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빛 가운데 행하게 하는 복음 2

본문: 요한일서 1장 5절 – 2장 3절

설교자: 최종혁

복음을 단순히 나에게 어떤 좋은 일이 일어나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성경의 많은 명령들은 복음과는 관계 없는 그저 도덕적인 삶에 대한 명령으로만 느껴진다. 복음과 명령(순종)을 연결시키면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은혜로 값없이 얻는 구원에 뭔가를 더하는 것 같다. 때로는 복음을 전한 사람이(혹은 성경이) 거짓말을 한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믿기만 하면 된다더니 이제와서 이런 저런 것들을 해야한다고 말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람도 그런 명령들을 짐으로 여기는 경우도 많다.

예수님 믿으면 이게 좋아요 저게 좋아요라고 말하는 모든 것들, 심지어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과 관계 없다면(물론 실제로 그런 일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그게 가능한 듯이 ‘좋은 것’을 생각할 때가 있다), 그것은 복음이 말하는 좋은 일이 아니다. 복음은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대한 것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성경이 말하는 복음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대한 좋은 소식이다.

이 회복된 관계의 중심에는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빛이신 하나님과 어둠인 우리가 만나 적당히 밝고 적당히 어둡기도 한 관계를 만들지 않는다. 온전한 빛의 관계를 만든다. 성경의 명령들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고 요한일서를 보내면서, 빛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먼저 강조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며, 그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분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는 요한을 비롯한 사도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직접 가르치고 보여주셨던 사실이다. 사도들은 그 예수님의 충성스럽고 신실한 증인들이 되어서 그 사실을 전했다. 이는 전혀 의심할 수 없는 성경의 진리다.

“하나님은 빛이시다”라는 말은 특히 세 측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진리, 거룩, 그리고 생명이다. 하나님은 진리의 빛이셔서 그분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으시다. 하나님은 거룩의 빛이셔서 그분에게는 죄가 조금도 없으시다. 하나님은 생명의 빛이셔서 그분에게는 죽음이 조금도 없으시다.

또한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 요한은 빛의 영역과 어둠의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한다. 물론 실제로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은 없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시다. 지옥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 지옥이 아니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지옥이다. 지금 요한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영광과 관계된 사실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분께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은 온전히 구분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본질에 속한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원리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 특히 죄와 관련하여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를 요한은 설명한다. 이 말씀에서 요한은 반복되는 문장 패턴을 사용한다. “만일 …이라면 …이다”라는 패턴이다. 이 표현은 “만일 무엇을 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로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요한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냐다. 즉, 5절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한 것처럼 6절 이후에서는 사람에 대해서 어떤 사람인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표현은 “만일 …하는 사람이라면 …이다”로 이해하면 좋다.

요일 1:5–2:3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6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7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2:1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관계의 중심이 되는 원리가 5절에서 제시되고, 그 원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는 빛 가운데 행한다”는 실제 명제로 적용됨을 6-7절에서 말한다. 그리고 8절 이후의 말씀은 이 명제가 줄 수 있는 “죄 없는 삶”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는 말씀이다. 오늘은 6-7절을 살펴보자.

동일한 고백

6-7절을 보면 사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은 아니다. 이 구절들은 두 가지 상반되는 상황을 가정하여 말하고 있다. 6절은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면서 어둠 가운데 행하는 상황(혹은,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면서 어둠 가운데 행하는 사람)을 가정해서 말하고, 7절은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는 상황(사람)을 가정한다. 여기서 “우리”는 지난 주에 언급했던 것처럼 5절까지의 “우리”와는 다르게 일반적으로 사람을 지칭한다. “어떤 사람이”라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 6절과 7절은 어둠 가운데 행하는 사람과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을 대조한다. 하지만 두 구절은 단지 두 부류의 사람을 대조만 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행하는 것은 대조되지만 하는 말은 동일하다. 즉, 대조되게 행하는 사람들이 말은 동일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동일하게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한다.

