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선하신 하나님, 함께 배우자
본문: 시편 34편 11-22절
설교자: 최종혁
8절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말하면서 어떤 사람들이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게 되는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자들(8),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9), 하나님을 찾는 자들(10)에게 하나님은 그 선하심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그 선하심이 바로 우리의 “복”이고 그것은 결코 부족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사울을 피해 도망가고 있는 다윗이 아비멜렉에게 미친 척을 하면서 위기를 피하는 이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했고 주위 사람들과 함께 그것을 나누기를 원했고 이제는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12절) 오랫동안 장수하면서 복 받기 원하는 사람이 누구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세상에 살면서 고생만하고 힘들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때로 이 땅에서의 삶이 고돼서 ‘빨리 죽어야지’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진심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만약 이 삶이 즐겁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윗이 여기서 묻고 있는 것은 사실 세상에 태어나서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그런 삶인 것입니다. 그런 삶을 원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 모두입니다.
하지만 복된 삶을 원한다고 해서 모두가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누가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여호와의 선하심을 경험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누가 여호와의 선하심을 경험합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입니다.
“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11절) 다윗은 자신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자녀들은 꼭 부모가 아니고 자녀인 사람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듣고 배우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에 대해서 두 가지를 가르친다. 첫 번째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두 번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얻는 실제적인 복에 대해서 말합니다. 8~10절의 말씀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모습 – 순종하는 삶 (13~14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11절)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성경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개념이고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고 “사람의 본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든 지식의 기초가 되어야 하고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경외는 다른 말로 하면 ‘두려움’입니다.
두려워 한다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보다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존경하고 권위를 인정하는 모습입니다. 지식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분들에 대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런 마음을 갖습니다. 약간의 두려움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말에 큰 고민 없이 따르게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나하고는 정말 다른 차원은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도 있고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런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어떨까요?
시 33:8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이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같은 맥락에서 심판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2:5). 창조주, 주관자, 심판자이신 하나님은 우리와는 구별되시는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본질적으로 위대하시고 그 하시는 일이 위대하십니다. 그분은 모든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만약 실제로 볼 수 있다면 그 하나님을 어떻게 대할까 생각해 봅니다. 두려울 것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분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그 말씀에 바로 순종할 것입니다. 우리가 위대한 사람 혹은 위대한 자연을 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위대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피조물과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배우며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경외한다는 것은 그저 그런 마음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마음이 동기가 되어 실제로 행동하는 것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행 10: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이것은 기계적인 순종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우리가 마음으로 무엇을 더 두려워하느냐,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느냐, 어떤 권위를 인정하느냐를 겉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합니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세 가지 측면에서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이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말합니다.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13절) 첫 번째는 언어 생활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악한 말, 남을 속이는 말,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언어생활에 대해서 정말 많은 말씀이 있습니다. 특히 지혜 문학에 보면 우리 생활에서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서 참 많은 말씀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말해야 하는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신약에서 야고보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약 3:2). 누구나 말에는 실수가 있습니다. 마음속의 분노를 말로 터뜨릴 때도 있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말해도 그 의도가 잘 전달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의도하지 않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때도 있습니다. 정확한 통계를 낼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몸의 다른 어떤 지체보다 입술을 통해 많은 죄를 범합니다.
자신의 혀를 다스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가 말로 많은 죄를 범하게 되는 주된 이유 중 하는 말로는 얼마든지 어렵지 않게 악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음속에 다른 형제에 대한 미움이 있을 때, 실제로 그 형제를 때리거나 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로 불평하고 욕하고 비방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사실인 듯 아닌 듯 사람들 사이에 퍼뜨려 놓으면 쉽게 그 사람을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금하라” 이것은 ‘지키라’. ‘보호하라’는 의미입니다. 말은 그렇게 쉽게 우리 마음에 있는 악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기 때문에 이 말을 잘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은 단지 말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주고 실제로 그 사람이 영적으로 어떤 상태인지를 볼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됩니다.
마 12: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마 15: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
항상 악한 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선한 것이 거한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항상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 실은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악에서 떠나 계시고 거짓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마음으로 경외하는 자가 악한 말을 하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상황이 그래서 어쩔 수 없다거나 난 원래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라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상황이나 개인의 성격이 더 어려움을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장애물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런 것들 위에 하나님이 계심을 내가 인정하고 순종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다윗은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악한 말과 거짓말을 금한다고 말합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14절) 두 번째는 실제 행동에 있어서의 기준입니다. 언어 뿐 아니라 실제 행동에 있어서도 분명한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다윗이 여기서 제시하는 기준은 13절보다 좀 더 적극적입니다. 적극적으로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라고 말했습니다(약 4:17). 베드로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습니다(벧전 3:17). 우리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선을 사랑하시기 때문이고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것을 행동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냐가 기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하면 나에게 어떤 이익이 있는지 없는지가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내 가족의 행복이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일이 효율적이냐, 효과가 있냐가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혹은 과거에 대한 보상으로 지금 어떤 일을 하게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 것들이 이런 것들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을 기준에서 내려오게 하고 수많은 다른 것들을 기준의 자리에 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선한 것이고 악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을 행동의 기준에 둡니다.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시고 선을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악에게서는 최대한 멀어지고 선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입니다.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14절) 세 번째로 다윗은 화평을 적극적으로 추구할 것을 말합니다. 화평을 ‘찾으라’고 말하고 계속해서 그것을 따르라고 합니다.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찾고 그것을 잡기 위해 계속 추적하는 것처럼, 화평에 대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꾼이 아니라 화평꾼, ‘화평케 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 화평은 그냥 유지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기적이고 자기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마련입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우리는 어느새 싸우고 있습니다.
