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성경이 말하는 헌금의 정의, 용도, 원리
설교자: 조정의
헌금에 대해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회사는 돈을 받고 다니는데 교회는 돈을 내고 다닌다고 말합니다. 우스갯소리지만 그 말에는 교회에 내는 헌금이 회비나 세금과 같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헌금의 정의를 바로잡아야합니다. 여러분 각자의 머릿속에 헌금을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들이 많습니다. 성경에서 주로 헌금이 어느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또한 헌금을 어떤 원리를 통해 드려야 하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헌금은 교회에 내는 회비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예물입니다.
둘째, 헌금은 내가 생각하는 용도에 따라 쓰이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와 있는 주된 용도가 있습니다. 한 마음으로 그 용도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가 헌금을 드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그 원리대로 드려져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주제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재물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으로서 우리의 이웃들에게 사용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재물을 이웃들에게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러면 내 재물을 하나님을 위해 쓰면 되지 왜 굳이 교회에 내야 하는가, 왜 헌금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오늘의 주제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재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교회에 내는 헌금만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의 필요를 돌보기를 원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과부를 돌볼 것을 말하면서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어머니를 도울 수 없는 상황에서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면서 맡기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재물을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눅 16:9)”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바로 직전에 하신 말씀이 “네 이웃을 네 몸과 사랑하라”였고 비유 바로 다음에 하신 말씀이 “이와 같이 하라”입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로 이웃에게 은혜를 베풀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재물을 국가가 요구하는 것들에 충성스럽게 사용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롬 13:7)” 우리가 가진 것으로 국가의 필요를 채우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 영역, 오늘 우리가 살펴볼 영역이 교회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오시고 많은 이들이 모이게 되자 교회 안에는 많은 필요가 생겼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행 2:44-45)” 성도들이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고 집사를 세워서 그것을 가지고 가난한 성도들을 도왔던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통해 하나님의 일꾼들과 교회를 돌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 네 가지 영역에서 우리의 재물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균형입니다. 가정의 필요에 모든 것을 공급하고 이웃이나 국가, 교회의 필요에 관심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반대도 있습니다. 이웃과 지역사회 또는 교회에 재물을 모두 갖다 바쳐서 가정이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뉴스에서 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균형있게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이 맡겨주신 재물을 충성스럽게 사용하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구약 시대의 헌금의 원리와 신약시대의 헌금의 원리를 알아보고 그 공통점을 찾아보고 오늘날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헌금의 정의, 용도, 원리를 알기를 원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교회가 없었지만 당시의 어떤 사람들을 오늘날의 교회와 같다고 할 수 있을까요?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행 7:38)”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하나님의 교회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약의 교회는 오늘날의 우리 교회와 동일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교회는 분명히 다릅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국가이자 교회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국가와 교회가 분리되어 있기에 구약의 배경과 오늘날의 배경은 바로 연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원리는 적용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십일조는 10분의 1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 전체에서 십일조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금이자 세금이었습니다. 곡식, 과일, 가축, 돈 등 모든 재물의 10%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세 종류의 십일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지만 백성들을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관리들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한 지파인 레위 지파를 관리로 삼으셨습니다.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각 지파의 48군데로 흩어져서 각 지파의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고 재판하고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개인 역할을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땅을 점령했을 때 레위지파를 제외한 모든 지파는 땅을 나눠 가졌고 레위인들은 백성들의 십일조를 먹고 살게 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십일조입니다.
전 국민이 함께 참여하는 축제, 제사가 있었는데 그것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 백성들의 세금을 10%를 모았습니다. 여기까지 유대인들은 소득의 20%를 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매 3년마다 10%를 더 걷어서 과부나 가난한 자들을 구제했습니다. 이것을 계산해보면 매년 이스라엘 백성들은 23.3%를 내야 했습니다. 이에 추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수 때 다 거둬들이지 않고 남겨서 가난한 자들이 먹게 했고, 성전에 들어갈 때 성전세를 냈습니다. 그리고 매 7년 뒤 빚진 자들을 탕감해주는 법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구약의 이스라엘은 매년 25%를 헌금으로 드렸습니다. 더 드리고자 하는 이들은 자원하여 드렸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십일조를 강조합니다. 실제로 십일조를 성경말씀 그대로 적용한다면 오늘날 성도들도 25%를 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맞지 않습니다.
교회들이 십일조를 권장하는 이유는 그만큼이라도 내라고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대로 적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구약의 십일조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십일조는 예물이었습니다.
단순히 세금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며 드렸던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형성되기 전, 아브라함 때부터 십일조가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구출하고 멜기세덱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창 14:20)”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에 대한 찬양 이후에 얻은 재물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야곱의 경우에도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면 그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십일조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창 28:22)”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형성되고 나서 그들이 제정한 법에 따르면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레 27:32)”고 합니다.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신 12:6-7)”
구약의 십일조가 갖는 세금으로써의 강제성과 정해진 비율은 오늘날에 바로 가져올 수 없는 규정이지만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었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도 기억해야 할 원리입니다.
십일조의 용도는 인도자의 필요, 예식을 위한 필요, 가난한 자들의 구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민 18:21)” 레위인들은 땅도, 일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고 모든 삶을 이스라엘을 섬기는데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섬김을 받는 모든 백성이 십일조를 거둬서 레위인의 필요를 공급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주었으므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민 18:24)” 구약의 십일조는 인도자들의 물질적인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레위인들이 십일조를 받으면 그들 역시 그것의 십일조를 또다시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민 18:26).
