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생명이신 너희 하나님을 보라
본문: 이사야 55장
설교자: 최종혁
이사야 53장을 통해 우리는 ‘죄를 (대신) 담당하신’ 하나님을 보았다. 사람은 죄를 가지고 있다. 이 죄는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는 짐이다. 우리 삶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죄가 가져온 괴로움 때문이다. 우리 육체가 병들고 아픈 근본적인 이유가 죄다. 육체 뿐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고 고통스럽게 하는 이유도 죄다. 우리가 아무리 교육을 하고 사회 제도를 개선해도 여전히 이 모든 문제해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 ‘안’에 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체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다 그렇다. 우리 각자가 죄를 가지고 있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한, 그 어떤 해법도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 바이러스가 침투에서 열이 나는데, 열을 내리겠다고 해열제만 먹는 것과 같다. 조금 있다 그냥 사라지는 바이러스라면 그렇게 증상을 완화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수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해열제는 큰 의미가 없다. 죄에 대한 우리의 해결책이라는 것은 사실 해열제에도 못미친다. 그저 ‘엄마손은 약손’이라면서 배를 문질러주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문제를 우리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 사실 우리는 죄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죄를 문제로 인지하지도 않고 그 사실을 부정한다. 그래서 해결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런 우리의 풀 수 없는 문제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결해 주셨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말해주었던 것이 이사야 53장이었다.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 우리가 담당해야할 죄의 형벌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오늘날 기독교의 상징적인 것이 되었지만, 그 의미를 축소해서는 안된다. 십자가는 사형틀이다. 범죄자에 대한 형벌이 그곳에서 집행되었다. 다만 예수님에게 있어 달랐던 것은 예수님은 범죄자가 아니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범죄자가 아니셨지만 범죄자 중 하나로 취급을 받으셨다.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로마의 형벌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벌을 받으셨다. 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나음을 입고 평화를 누린다.
이사야 54장은 이 놀라운 소식이 가져올 놀라운 결과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지 않을 것임을 말한다.
사 54:1–3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2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3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
이스라엘은 수치를 당했었고 슬퍼했지만 그들의 메시아로 인해 외쳐 노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의 회복에 대한 말씀이다. 그런데 2-3절을 보면 그들의 거주지가 넓어져야 할 것을 말한다. 그들의 자손들이 열방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인용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갈 4:26–28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새언약의 백성들이 바로 이 회복에 동참하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회복은 온 인류의 회복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예언의 말씀이 역사가 되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모든 일들이 바로 이 예언의 성취의 일부다. 그리고 언젠가 이 예언의 말씀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이 이 모든 일들을 이루실 것이다. 그 확실함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사 54:7–8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8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사 54:10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55장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주어진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구원을 이루셨고 또 이루실 것이다. 그럼 이 다음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셨으니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말해줄 차례인 것 같다. 55장의 정확히 그런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죄인들에게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먼저 들어보라.
사 55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4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 5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6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8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10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11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12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13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죄인들을 책망하고 다그치고 위협할 수 있으셨겠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부드럽게 그들을 부르신다. 구원으로, 생명으로, 참된 삶으로 초대하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와주면 좋지만, 못 와도 할 수 없지’라는 메시지가 이 초대에 있지는 않다. 이 초대는 반드시 응해야하는 초대다. 가볍게가 아니라 진지하게 응해야하는 초대다. 생명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초대(부르심)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부르신다(1-5절)
누가?
이 말씀에서 가장 먼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르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사 55: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오호라”는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좀 더 문맥에 맞고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번역하자면 “주목!”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부터 매우 중요한 얘기를 할테니, 하던 것을 멈추고 여기를 보라는 말씀이다.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들으라는 말씀이다. 2절에서는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라고 강조해서 말하고, 3절에서도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고 다시 말한다. 딴 짓 하지 말고 딴 생각하지 말고 제대로 들으라는 말씀이다.
그만큼 중요한 얘기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시는걸까? 1절을 다시 보면 “오라”라는 명령이 세 번 반복된다(“나아오라”, “오라”, “와서”). 세 번 오라는 말이 아니라 오라는 명령을 세 번 강조하는 것이다. 와서 이 말을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 말을 듣고 오라는 것이다. 즉, “오는 것” 자체가 중요한 명령이다. 6-7절에는 다른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같은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찾으라”고 하시고 “부르라”고 하신다. “돌아오라”고 하신다.
누구를?