특별히 어려운 경우는 상대방이 화평을 원하지 않을 때입니다. 상대가 나를 공격할 때 화평을 추구하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때도 화평을 추구할 것을 말합니다.
롬 12:17-19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우리는 악한 일을 당할 때 나도 그 사람에게 당연히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가 생겼다고 쉽게 생각합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럴 때에도 화평을 추구하라고 말합니다. 화평을 추구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관계라는 것이 어느 한쪽만 잘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의 책임은 화평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라는 명령을 기록하면서 다윗의 이 말을 인용했습니다(벧전 3:9~12). 다윗은 실제로 사울에 대해서 이렇게 했었습니다. 이 시편을 기록할 때 다윗은 사울을 피해서 도망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어렵고 힘든 때였습니다. 다윗 입장에서는 정말 까닭 없이 당하는 고난이었습니다. 사울에 대해 악한 말을 할 수도 있었고 군대를 모아서 사울과 전쟁을 치를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윗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서 세우신 왕인 사울을 자기 손으로 해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에 대해서 끝까지 좋게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화평을 추구한 것입니다. 화평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화평을 추구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단지 과거의 우리 조상들이 어떤 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았던 것과는 다릅니다. 어떤 종교적인 의식을 열심히 하는 것과도 다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마음으로부터 순종하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물론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기록한 다윗도 그렇고 누구도 완전하게 그렇게 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그러한 삶을 추구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심을 보이십니다. 어떤 선하심을 보이실까요? 다음 말씀에서 약속된 자에게 보이시는 선하심이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복 – 고난 중에서 건짐을 받음 (15~22절)
첫째, 감찰하십니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여호와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를 향하사 그들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15~16절) 의인과 악인의 대조되고 있습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둘 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라보시고 계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너무 다릅니다. 의인을 향한 하나님의 눈은 사랑의 눈이고 자비의 눈입니다. 긍휼의 눈이고 아버지의 눈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눈으로 의인들을 바라보시고 귀 기울이고 계십니다.
하지만 악인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얼굴은 다릅니다. 심판자의 눈입니다. 그들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십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그들의 자취를 지운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았지만 살지 않은 자처럼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들으시고 행하시며 구원하십니다.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17절)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18절)
의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은 그들을 환난에서 건지십니다. “마음이 상한 자”,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는 그동안 언급했던 ‘의인’이라고 말하던 자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마음이 낮아진 자들, 깨진 자들, 자신 안에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의인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미친 체하며 도망했을 때 이런 마음 이었을 것입니다. 그를 찾아왔던 자들도 이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낮아진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하나님은 구원하십니다.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19절) 지금까지 암시적으로 했던 말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는 자라고 해서 삶에서 고난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고난이 없는 삶을 복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고난이 없는 삶을 성경은 복 있는 삶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고난 중에 선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복 있는 삶입니다. 어떤 길을 걷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도 그것입니다. 고난이 많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고난에서 건져 주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구원의 모습과는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결국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20절) 하나님께서 의인을 보호하시는 것에 대한 시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모든 뼈를 보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의로우신 분이셨고, 하나님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성취하셔서 그 의로우심을 증명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수님이 죽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고난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난을 통하여 진정한 구원으로, 영광으로 나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을 구원하시는 일의 궁극적인 본이 되셨습니다.
셋째, 용서하십니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벌을 받으리로다”(21절) 악인은 자신들이 행한 죄악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행한 죄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22절) 하지만 하나님의 종들은 속량하십니다. 죄에서 자유롭게 하십니다. 그들이 행한 대로 갚지 않으십니다. 왜냐면 그들은 하나님께 피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낮아져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은혜를 구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정죄함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으셔서가 아니라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기초하여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19절의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들도 고난을 당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구원하십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서도 그렇게 하시고, 이 땅을 떠날 때도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런 삶 속에서 끊임없이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있게 됩니다.
도전
이쯤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선하신가? 그분은 정말 좋으신 분인가? 정말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는 분인가?
어떤 무신론자가 구약의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시기하고 거만한 존재, 좀스럽고 불공평하고 용납을 모르는 지배욕을 지닌 존재, 복수심에 불타고 피에 굶주린 인종 청소자, 여성을 혐오하고 동성애자를 증오하고 인종을 차별하고 대량학살을 자행하고 어린 자식들을 죽이고 전염병을 퍼뜨리고 과대망상증에 가학피학성 변태성욕에 변덕스럽고 심술궂은 난폭자’ 구약성경을 읽어보고 그가 내린 결론입니다.
시편 103편을 보면 다윗이 경험하고 평가한 하나님은 이렇습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시 103:8~10). 같은 하나님을 두고 어떤 사람은 시기하고 거만한 존재, 피에 굶주린 존재라고 봅니다. 자비란 찾을 수 없는 존재라고 봅니다. 그러나 똑같은 하나님을 보고 다윗은 전혀 다르게 보았습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 경험한 하나님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우십니까? 하나님은 선하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선하신 분입니다. 하지만 관계에 있어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그 선하심을 나타내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대적하는 자에게는 공의를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위의 무신론자가 왜곡하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하셨던 일들만 바라보면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개인적인 복수심, 차별, 과대망상, 취향 때문에 사람들을 심판하신 것이 아닙니다. 공의로 그들이 행한 악에 따라 처벌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누구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선하심을 나타내십니다. 그들과 함께 하시며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하십니다. 죄에 따라 처치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십니다. 오래 참으시고 기다려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던 자들은 한결 같은 고백입니다.
시 103: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하나님의 긍휼과 선하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드러납니다.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경험하길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더욱 그분을 경외하는 삶을 추구하십시오.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그분의 위대하심을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친밀함 가운데 거한다면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