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이 기도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의 소식을 듣던 날부터 그치지 않고 계속하고 있는 기도의 내용은, 오늘날 우리의 기도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는 왜 이와 같은 기도를 했을까요?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신령한 지혜와 총명’이라는 것은 어떠한 지식보다는 실질적인 삶에 적용하는 재능, 지혜를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총명과 신령한 지혜에 하나님을 아는 것이 더해지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목적과 교회가 세워진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이 땅에서 이뤄지기를 원한다는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과 사도 바울의 그것이 거의 일치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새벽기도, 철야기도를 통해 외치고 있는 기도의 내용이 ‘자신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과 구속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달라는 기도는 곧, 우리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지게 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주께 합당한 삶이고 선한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말이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물질적인 축복과 영적 축복을 함께 받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적으로 보장하신 것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물과 음식을 공급하셨습니다. 또한 의복과 신발도 40년 동안 헤지지 않도록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이 아파트와 자동차는 책임지지 않으셨지만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책임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금도 신실하게 지키고 계십니다. 어떤 어려운 나라에 있든지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채우시는 것을 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지게 될 때 우리는 주님 앞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됩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강한 두 가지 소욕이 존재합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그것입니다. 성령의 소욕이 점점 쇠약해갈 때 육체의 소욕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성령께서 내 안에 계셔서 나를 지키지 않는다고 하면 나 자신은 벌써 악의 세력에 끌려갔을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를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능력으로 채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것을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것,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가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매주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한다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갈 수 있을까요?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을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너무나 얇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신앙 안에 있지만 주님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그저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자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점점 알아갈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채우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영적인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기쁨으로 견디는 것과 오래 참는 것은 모두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로 충만해질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게 될 때 모든 어려움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범사에 잘되게 해달라고, 시작은 미약했어도 끝은 창대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어려움을 기쁨으로 견디고 오래 참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집에 환란이 생겨 병들거나 사업이 망하거나 믿는 것으로 인해 핍박받는 일이 있다면, 그것을 견디고 즐거움으로 참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리스도의 충만한 것으로 충만하게 되면 모든 환경에서 견딜 수 있고 기쁨으로 참을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좋은 일이 생기면 기뻐하고 나쁜 일이 생기면 슬퍼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좋은 일이거나 슬픈 일이거나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로 인해 하나님의 보상이 있고 그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뻐해야 할 이유가 많은데도 슬퍼할 이유들만을 찾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 중에 어려움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크고 작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가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환경을 기쁨으로 견디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을 상쇄하고도 남을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충만한 것으로 채운다면 그의 어려운 환경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환란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아니면 우리는 절대 그 안에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 건저내셨을 뿐만아니라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영적인 축복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물질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이 몸의 안위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해달라고, 하나님의 충만한 것으로 충만하게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손발이 없고 소경으로 태어났는데 예수님을 믿고 나서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본 것은 환경을 뛰어넘는 큰 영적 축복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을까요? 영적인 세계, 아버지의 축복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열어서 우리를 부르신 부름의 소망이 무엇인지, 기업의 영광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베푸신 큰 축복이 무엇인지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려운 환경을 능히 이겨내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환경을 변화시켜 달라는 기도가 아닌, 환경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영적인 축복들을 보고 하나님을 체험하게 해달라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노년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아마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굶어죽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으시고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충만한 것으로 채워지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