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빛 가운데 행하게 하는 복음 1
본문: 요한일서 1장 5절 – 2장 3절
설교자: 최종혁
복음은 단순한 개념이나 철학이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반드시 실제적인 결과를 만들어 낸다. 그 결과는 칭의나 거듭남과 같이 어떻게도 우리가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 순간 갑자기 의롭게 된 느낌이 들거나 하지는 않는다. 또한 뭔가 영적으로 죽어 있다가 어떤 생명이 내 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열매’라고 표현하셨던 것처럼 구원의 결과로서 우리가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실제적으로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있고 그로 인한 삶의 변화가 있다.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소원이 있고 그에 따르는 행함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 받은 자들에게 또한 “구원을 이루라”고도 말하고, 이것을 ‘거룩하게 되어 가는 것’이라는 의미로 ‘성화’라 한다. 이런 성화는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경험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도 그 변화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구원하는 참된 믿음은 겸손한 믿음이고, 사랑하는 믿음이고, 지속되는 믿음이고, 또한 열매 맺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특별히 ‘관계’의 측면에서 이런 실제적인 변화를 강조한다. 우리가 이미 살펴봤었던 것처럼 창조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우리의 죄로 인해 깨졌다. 그것이 예수님을 통해 회복되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을 대신하여 모든 죄와 죄의 결과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다시 일으키심으로 모든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선포하셨다. 누구든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 속으로 다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 성육신이다. 만약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면 예수님은 굳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으셨다. 만약 우리에게 있는 문제를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해도 예수님은 굳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으셨다. 하지만 우리에겐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가 있었고 그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야 했다.
하나님 측면에서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죄의 문제가 있다고 해도, 만약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의로운 분이 아니셔서 우리 죄를 그냥 눈 감아 주실 수 있으셨다면, 예수님은 굳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으셨다. 즉, 예수님이 실제로 이 땅에 오셔서 사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셔서 우리 죄의 문제의 해결이 되셨다는 것은 우리 죄의 문제가 실재하고 따라서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적 문제도 실재한다는 증거인 셈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실제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사도 요한도 그렇기 때문에 요한일서의 시작에서 예수님께서 실제로 이 땅에 오셨음을 강조한다.
요일 1:1–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요한은 자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 특히 12 제자들이 바로 그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직접 들었고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져보기까지 했다고 증언한다. 제자들이 예수라는 메시아를 만들어 냈던 것이 아니다. 제자들 중에서는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도 없었다. 또한 그럴 의지가 있는 사람도 없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은 다 도망했었고 자신들도 그렇게 잡혀서 죽을 것을 두려워해서 숨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그리스도)임을 담대하게 전하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인해서 고난을 당했다. 사회에서 매장당했다. 매 맞기도 했고 옥에 갇히기도 했다. 심지어 죽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임을 선포했다. 만약 예수님이 실제로 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 낸 환상이었다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은 실제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시고, 그 예수님을 제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은 듣고,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실제로 이 땅에 오셨고, 실제로 구원의 길을 이루셨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 길을 여셨다. 사도들은 바로 그 복음을 전했다. 따라서 그 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실제로 만난 자들에게는 실제적인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 마땅하다. 관계 회복에 따른 변화다. 그들은 이제 마귀가 아닌 하나님께 속하였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마귀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요일 3:8-10).
이것이 요한일서가 가지고 있는 대전제이고, 그 전제에 기초한 요한일서의 기록 목적은 이것이다.
요일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 이 편지의 일차적 목적이다. 당연히 믿지 않는 자가 이 편지를 읽고 자신을 정직하게 점검해 본다면 자신에게 영생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은 누군가가 그렇게 되어 실망하게 될 것을 염려하지 않는다. 사실 오히려 그것은 잘된 일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요한일서는 칼 같이 선을 긋는다. 무엇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를 묻지 않는다. ‘종교적 행위’라고 할만한 것들을 잘하고 있는지를 묻지 않는다. 변화된 관계에 합당한 실제적 삶의 증거를 묻는다. 그것이 있다면 영생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없다면 영생이 없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과의 변화된 혹은 회복된 관계에 합당한 실제적 삶의 증거는 ‘죄에 대한 태도’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이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하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 관계의 문제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던 이유도 그 죄를 없애기 위함이었다(요일 3:5).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의 시작에서 바로 그 부분을 다룬다. 구원 받은 자는 죄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다.