물론 7절에서 묘사하는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이 어떤 말을 하는지를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문맥 상 6절과 동일하기 때문에 생략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고백하면서 어둠에 행하는 사람과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이 대조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는 말은 그럼 어떤 의미인가? 요즘 ‘사귐’은 주로 친구나 연인 관계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는 말은 좀 어색하게 들린다. 여기서 말하는 ‘사귐’은 헬라어 ‘코이노니아’로서 교제하는 것, 무언가를 함께(참여) 하는 것, 공유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 성도가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친밀함을 나누는 것이 코이노니아이고(행 2:42, “서로 교제하고”), 또한 떡과 잔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도 코이노니아다(고전 10:16,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 가난한 자를 위하여 구제 헌금을 하는 것도 코이노니아에 해당된다(롬 15:26, “가난한 자를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문맥에 따라서 다르게 번역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공유하고 함께한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인격적인 존재 사이의 관계에 사용될 때는 친밀함을 나누는 교제의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는 말의 의미도 그렇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표현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자녀가 된다. 천국에 갈 수 있게 된다. 하늘의 기업을 얻는다.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7:3).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 그리고 그 회복된 관계 안에서 친밀함을 누리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고 영생이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는 말은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요한은 지금 이렇게 동일하게 고백하는 사람들의 두 부류를 대조하며, 그 고백의 진위를 가린다. 그 진위를 가릴 수 있는 근거는 말의 일관성이나 논리성 같은 것이 아니라, 바로 삶에 있다.

어둠 가운데 행하는 자

상태

먼저 6절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면서 어둠에 행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한다.

우선은 “행한다”는 표현을 잘 이해해야 한다. 성경에서 “행한다”, 즉 “걷는다”는 것은 항상 ‘삶’을 의미한다. 삶의 방식, 패턴, 상태, 특징, 방향 등으로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두 번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나 행동을 하는 것을 그 사람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여름에 가끔씩 수영장이나 바다에서 수영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수영 선수’라고 칭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축구를 매주 혹은 매일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축구 선수’라고 불리는 사람하고는 다르다. 축구 선수는 ‘축구’라는 것으로 그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사람이다. 프로에 들어가서 운동을 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렇다. 편의점에서 일하고 택배 배달, 대리운전 같은 다른 일을 하더라도 축구 선수는 축구를 하기 위해 그런 일들을 한다.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면 축구 장비를 사고 훈련을 받는다. 축구를 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삶의 방향이 그런 것이다.

성경에서 “행한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어떤 일을 한 두 번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일을 자주 혹은 많이 하면 “행하는 것”에 좀 더 가깝기는 하겠지만, 그것도 엄밀히 말해 앞서 예를 든 것처럼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다. 조기 축구를 하는 사람이 축구 선수보다도 축구 자체는 더 자주 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삶을 결정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무엇이냐다. 그 삶의 방향이 어디를 향해, 무엇을 위해 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가장 원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사람은 그 마음의 원함(소원)을 따라 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무엇으로 행한다 혹은 무엇으로 행하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다.

그럼 “어둠에 행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둠은 빛의 반대다. 빛이 진리, 거룩, 생명이라면 어둠은 거짓, 죄악, 죽음이다. 하나님의 속성과 정확히 반대되는 것이 어둠이다. 따라서, 어둠에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과는 반대되는 삶의 모습을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한 두 번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요한은 어둠의 일을 “한다”고 표현하지 않고 어둠에 “행한다”고 표현했다. 어둠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어둠이 그 사람의 삶의 특징이고 방향인 것이다. 어둠이 그 삶을 지배하고 있고 그 마음이 원하는 것이 어둠에 속한 것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인간들의 상태를 말할 때, 이런 이미지가 사용되었다.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이런 상태에 대한 정확한 묘사는 에베소서 2:1-3에 기록되어 있다.