그럼 하나님은 대체 누구를 이렇게 간절히 부르시는 것일까? 1절에서 이들은 “목마른 자”이고 “돈 없는 자”다. 2절에서는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돈을 헛되게 쓰고 있는 자다. 하지만 이 표현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아닌 것이 3절에서 드러난다.
사 55: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
이 말을 바꾸면 이들은 ‘현재 영혼이 죽어있는 자들’이라는 의미가 된다. 오늘날 영혼이 죽었다 혹은 영혼이 없다는 말이 뭔가 감정이 메마른 것에 대한 표현이 되었지만, 성경적인 의미는 그렇지 않다.
엡 2:1–3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신이 원하는대로 사는 자들이 바로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다. 그래서 7절에서 하나님은 더욱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사 55: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들은 ‘악인’이다. ‘불의한 자’다. 이 말은 항상 못된 짓만 생각하고 남을 괴롭힐 생각만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사실 성경이 말하는 죄인을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일단 죄인이라고 하니 기분이 나쁘고 (실제 죄인이어도 마찬가지.)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또 생각해 봐도 나는 죄인은 아닌 것 같으니, 복음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죄인은 (그런 사람을 포함하지만) 그런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볼 때 가장 선하고 의로운 사람도 성경이 말하는 죄인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생각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져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길로 행하기 때문에 악인이고 불의한 자다. 이사야 53장에서는 이것을 양과 같이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간 것으로 표현했었다. 그것이 죄인들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게 뭐가 문제냐는 생각이 들 수 있다. 남의 삶도 아니고 내 삶을 내가 원하는대로 산다는데,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남에게 크게 피해주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무슨 권한으로 무슨 기준으로 나를 죄인이라고 하고 악인이라고 하냐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설령 내가 하나님이 볼 때 죄인이라고 해도 어차피 그조차 내 삶인데 그게 하나님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춘기의 자녀들이 (혹은 다 큰 자녀도) 가끔 부모의 잔소리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말할 때가 있다. 내 인생 내가 사는건데 엄마 아빠가 무슨 상관이냐고. 엄마 아빠 집에서, 엄마 아빠가 주는 밥을 먹고, 엄마 아빠가 주는 돈으로 옷을 사고 친구를 만나고 영화도 보고 휴대폰도 사고 통신비도 내면서 하는 말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부모의 마음은 찢어진다. 들인 노력이나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어디 갖다 버리든 팔았어야 했어야 했는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부모가 아니다. 그런 사람은 포주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해서 그들이 잘못되는 것을 보고 있지 못해서 그들이 듣기 싫어 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싫어 할 줄 알면서도 그들이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그냥 볼 수 없어서 싫은소리를 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의 진정한 행복을 바란다. 그런 행복에서 자녀가 멀어지려는 모습에 마음이 찢어지는 것이다.
만약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그냥 알아서 살게 두신 분이었다면, 나와 하나님은 아무 상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창조해서 필요에 맞게 잘 이용할 생각만 하셨다면 우리가 행복하든 말든 기능만 잘하면 하나님은 신경쓰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하기에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지만 또한 아버지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생명이신 하나님을 떠나 죽음의 삶을 사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으셨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는 삶을 사는 우리를 그냥 두실 수 없으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신다. 사랑하는 자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이들은 (그리고 우리도 마찬가지로) 마치 부모와 함께 있으면 불행하다고 생각해서 집을 나간 자녀같다. 집 밖에 그들의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고 뛰쳐나간 것이다. 집을 나간 자녀가 어쩌면 행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난 자는 절대로 행복을 찾을 수 없다. 절대로 삶의 참된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을,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이렇게 확언할 수 있는 이유는 이렇다.
왜?
사 55: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여기서 하나님은 마치 좋은 물건을 파는 상인처럼 말씀하고 계시다. 하나님은 세 가지를 가지고 계신다. 물, 포도주, 젖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물은 생명을 의미하고, 젖은 성장을 의미하고, 포도주는 즐거움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물은 생존에 필요한 것이고, 젖은 생활에 필요한 것이고, 포도주는 그 삶을 더욱 즐겁고 풍성하게 만족하며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를 합하면 그것이 곧 참된 삶, 참된 생명, 영생이다.