요일 1:5–2:3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6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7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2:1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먼저 말씀을 짧게 정리하자면, 요한은 “너희가 듣고 믿고 구원 받은 복음은 빛 가운데 행하게 하는 복음이니, 너희는 마땅히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라고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복음이 빛 가운데 행하게 하는 복음인 이유는 회복된 관계의 중심이신 하나님이 빛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문은 5절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다”라는 관계의 중심이 되는 원리를 말하고, 6-7절은 그런 원리에 따라서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는 빛 가운데 행한다”는 명제를 강조한다. 그리고 8절 이후의 말씀은 이 명제가 의미하는 것이 “죄 없는 삶이 아니라 죄에 민감한 삶”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한다. 오늘은 5절이 말하는 “하나님은 빛이시다”라는 관계의 중심이 되는 원리에 대해서 살펴보자.
원리의 신빙성
먼저 저자인 요한은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말이 얼마나 믿을만한지,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한다.
요일 1: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
증인의 신빙성
본문을 보면 “우리”가 계속해서 나온다. 사실 1-4절에서도 계속해서 “우리”가 등장한다. 본문에서 “우리”에 대해서 특정해서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문맥을 봐야 하는데, 1-5절의 “우리”는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직접 경험하고 그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요한일서의 독자들에게 전해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5절에서도 그렇게 복음을 전한 “우리”와 들은 “너희”가 구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참고로 6절부터 나오는 “우리”는 좀 더 일반적인 범주에서의 “우리”를 의미한다.
이들은 1-3절에서 강조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직접적인 증인들이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전해준 것이 아니었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연구하고 결정한 것을 전해준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었다. 그뿐 아니라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보았고,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하신 성품을 보았다. 동시에 그분이 죄가 없으시며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도 보았다. 심지어 그분을 만져보기까지 했다. 만지는 것은 인간의 감각 중 가장 가깝고 직접적인 감각이다. 예수님은 허상이 아니셨기 때문에 만지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고, 이들이 예수님께 들은 것을 전해준 것이다.
출처의 신빙성
그럼 그들에게 말해주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 예수님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셨고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분이시다(요일 1:1-2).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이 사실을 이렇게 말했다.
요 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누구도 본적이 없는 하나님과 태초부터 함께 하셨던 말씀이신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사실 하나님에 대해서 사람들은 많은 말을 한다. 세상을 창조한 신은 이럴거야라고 자기들만의 생각이 있다. 우리가 OO신화들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들이 그런 것들이다. 대부분 기본적으로 사람과 다르지 않은 성품을 가지고 있으면서 특별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서 묘사된다. 요즘에도 천국에 갔다 왔다는 사람들도 있고 하나님을 봤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의 간증집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믿기 힘든 이야기들일 뿐이고, 실제로 상업적인 목적으로 꾸며낸 이야기들이 많다.
그런 이야기들이 성경보다 훨씬 흥미롭지만(그래서 인기가 있는 것),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말씀이다. 기록된 말씀인 성경과 성육신 하신 말씀인 예수님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분명하고 온전하게 우리에게 보여준다. 특히 예수님은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 하신 말씀 뿐만 아니라 하신 일과 보여주신 성품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주셨다.
오늘날에도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이 성경이 예언한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예수님은 뭐가 다르냐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예수님은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셨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의 겉모습은 사람과 다를 것이 전혀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는 하나님의 권위가 있었다. 귀신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만 했다. 바람과 바다도 순종해야 했다. 질병도 그러했다. 그런 예수님을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도 어떤 사람들은 이적을 행한다고 하고 질병을 고친다고 한다. 그 자체가 거짓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왜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이적을 행하시면서 어떤 사람의 썩은 이를 금니로 바꿔주신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왜 질병은 제대로 낫지도 않고, 나았다고 했던 사람이 다시 아픈지 이해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이적은 언제나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은 배고플 때 돌을 떡으로 바꾸는 이적도 행하지 않으셨지만,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서는 오병이어의 이적을 베푸셨던 것이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서 돌에 맞아 죽을 처지에 있던 여인을 예수님은 그 놀라운 지혜로 보호하셨지만, 정작 자신이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죄인처럼 죽으셨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예수님은 그 하시는 모든 것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자기를 위해 어떤 일을 하지 않으셨다.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를 드러내셨다. 그렇게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임을 증명하셨던 것이다.
요한은 바로 그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했던 사람이다. 자신의 복음서에서는 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런 요한이 예수님께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전한 것은 요한의 말이 아니다. 그 어느 누구의 말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그 아버지에 대해서 하신 말씀을 사도 요한은 직접 들었고 그것을 전해주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증언인 것이다. 그리고 그 증언은 이것이었다.