2:1–3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결과적으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사탄을 따라서 불순종의 삶을 산다. 그런데, 억지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게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곧 우리의 마음이 원하는 것에 따라 살았던 결과라고 말한다. 로마서 7:5도 비슷하게 이렇게 말씀한다.

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죄를 원하는 우리의 마음이 사망을 위한 열매라는 행위로 이어진다. 어둠에 있을 때는 죄의 정욕이 우리를 지배(“역사”)한다. 그래서 죄악된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다.

요한은 어둠에 있는 사람은 형제를 미워하고 빛 가운데 있는 자는 형제를 사랑한다고 말한다(요일 2:9-10). 그러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덧붙였다.

요일 2: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어둠에 있는 자가 어둠에 행하는 이유는 어둠이 그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이다. 즉,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제대로 알지 못해서 어둠의 일을 택한다는 것이다. 마치 물고기가 뒷일은 알지 못하고 미끼를 간절히 원해서 무는 것과 같다. 만약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을 때 어떤 일이 자신에게 벌어진다는 것을 안다면 미끼를 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물고기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 눈 앞에 있는 미끼를 간절히 원한다. 그래서 미끼를 물고 낚시꾼에게 잡히게 된다.

존 파이퍼 목사는 이것을 깜깜한 방 안에 있는 어떤 사람의 비유로 묘사하기도 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방 안에서 어떤 사람이 한 손으로 만져보니 부드럽고 따뜻한 털이 느껴지고, 다른 손에는 차갑고 날카로운 모서리가 느껴졌다. 당연히 따뜻하고 부드러운 쪽으로 마음이 간다. 그것을 더 원한다. 그런데 불이 켜지니 그 부드럽고 따뜻한 털은 식인 괴물의 배였고, 차갑고 날카로운 모서리는 나를 구하려는 예수님의 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원하는 것이 완전히 달라진다. 하지만 어둠 속에 있어서 보지 못할 때는 부드럽고 따뜻한 식인 괴물을 더 간절히 원한다.

이것이 어둠 가운데 행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우리들의 모습이다. 우리는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을 원하고 그에 따라 산다.

그럼 이제 6절이 묘사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보자. 이 사람은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한다. 오직 진리와 거룩과 생명이 하나님께 있다. 그런데, 그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다고 주장하는 이 사람은 거짓과 죄악과 죽음에 속한 것들을 원하고 그에 따라 살고 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기 전 어둠에 속했을 때의 삶을 지금 그대로 살고 있다. 이 사람의 말과 삶에 대해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까?

진단

요일 1: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는 그의 말은 거짓말이고, 그가 행하는 것이 진리라는 그의 삶도 거짓이다. 그는 거짓에 따라 거짓을 행하고 있을 뿐이다.

너무 당연한 논리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나는 빛 가운데 있다고 주장해도 그는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가 거짓의 미끼를 진리라고 믿고 있고, 부드럽고 따뜻한 식인 괴물의 털을 생명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한, 그는 진실을 보고 있지 못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둠 가운데 행하는 사람이 “나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나는 진리를 행한다”, “나는 생명이 있다”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사도 요한 당시에는 ‘영지주의’라는 것이 있어서 이런 논리를 가능하게 했었다. 영지주의는 영적인 것만이 의미가 있어서 실제(육으로) 죄를 행하는 것은 영적인 상태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었다.

오늘날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어쨌든 구원 받았다고 진심으로 고백한 적이 있으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더라도 그 사람은 구원 받은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들은 ‘육적인 그리스도인’일 뿐 구원 받은 것은 확실하다는 주장이다.

안타깝지만, 사도 요한의 말에 따르면 이런 주장은 어둠 속에 있어서 무엇이 빛인지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정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다면,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말의 의미를 안다면, 자기 욕심에 따라 살면서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 말은 거짓이고 그 삶은 진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여전히 그는 하나님과 원수된 자이고 여전히 거듭나지 못한 자다. 그의 주장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그의 간증이 얼마나 감동적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그가 과거에 얼마나 그리스도인다웠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지금 어둠에 행하고 있다면,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는 그의 말은 거짓이다.