사 55: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오는 자가 살 수 있다. 하나님께 오는 자만이 살 수 있다. 다른 데도 물과 포도주와 젖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으로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2절에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사 55: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불필요한 수고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불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파괴적인 수고다. 절대 하지 말아야할 수고다. 다른 데서 양식을 얻으려고 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다. 얻을 수 없는데서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느라 하나님께로 와서 참된 물과 포도주와 젖을 얻지 못한다는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래서 결국 목마르다. 배고프다. 고통스럽다. 이것은 시간이 해결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더욱 심해진다. 하나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시다.
어떻게 하나님 만이 우리를 살게 하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만 그렇게 하실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왜 다른 것은 절대 못한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하나님만이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에 생명을 주신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모든 것의 창조주라고 선포하는데, 그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에 생명을 주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요 1:3–4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시 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하나님이 생명이셔서 하나님 만이 이 생명을 주실 수 있으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생명을 주기 원하신다.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셨던 예수님의 이 말씀이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말씀의 좋은 요약이 될 것이다.
요 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래서 예수님도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사람들에게 외치셨다(요 7:37). 하나님 만이 우리 영혼의 갈증을 푸신다. 우리를 살게 하신다. 하나님이 생명이시니, 바로 그 생명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로 나아오라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분명히 할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물과 포도주와 젖은 세상의 것과 다를 것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에서 누렸던 것을 하나님 안에서 똑같이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또 하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생명은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참된 삶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엄청난 것을 확실히 약속하셨다. 절대로 철회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그 대상은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고 모든 민족이 대상이 될 것이다.
사 55:3–5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4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 5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사도행전 13:34에서 바울은 이 말씀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밝혔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로 오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은 참된 생명을 주시겠다는 분명하게 약속하셨다는 사실이고 그것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여기까지 말씀을 정리해 보자.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신다. 메마른 곳에서 목말라 죽어가는 자들에게 물을 주겠다고 부르신다. 양식도 아닌 것을 돈 주고 사서 먹지 못해 여전히 배 고픈 자들에게 젖을 주겠다고 부르신다. 괴로워 하는 자들에게 기쁨의 포도주를 주겠다고 부르신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부르셔서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그럼 중요한 것은 ‘어떻게’다.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치뤄야할 댓가가 어마어마할텐데, 어떻게 그것을 얻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어떻게?
어쩌면 이 부르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두 부류의 사람을 두고 말씀하신다.
첫째는 “돈 없는 자”다(1절). 돈이 없는 사람은 이런 초대의 말이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어차피 돈이 없기 때문이다. 해외에 나가면 명품 파는 곳을 지나칠 때가 있는데, 거기 뭐라고 써있든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아무리 세일을 하고 뭘 해봐야 내가 지불할 수 없는 금액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그런 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여기서 말하는 “돈 없는 자”는 이미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다. 자기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다. 나에게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미 난 세상에서 제대로 살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나 같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게 무슨 말인가 싶다. 돈이 없는 데 어떻게 사먹는가? 그냥 무료급식이면 돈이 없어도 먹을 수 있다. 그런데 돈 없는 사람에게 사먹으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돈이 없는데 어떻게 돈을 지불해서 먹을 수 있는가. 그리고 사먹는데 그게 어떻게 ‘값 없이’와 연결될 수 있는가.
모순이 아니다. 돈 없는 사람도 사먹을 수 있다. 누군가가 그 값을 대신 지불해 주면 된다. 그러면 나는 돈이 없어도 사먹을 수 있다.
1절 말씀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구원)은 싸구려가 아니라는 것이다. 끼니만 겨우 떼울 수 있게 해주는 무료급식을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먹고 배부르고 기뻐할 수 있는 값비싼 만찬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돈 없는 사람은 쳐다보지도 못할 음식이다. 메뉴판이 있다면 펼치지 말아야할 페이지, 손으로 가려야할 메뉴다.
하나님은 돈 없는 자에서 와서 그런 음식을 사먹으라고 하신다. 값은 이미 지불되었기 때문이다. 이사야 53장에서 지불되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죄를 대신 담당하심으로 지불하셨다. 치뤄야할 댓가가 어마어마할 것이란 생각이 맞긴한 것이다. 다만 이미 그 댓가가 치뤄졌다는 사실만 알면 된다. 그러니 오면 된다. 하나님께 나오지 못할 죄인은 없다. 와서 이미 값이 지불된 음식을 먹으면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초대다.