관계의 중심이 되는 원리, “하나님은 빛이시라”
요일 1:5 …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사실 조금은 당황스러운 말씀이다. 분위기 상 고린도전서 15:3-4(“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처럼 복음의 핵심, 즉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말을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갑자기 여기서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을 왜할까 싶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하기도 하고(요 4:24), 요한일서 뒤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씀도 있다(요일 4:8). 히브리서는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라고도 말한다(히 12:29). 즉,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하나님의 어떤 한가지 면에 대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면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이 말은 하나님이 실제로 빛이시다라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빛이 하나님이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격체이시기 때문이다. 7절을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라고 하여서 빛과 하나님 자체를 구분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럼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하여 빛이 자주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을 밤에 보호했던 것은 ‘불 기둥’이었다(출 13:21-22). 빛 나는 불 기둥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보호하고 계심을 알 수 있었다.
하나님을 만나 십계명의 두 돌판을 들고 내려왔던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었다(출 34:29). 십계명 두 돌판을 모세가 임의로 만들어서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면서 그 말씀을 주셨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시편 104:1-2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렇게 표현했다.
시 104:1–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2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바울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이렇게 표현했다.
딤전 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그래서 성경에서 빛은 하나님의 영광, 우리와는 다르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그런 영광스러운 면을 강조하는 표현으로서,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다르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어떤 면에서 다르실까? 성경에서 ‘빛’이 특히 ‘어둠’과 대조되어 표현될 때는 세 가지 영역에서 대조가 된다. 진리, 거룩, 그리고 생명이다.
진리
먼저, 빛은 진리 자체 혹은 그 진리를 드러내는 장치를 의미한다.
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130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곧 진리이며 진리를 드러낸다는 것을 빛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말씀한다. 반대로 어둠은 이런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미 3:6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어둠을 만나리니 점 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비슷하게 예수님은 영적으로 어리석고 깨닫지 못하는 상태를 보지 못하는 맹인에 비유하기도 하셨다. 반대로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은 눈을 떠서 보는 것이다. 빛이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 하나님은 진리이실까?
출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신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이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거짓말도 하지 않으시고 실언도 하지 않으신다.
민 23:1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이렇게 하나님이 진리이시기에 하나님의 말씀도 진리일 수 밖에 없다(요 17:17). 하나님은 진리의 빛이시다.
거룩
여기서 말하는 거룩은 도덕적인 거룩이다. 빛은 거룩이고 어둠은 죄다.
엡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여기서는 구원 받은 사람의 이전 상태를 어둠으로 지금 상태를 빛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빛의 열매는 착함, 의로움, 진실함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어둠의 일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죄악된 일들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빛은 의로움, 거룩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 5:20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여기서도 흑암과 광명을 대조한다. 악과 선을 바꾸는 것을 흑암과 광명을 바꾸는 것으로 표현하여, 흑암은 악이고 광명은 선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사용했다.
롬 13:12–14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여기서도 낮, 빛은 죄악된 행위와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비슷하게 데살로니가전서 5:5-6도 빛과 낮을 도덕적인 거룩과 관련된 이미지로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가? 성경은 그렇다고 분명히 말한다. 이사야가 본 환상과 요한이 본 환상에서 하나님은 동일하게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는 찬양을 받으셨다(사 6:3; 계 4:8).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레 19:2). 하박국 선지자는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이라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기대어 공의를 행하시기를 구하기도 했다(합 1:13).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악을 행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악을 보지도 못하실 정도로 정결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그런 거룩의 빛이신 것이다.
생명
셋째로 성경에서 빛은 생명과 관련되어 있다.
시 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편 기자는 우리가 하나님의 빛 안에서 빛을 본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빛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만 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앞에서는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다고 말한다.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말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 빛 안에서만 빛을 볼 수 있다는 말과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다는 말이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 안에서만 빛을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 안에서만 생명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이 생명의 원천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어떤 생명도 없다. 영원한 생명이든 일시적인 생명이든, 육적인 생명이든, 영적인 생명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온다.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조되는 어둠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죽음이다. 그래서 욥기나 시편을 보면 어둠을 말할 때 죽음을 의미할 때가 많다. 그래서 어둠 가운데 빛을 비추는 것은 생명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욥 33:28–30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리라 29실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재삼 행하심은 30그들의 영혼을 구덩이에서 이끌어 생명의 빛을 그들에게 비추려 하심이니라
시 56:13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시는 것을 특별히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영적인 생명을 주시는 구원과 직접적으로 관련지어 말씀한다.
