘 알고 있었던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혹은 경험).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라고 말한다. 무엇을 아는가? 하나님께서 나사렛, 이름 없는 그 동네 출신 예수를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그들 가운데 베푸사 그들 앞에서 증언하셨다는 것이다.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쫓아내는 등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가리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바로 주와 그리스도 되신다는 것이다.
2) 죽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음을 계획하셨다(23절)
물론 예수님께서 법 없는 자들, 유대인이 볼 때 무법한 이방인들 손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예수님은 23절에 베드로가 설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셨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 뜻의 실패가 아니라 성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반드시 돌아가셔야 했다(눅 24:44). 하나님의 뜻대로 돌아가신 예수님은 주와 그리스도이시다.
3) 부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다(24-32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다. 여기서 고통은 산모의 출산 고통을 의미하는데, 예수님은 아기가 엄마 뱃속에 계속해서 머물 수 없는 것처럼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으셨다.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활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모든 설교와 마찬가지로 베드로의 첫 설교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강조점이 있다. 그래서 25-28절까지 시편 16편 8-11절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이 기록하신 말씀의 성취라고 선포한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요동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쁨으로 찬양을 하는데, 27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고백이 나온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바로 이 말씀이 다윗이 자신을 가리켜 한 말이 아니라 다윗이 선지자로서 자기 후손으로 나실 그리스도에 대해 한 말이라는 것이다. 29절을 보라. 조상 다윗은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그들 중에 있었다. 아마도 당시에 예루살렘 남서쪽 언덕의 남쪽 면, 실로암 못 가까운 곳에 다윗의 묘가 있었을 것이다. 순례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다윗의 묘를 지나쳤다.
그러므로 음부에 버리지 않고 썩음을 당하지 않는 분은 다윗이 아니다. 다윗이 선지자로서 미리 본 그리스도이시다(31절). 하나님께서 다윗의 자손 중에서 왕으로 세우실(30절) 그리스도가 죽지 않고 부활하실 것을 성경에 약속하셨다. 그런데 누가 부활하셨나? 32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지금 이 말씀을 선포하는 베드로 그리고 그와 함께 한 120여명의 제자들 모두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이었다. 그러므로 성경이 증언하는 바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이 택하신 주와 그리스도이시다.
4) 승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이셨다(33-36절)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승천을 선포한다. 역시 34-35절에 시편 110편 1절 말씀을 사용하여 설교했다. 34절 말씀처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했다. 묘가 예루살렘에 있었다. 하지만 그가 천 년 전에 시편을 통해 말하기를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이 말씀의 주인공은 다윗이 아니라 바로 다윗의 자손으로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유일한 분. 바로 예수님뿐이다. 참고로 예수님은 동일한 시편 본문으로 자신을 입증하신 적이 있다(마 22:44-5).
예수님이 하나님 말씀대로 승천하셨다는 것을 확증한 베드로는 그 결과를 청중이 모두 경험하고 있다고 말했다. 33절.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승천),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성령의 능력이 제자들 가운데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은 시편에 기록한 하나님 말씀의 성취이자 동시에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다는 사실을 확증한다. 베드로가 여러 확증과 권면과 설득을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 본문의 원래 의미를 보여주는 과정을 통해 전파했던 설교의 핵심 주제는 바로 36절에 나오듯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렇듯 성령 충만 설교의 특징은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기록된 책이며(요 5:39),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은 성경 본문의 의미를 보여주는 설교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청중에게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설교가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힘과 위로가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설교가 기쁨과 만족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기쁨과 만족이 오직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설교 시간은 단지 도덕 시간처럼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지 배우는 시간이 아니다. 훈화 말씀처럼 단지 격려와 충고, 비전을 심어주는 시간도 아니다. 설교 시간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시간이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시간이다. 성령 충만 설교는 그러므로 반드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여야 한다.
3. 성령 충만 설교는 실천 중심적인 설교다(목적)
마지막 특징은 바로 실천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설교의 목적은 본문 의미를 설명하는 것 혹은 그리스도에 관해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얻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고 말씀하셨다(마 28:20). 지키게 하는 것, 순종하는 것, 말씀에 반응하고 말씀의 원리를 삶에 적용하는 것, 그것이 설교의 최종 목적이다.
베드로의 설교가 그러했다. 그의 설교는 강의가 아니었다. 정리한 내용을 설명하고 끝나는 설교가 아니었다. 먼저, 그의 설교엔 분명한 대상이 있었다. 베드로는 청중이 자기 설교에 귀 기울일 것을 여러 번 촉구했다. 14절에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22절에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29절 형제들아, 36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베드로는 그들이 밝히 알기를 원했다.
또한 베드로는 청중의 죄를 여러 번 지적했다. 23절,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다, 36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실제로 유월절부터 예루살렘에 와 있던 대부분의 청중과 유대 거주민들은 이 말씀이 마음에 찔렸다(37절). 베드로는 성경적 설교를 통해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모두 성취하신 주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밝히는 내내 그들에게 너희가 그분을 거부하고 죽였다고 외쳤다.
베드로는 또한 마지막 심판에 대해 경고했다. 19-20절에 말세의 징조를 말하면서 심판의 때가 이를 것을 성경 본문을 사용하여 알렸고, 하나님께서 오른손으로 높이사 우편에 앉게 하신 예수님께서 그 원수를 발등상이 되게 하실 것임을 성경 본문을 통해 가르쳤다. 주와 그리스도를 반역하고 죽인 원수를 하나님이 장차 어떻게 하시겠는가? 청중은 두려움에 떨려 “우리가 어찌할꼬” 고민했을 것이다(37절).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구원의 메시지를 소개했다. 37-47절에 더욱 분명하게 선포될 메시지였으나 오늘 본문에서도 구원의 소망은 그들에게 분명히 들려졌다. 21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주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해 이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 구원을 맛볼 수 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말씀을 베드로는 본문을 통해 그들에게 희망적으로 전달했다. 그래서 청중은 하나님께 구원의 은혜를 구할 수 있었다.
성령은 죄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요 16:8). 청중이 귀를 귀울이도록 간청하고, 그들의 죄를 책망하고, 심판을 경고하며, 구원의 의를 선포하는 실천적인 설교,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설교다.
오늘날 우리는 설교의 홍수 속에 살아간다.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설교가 쏟아져 나온다. 기독교 방송, 라디오, 유튜브나 교회 홈페이지 등에 매주 혹은 매일 설교가 올라온다. 하지만 훌륭한 설교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안타깝게도 우리는 설교의 위기, 하나님 말씀의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에겐 성경 중심적 설교가 필요하다.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보여주는 과정이 담긴 설교가 필요하다. 그래서 청중이 설교자의 말의 권위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 말씀이 그렇구나!’라고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겐 주님 중심적 설교가 필요하다. 잘 살아 보자,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자 등의 도덕적 권면이 아니라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그리스도가 선포되는 설교가 필요하다. 우리에겐 실천 중심적 설교가 필요하다. 머리에서 맴돌고 사라지는 설교가 아니라 가슴을 울리고 양심을 찌르고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 설교의 특징이며, 성령은 이런 설교를 통해 오늘도 역사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