다음으로 2절은 조금 다른 부류의 사람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 사람들은 돈이 있다. 문제는 그 돈으로 양식이 아닌 것을 사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오늘날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 부류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이들은 가진 것이 있고 이것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사고 있다. 스스로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가진 것이 있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은 아니지만 앞으로 충분히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완벽하다고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소소한 행복이 지금 내 삶에 있고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하나님은 안타까워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 55: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오늘날 사람들이 더 가지고 싶어해서 문제라고 말하지만, 진짜 실상은 정반대다. 사람들은 더 가질 수 있는게 더 갖고 싶어하지 않는다. 더 큰 만족과 기쁨을 추구해야 하는데, 작은데서 만족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먹이고 기름진 것으로 즐겁게 하시는데, 먹지도 못할 것을 가지고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작은 장난감에 만족해서 부모가 주고 싶어하는 더 큰 장난감을 얻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다. (썩 좋은 비유는 아니지만) 반짝이는 동전이 마음에 들어서 더 큰 가치가 있는 지폐를 원하지 않는 어린아이와 같다.
어린아이가 그러는 것은 귀엽다. 하지만 그 아이가 크고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그런 선택을 하고 있다면 부모는 답답할 것이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개인의 선택을 존중해줄 수 있는 영역이라면 괜찮을지 모른다. 그런데 정말 삶의 질과 직결된 문제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단순히 삶의 질과만 직결된 문제가 아니라 삶 자체, 생명과 직결된 문제다. 가졌다고 생각하고 그것으로 먹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뻐하지 말아야할 것에 기뻐하고, 만족하지 말아야할 것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에서 하나님은 같은 문제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렘 2:11–13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12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단순히 다른 것을 찾는 것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것을 찾으며 그것에서 하나님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문제다. 하나님을 다른 것으로 바꾸고 다른 것을 하나님으로 만든 것이 문제다. 이것이 악이다. 나를 죽이는 악이다.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다. 제발 말 좀 들으라는 의미다. 지금 상태로 괜찮다는 고집과 아집,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다. 행복을 추구한다면 작은 행복에 만족하지 말라고 하신다. 기쁨과 만족을 추구한다면 더 큰 것을 추구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이 그 모든 참된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이들이라고 와서 자기 돈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난한 자로, 돈 없는 자로 하나님께 가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맛보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초대다.
부르심에 응답하라 (6-13절)
자,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하나님은 정확히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말씀해 주셨다.
사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을 불러야 한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사실 이사야의 말씀, 특히 53-54장의 말씀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부르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불렀을 것이다. 그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도 이 놀라운 구원에 참여한 자가 되게 해달라고 구해야 한다. 이사야 39장까지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기억한다면 더더욱 그러해야 할 것이다. 이 구원에 참여하는 것은 어차피 좋은 삶에서 좀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다. 영원한 심판과 영원한 생명의 문제다. 당연히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구원에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 당연하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하셨다. 그 사랑, 긍휼, 자비, 은혜, 온유, 오래 참음 등 무엇이라 다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셨다. 이사야 53장에서 나의 죄를 담당하신 하나님을 제대로 보았다면, 우리는 그 앞에 무릎꿇고 빌어야 한다. 다른 곳에서는 다 고칠 수 없다고 하는 병에 걸린 사람이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의사를 만나면 어떻게 하겠는가? 당연히 도와달라고 할 것이다. 그 의사의 상황을 신경쓸 경황도 없어서 무작정 찾아가서 무릎꿇고 빌지도 모른다. 하나님께 대해서 우리가 이렇게 해야한다는 말이다. 혹 하나님이 만나기 어렵더라도 기를 쓰고 만나야 한다. 만나기 두렵더라도 그렇게 해야한다. 이것이 우리의 마땅한 태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먼저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부르셨다. 걱정 말고 오라고 하셨다. 어떤 목사님은 이에 대해 “진짜라고 하기에는 너무 좋은 얘기”라고 표현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정말 사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좋은 얘기다. 그래서 ‘복음’이라고 한다. 사기가 아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부르셨다. 이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여기서 한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6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라.
사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이 말씀은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실 때가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는 말이다. 언제일까? 알 수 없다. 계시록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구원의 기회를 끝내실 때가 올 것이지만, 이 말씀은 그런 종말론적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말씀은 개인에 대한 말씀이다. 개인에게 언제 이런 때가 찾아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나이가 많든 적든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위대한 초대가 나에게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 ‘지금’ 하나님을 찾으라. ‘지금’ 하나님을 부르라. 미루지 말라. 교회 있다보면 언젠가는 나도 하나님 믿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생각을 버리라. 그래도 어려서부터 계속 교회 다녔으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지옥은 안가지 않을까하는 안일한 생각을 버리라. ‘지옥은 안가지 않을까’는 없다. 안가든지 가든지다. 지금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지금 응답하라.