사 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사 42:6–7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빛을 비치는 것은 죽었던 자들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한다. 어둠에서 나오는 것이 곧 죽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빛을 얻는 것이 생명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빛이시다.
여기서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자. 그럼,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런 분이심을 드러내셨는가? 그렇게 하셨다.
먼저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셨다.
요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 8: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예수님은 진리이신 분으로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셨다. 누구에게도 없는 권위를 가지고 그렇게 하셨다. 권위 있는 말씀이었기에 사람들은 어떻게든 반응할 수 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거절로 누군가는 순종으로 반응했다. 누군가는 진리를 거절하여 멸망에 이르고 누군가는 진리에 순종하여 구원에 이른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거룩한 삶을 사셨다. 예수님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 8: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요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그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사람들도 같은 증언을 했다.
행 2: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행 3: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7: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예수님은 완벽한 순종의 삶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셨다. 죄인 중에 거하시면서 죄인과 같은 몸을 입으시고 거룩한 삶을 사셔서 하나님이 거룩한 빛이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생명에 대해서는 어떤가?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셔서 그들이 참된 삶을 살 수 있게 하셨다. 실제로 죽은 자를 살리셔서 생명을 주기도 하셨다. 무엇보다도 죄로 죽은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본 자는 빛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본 것이다. 예수님은 가르침, 삶, 사역을 통해서 빛 되신 하나님을 드러내셨다. 요한은 이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고 그 말씀을 들은 자로서 어떤 오해도 없이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전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긍정형으로 표현했던 것을 부정형으로 바꾸어 같은 의미를 더 분명하게 강조하는 것이다. 이 말은 좀 더 문자적으로 바꾸면 “어둠은 그분 안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이고 더 문자적으로 하면 “어둠은 그 분 안에 없다. 단 하나도”가 된다.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은 하나님께 빛도 있다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오직 빛이시다. 어둠은 조금도, 아주 작은 조각 하나라도 그분께 없다. 어떤 어둠(거짓, 죄, 죽음)도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다.
정리하면,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은 하나님은 진리이시고 거룩하시고 생명이시라는 의미다. 그분께는 어떤 거짓이나 죄나 죽음이 함께하지 못한다. 그럼 요한은 이렇게 풀어서 써도 될 것을 왜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은유적인 표현을 사용했을까? 영역이 나뉘는 이미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즉, 요한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함과 동시에 하나님이 바로 그 빛의 영역에 계신 분(7절)이라는 사실을 말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계신 빛의 영역이 있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어둠의 영역이 있다. 이 둘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고 절대로 섞이지 않는다. 하나님이 빛이시며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처음에 가졌던 의문에 대해서 답할 수 있다. 왜 요한은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이 아니라 하필 하나님의 빛 되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까? 하나님의 빛 되심이 복음에 있어, 특히 복음이 가져온 관계 회복이라는 결과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내가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의미다. 어둠 가운데 있던 내가 이제 빛이신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나아갔다는 의미다.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즉 우리가 믿고 구원 받은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했고, 그 하나님은 빛이신 분이시라는 말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와 교제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이런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그저 내가 편하고 받아들이기 좋고 생각하기 좋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이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힘들 때 위로가 되어 주신다. 우리에 대해서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 우리가 연약하여 넘어질 때도 버리지 않으시고 붙드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관계의 중심에 나를 둬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중심에 계셔야 한다.
인간 관계는 누가 중심에 있고 누가 변두리에 있고 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평등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중심에 계셔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성경은 그 하나님이 빛이시라고 말한다. 진리의 빛이시고 거룩의 빛이시고 생명의 빛이신 하나님이시다. 이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의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 가운데 행하라”는 말의 의미와 무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은 빛이시다라는 사실이다.
결론
하나님은 빛이시지만, 모든 인간의 자연적인 상태는 어둠이다.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의 생명에서 우리는 끊어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옮긴다. 우리를 거짓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는 것이다. 이 복음을 거절하여 어둠 속에서 영원을 보내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빛으로 나아오는 것이 나의 죄를 드러내고, 내가 믿고 있던 것의 거짓됨을 드러낼지라도, 그래서 혹 부끄럽고 치욕스러울지라도, 그것이 죽음이 아닌 생명을 택하는 유일한 길임을 잊지 말고, 예수님께로 나아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미 그렇게 빛으로 나아왔다면, 모든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제는 빛 가운데 행하는 매일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