빛 가운데 행하는 자

상태

7절은 6절에서 묘사한 사람과 대조되는 사람에 대해서 말한다. 대조되는 것은 말이 아니라 삶이다.

요일 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

먼저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서두에 말했듯 이 말씀은 무엇을 하면 어떻게 된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빛 가운데 행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빛 가운데 행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즉,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서로 사귐이 있게 되고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니까 우리는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는 명령처럼 이 말씀이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앞서 6절도 똑같은 문장 구조로서 어둠 가운데 행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어둠 가운데 행하는 자라면 이런 영적인 상태는 이런 것이다라는 의미였다. 요한은 지금 드러나는 현상을 통해 내면의 상태를 지금 진단하고 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은 이미 빛 가운데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게 행한다. 어떻게 빛 가운데 들어왔는가?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서 빛 가운데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우리는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진 것이다.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어떤 노력으로 빛 가운데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들어오게 한 사람들이 그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언제나 빛 가운데 계신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행하시는 모든 것이 빛 가운데 있다. 그런 하나님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자들은 빛 가운데 행한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럼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당연히 앞서 살펴봤던 어둠 가운데 행한다는 의미에 반대되는 의미다. 어둠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어둠에 속한 것을 원하고 그에 따라 사는 것이었다. 세상을 따라서 사탄을 따라서 육신의 정욕을 따라서 사는 삶이다. 반대로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의 정욕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어둠 속에서 그 마음 속에 가지고 있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받아 죽였다는 말이다. 그럼 이제 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를 원한다.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빛 가운데 들어온 자들은 이제 그리스도를 가장 원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새로운 마음의 소원이 생겨난다. 달라진 것이다. 세상과 사탄과 죄악된 육신이 원하는 것을 따르며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던 자가 이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알기 원하고 그것을 행하기 원한다. 그 안에 참된 만족과 기쁨, 진정한 행복이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변화가 삶을 통해 드러난다. 이것이 빛 가운데 행하는 자의 모습이다.

특히 요한은 여기서 빛 가운데 행하는 것에 대해서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라는 말을 더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빛이신 것처럼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가고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경건”은 일반적으로 뭔가 좀 조용하고 엄숙한 상황을 지칭할 때 많이 사용하는 표현이다. 혹은 어떤 사람에 대해서 “경건하다”고 표현할 때는 금욕적이고 어떤 종교적인 규칙같은 것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을 의미한다. 항상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티비나 유튜브, 영화, 스마트폰 같은 것을 멀리하는 사람을 ‘경건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적인 의미에서 “경건”은 하나님을 닮은 모습이 경건이다.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그 하나님을 닮아서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이 바로 경건한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어둠 가운데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이라면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이다. 어둠 가운데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왜곡되게 드러내는 것이라면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어둠 가운데 행하는 것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삶이라면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추구하는 삶이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다르게 말하자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동행에 있어 중요한 것은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나도 원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한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사귐을 누리셨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

온전히 하나님을 최우선에 두고 하나님 만을 원하고 온전한 순종을 삶을 예수님은 사셨다. 이것이 온전히 빛 가운데 행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은 이런 삶을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런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 하나님을 닮은 경건을 드러내고 순종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고백하는 것은 진실이다. 그래서 요한은 그런 사람에 대해 이렇게 진단한다.

진단

요일 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먼저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라고 진단한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3절 말씀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요일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은 깨어진 관계가 회복된 사람이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었고, 다음으로는 다른 사람과의 깨어진 관계도 회복되었다.

앞서 사귐을 동행의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원하고 하시고자 하는 것을 한다. 그럼,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결국 같은 것을 원하고 같은 것을 하고 싶어한다는 말이 된다. 함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한다.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목표를 향해서 가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은 다른 곳에 있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지만, 결국은 같은 곳을 향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진정한 사귐을 서로 누릴 수 있다.