두 번째 용도는 예식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기 위함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서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네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이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신 14:23-27)” 국가적인 행사를 위한 말씀입니다. 전 국민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필요한 물질을 공급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용도는 구제를 위함입니다.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신 26:12)” 스스로 물질을 구할 수 없는 자들을 구제할 때 십일조가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의 십일조는 인도자의 필요, 예식에 필요한 물질, 교회 안에 궁핍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다음으로는 구약 십일조가 어떤 원리로 드려졌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원리는 구약시대의 헌금은 소득의 일정 부분인 25%를 드렸습니다. 강제성을 띄고 있었고 아무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말라기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내 것을 훔쳤다고 하시면서 그것이 십일조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약 25퍼센트의 물질을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그것이 구약의 원리였습니다.
두 번째 원리는 그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십일조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이 예물을 바친 것입니다.
세 번째 원리는 그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바리새인은 구약의 십일조를 그대로 적용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소산을 하나님께 드리며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화있을진저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십일조는 하면서 정작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버렸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십일조 안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의 성도들에게 십일조를 단지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포함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네 번째로 그들은 십일조를 정기적으로 드렸습니다. 매년, 또는 3년마다 있었습니다. 그것이 왜 중요합니까? 그들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께 재물로 드리는 것이 삶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구약에 드려진 헌금의 원리입니다.
신약에서는 어떨까요?
신약의 헌금도 역시 예물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예배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교회가 처음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많은 물질을 가져와서 사도들 앞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재물의 일정부분을 숨기고 거짓으로 가져왔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3-4)”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도들 앞에 가져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가져온 것입니다. 하나님께 물질을 가져올 때는 경외심, 두려움을 가지고 와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받은 재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 4:18)”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고후 9:13)”
오늘날 헌금은 무엇입니까? 헌금은 세금이나 회비가 아닙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가지고 나오는, 두려움으로 가지고 나오는 예물입니다.
신약 헌금의 용도도 구약의 원리와 오늘날이 같습니다.
첫 번째 구제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행 2:45)”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행 4:34-35)” 헌금을 가지고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줬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모든 사람들을 다 도와주었을까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가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서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딤전 5:8-10)” 가족이 돌볼 수 있는 사람은 가족이 돌보게 하라는 원리가 있었습니다. 가족이 있는 사람은 제외가 되었습니다. 60세 이상 스스로 돌볼 수 없는 사람들이 대상이었습니다. 스스로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제외되었습니다. 또한 선한 행실을 가진 사람, 구원받은 열매가 드러나는 과부를 도우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아서 열매가 드러나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구제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돕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구제의 광범위한 사역의 첫 번째였던 것입니다.
두 번째 용도는 교회를 인도하는 사람의 필요를 돕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딤전 5:18)” 구약의 레위인들의 필요를 공급한 것처럼 신약에서도 교회의 인도자들의 필요를 돕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먹고 살면서 교회의 일을 했습니다. 그러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를 무시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 9:13-14)” 모든 정직한 인도자들은 성도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되도록 스스로 필요를 공급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런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신약시대의 헌금은 어려운 성도를 구제하는데, 인도자의 필요를 공급하는데, 교회의 예식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시대 헌금의 원리도 구약의 그것과 동일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6-7)”
신약시대 헌금의 첫 번째 원리는 일정 부분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로 각자의 소득에 따라 그것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2)” 구약은 특정한 비율이 있었고 강제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세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약은 그렇지 않습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각 영역에 모두 균형 있고 충성스럽게 재물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 원리는 경외심을 가지고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재물을 가지고 가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이 거짓된 마음으로 재물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경외함을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손에 들린 재물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세 번째 원리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재물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아까워할 것도 인색하게 드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린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시는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아이가 용돈을 모아서 부모님께 선물을 사준다면 어떨까요? 얼마나 기쁠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릴 때는 기뻐하는 마음, 자원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자녀가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선물을 준다면 부모는 전혀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네 번째 원리는 정기적으로 드려야 합니다. 헌금은 선심 쓰듯 한 번씩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일어나는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찬양으로 예배드리고 설교를 들음으로 서로 교제함으로 예배드리듯 주님께 제물을 드림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헌금바구니를 돌리는 교회에서는 전 성도가 헌금을 모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매주 하나님께 재물로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은 참 기쁘고 우리 삶에서 익숙해져야 할 부분입니다.
구약의 원리와 신약의 원리가 동일합니다. 그 정의에 있어서, 용도에 있어서, 원리에 있어서 같았습니다. 구약은 강제성이 있었고 신약은 자발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 한다는데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재물을 얻기를 원하실까요?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네 가지 정도의 유익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부요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부자의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소출이 많아 창고를 짓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에 가서 어떤 자이길 원하십니까? 하나님께 부요한 자로 서기 원하시지 않으십니까? 우리를 부요케 하신 그분을 위해 그분 앞에 부요한 자가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우리의 재물을 주님께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아내를 위해 돈을 쓰지 않고 아내가 뭔가를 사는 것을 아까워하면서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가식적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헌금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입술뿐만 아니라 재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면서 한 손에 재물과 한 손에 주님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헌금은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인 것입니다.
셋째, 헌금을 함으로써 우리에게 복이 있습니다.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것들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호흡, 건강, 평안, 모든 축복들 그 많은 것들 중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얼마나 복됩니까?
넷째,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주신다고, 보상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보상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원할 때에 원하는 모습으로 되진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드리니 건강하게 해주세요, 합격하게 해주세요’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합당한 때에 우리가 원할 때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살펴본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었습니다. 인도자를 위해, 예식을 위해,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소득의 일부를 정기적으로 경외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이 헌금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원하는 것과 가장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그분의 사랑을 강하게 경험하기 원하고 그분께 사랑을 표현하기 원한다면 즐겨내는 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즐겨내는 자가 되고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 앞에 부요한 자라는 평가를 받게 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