그런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한 가지가 있다. 내 생각과 내 길을 버리는 것이다.
사 55: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그럼 그렇지,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라는 생각이 들지 모르겠다. 결국 하나님이 자기 맘대로 하려는거잖아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내 생각과 내 길을 버리는 것을 필수적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에 추가로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내가 목 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물과 포도주와 젖을 주시는 하나님께 내가 나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여전히 내가 양식을 잘 사먹고 있다고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내가 원하는 길을 가면서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길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의 참된 행복이 하나님께 있기에, 지금의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 생각도 맞고 내 길도 크게 나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내 생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 뿐이다. 내 길은 나를 멸망으로 인도할 뿐이다. 나의 가장 큰 적이 바로 나다.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 몇가지 이슈들이 있었다. 그나마 아직은 이런 것들이 ‘이슈’가 되지만, 아마도 몇 번의 올림픽이 더 지나면 ‘이슈’조차 되지 않을 시대가 올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모든 것들의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가 올림픽의 폐막식에서 힘차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외쳐졌다는 것이다. 바로 <My Way>라는 노래를 통해서다.
<My Way>는 세계적인 명곡으로 알려져있는 노래이고, 본래 프랑스 가수가 부른 노래를 미국의 가수가 다른 가사를 붙여 불러서 유명해진 노래라고 한다. 그래서 다음 올림픽이 미국에서 개최되니 그런 의미를 담아서 폐회식 노래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 가사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 가사는 죄의 본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말해준다. 이 곡은 한 남자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좋은 일, 나쁜 일에 대해서 이제는 다 지난 일로서 초연하게 언급한다. 그러면서 강조하는 것이 이것이다. “I did it my way.” 뭐가 되었든 내 방식대로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나에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 노래의 마지막 절의 첫 가사는 이렇다. “남자는 무엇 때문에 남자인가요? 무엇을 가졌나요? 만약 그 자신이 아니라면, 그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세상의 생각이다. 내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이유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16:24–2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이제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있다. 내 생각대로 내 길을 따라, 그 끝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길을 따라 참된 영생의 삶을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그런 선택의 기로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 55:8–11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10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11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내 생각이 아무리 맞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생각이 맞다.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은 비교할 수 없다. 그리고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모두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이 모든 말씀은 절대로 헛된 말이 없다. 이미 모든 것들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성경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무엇보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그것을 증명하셨다. 모든 것이 하나님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졌고 또한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마지막으로 12-13절에서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약속의 말씀을 주신다.
사 55:12–13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13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에 기쁨이 있다. 13절은 죄로 인한 저주가 사라질 것에 대한 말씀이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우리는 참된 생명을 다시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답은 정해져 있다. 어리석음을 선택하지 말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도전
결과적으로 생명이신 하나님을 봐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이 생명이시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삶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 “나의 길”을 따르고 이 삶을 만족하며 마무리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다시 눈을 뜨는 순간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절대로 그런 일이 우리에게 있지 않기를 원한다. 생명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 생명을 주기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기억하라. 그리고 늦기 전에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영생을 얻은 자들은 그럼 이제 다 끝났는가? 당연히 아니다. 영생은 단순히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생명이신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다른 것에 시선을 빼앗기고 거기서 만족을 누리려고 한다. 계속해서 양식이 아닌 것을 먹으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이게 정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생명의 삶인지 모르겠는 것이다. 예수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다고 했는데(요 10:10), 이게 그건지 잘 모르겠는 것이다.
아직은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다. 아직은 죄가 우리에게서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영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우리의 참된 소망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전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처음에 바라봤던 그 생명의 하나님을 계속해서 바라본다면, 지금 우리의 삶은 분명히 달라진다. 생명 주시는 하나님을 계속 바라봐야 한다. 계속해서 나의 생각과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내 안에 채우고 하나님의 길을 따라야 한다. 이 세상에서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싶을 수 있다.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 수도 있다. 그때도 하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굳건하다. 그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소망 중에 기뻐하자. 믿음으로 인내하자. 사랑으로 살아가자.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눈으로 볼 수 없는 자들에게 그 생명의 풍성함과 기쁨을 보여 주자. 우리가 그것을 보여줄 수 있다. 우리가 생명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간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