또한 요한은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도 말한다. 여기 “하실 것이요”는 사실 “하신다” 혹은 “하고 있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어떤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의 결과나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죄 씻음’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과거형이다. ‘죄에서 깨끗하게 하셨다’가 익숙하다. 법적인 의미(‘칭의’)에서는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이 맞다. 하나님은 이미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선포하셨다.

하지만 관계적인 측면에서는 다르다.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는다. 그리고 이 죄는 계속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의 문제를 만들어 낸다.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관계적인 문제를 계속 만들어낸다. 그런데, 그런 죄들조차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빛 가운데 행하는 자라면 이 말씀이 약속으로 주어진 것이다.

어떻게 가능할까? “그 아들 예수의 피”가 모든 죄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기초하여 계속해서 우리의 죄를 씻어 주고 계신다. 한번 회복된 관계는 절대로 다시 끊어지지 않는다. 우리 생각에 정말 엄청난 죄, 용서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죄를 지었어도 마찬가지다.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의 좋은 예시를 예수님은 베드로를 통해서 보여주셨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을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 그런데 베드로는 발 씻기를 거부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3:8). 그러니까 베드로는 예수님과 상관이 많고 싶어서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고 씻어 주옵소서”라고 답했다(요 13:9). 그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13: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

이것이 단순히 목욕과 발 씻는 것에 대한 얘기가 아님을 예수님은 가룟 유다는 깨끗하지 않다고 말씀하심으로 알게 하셨다. 영적인 깨끗함에 대한 비유적 말씀이었다. 목욕한 자, 즉 이미 의로워진 자는 다시 의롭게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매일의 삶에서 짓는 죄에 대해서는 마치 발을 씻어야 하는 것처럼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까지도 하나님은 매일 그렇게 하신다는 약속을 주신 것이다. 빛 가운데 행하는 자들은 혹 때로 어둠의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죄를 깨끗하게 하신다. 어떤 죄도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를 다시 무너뜨리지 못한다.

그럼, 결국 마음대로 죄 지으면서 살아도 되는 것인가? 지금 그 생각이 들었다면 지금까지 말씀을 헛들은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어둠 가운데 행하는 자다. 빛 가운데 행하는 자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다. 대신 8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처럼 반응한다. 이 부분은 다음 주에 살펴보자.

결론

하나님은 빛이시고, 따라서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요약이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이런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나는 빛 가운데 행하는 자인가, 아니면 어둠 가운데 행하는 자인가.

예전에 어땠는지를 묻지 않는다. 무엇을 알고 있는지, 어떤 고백을 하는지 묻지 않는다. 구원의 확신은 그런데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이 정말 무엇을 가장 원하고 있는지가 지표가 된다. 그것이 실제 내 삶의 방향을 바꾸기 때문이다. 내 시간을 어디에 많이 쓰는지, 내 돈을 어디에 쓰는지, 내 애정을 어디에 쏟는지, 내 에너지를 어디에 사용하는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내 마음의 소원이다.

만약 지금 어둠 가운데 행하고 있다면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 말은 정말 위험한 말이다. 그 말 자체로 무슨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틀린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이 틀린 것을 알지 못하면 그 결과는 참혹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어둠 가운데 행하고 있다면, 하나님 밖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따라서만 살고 있다면, 나는 하나님과 사귐이 없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모른 척하지 않으신다.

만약 내가 빛 가운데 행하는 자라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한다. 내가 무언가를 해서 빛 가운데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확신 가운데 거할 수 있어야 한다. 빛 가운데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그 삶을 깨끗하게 하신다. 절대로 다시 어둠으로 가게 되는 일은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끊어질 수 없다. 이 약속의 확신 가운데 거하고 기뻐해야 한다. 그리고 빛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계속해서 닮아가야 한다. 어둠에 있는 자들에게 진짜 빛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어떤 빛이신지 삶을 통해 보여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