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부모, 처자, 형제, 자매, 자기를 미워해야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의 의미
본문: 누가복음 14장 25-35절
설교자: 조정의
예수님의 공적인 사역, 주로 갈릴리와 유대에 집중되었던 복음 전도사역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2년 지남),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게 됐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25절). 예수님은 자신을 ‘주여 주여’라고 부르며 따른다고 해서 모두가 다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분명히 전달하기 원하셨다. 그래서 돌이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26-35절).
1. 의미
먼저 26-27절을 통하여 누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두 가지 질문에 답을 찾아야 한다. 첫째, 미워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단어 자체는 일반적으로 ‘미워하다’, ‘무시하다’의 의미를 갖지만, 문맥 안에서는 단순히 미움과 혐오의 의미로 해석할 수 없다. 같은 단어가 마태복음 6장에서 사용됐는데, 주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여기서 미워한다는 말은 증오하고 멸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 사랑하는 대상 때문에 덜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누가 합당한 제자인지 설명하는 또 다른 말씀에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의미를 분명하게 밝혀 주셨다(마 10:37).
한 마디로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자다. 이것은 반복적인 훈련을 요구하는데, 주님은 27절에서 이렇게 표현하셨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순간의 선택이 아니라 평생의 과정이다. 어떤 과정인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현재형) 과정이다. 자기 십자가란 무엇인가? 가족, 소유, 자기 목숨과 같이 주님보다 더 사랑하고 싶어지는 대상을 날마다 못 박는 사형 틀이다(“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9:23). 결론적으로, 부모, 처자, 형제, 자매, 자기를 미워해야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의 의미는 날마다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고 아끼고 보배롭게 여기기 위하여 다른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포기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러면 둘째, 왜 부모, 처자, 형제, 자매 그리고 자기 목숨까지 이렇게 다양한 대상을 말씀하셨을까? 사실 여기에 33절에 나오는 “자기의 모든 소유”까지 추가해야 한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고,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기 쉬운 존재다. 주님은 ‘가족’이라는 한 마디로 말씀하셔도 될 것을 이렇게 다양한 가족 구성원을 일일이 나열하여 말씀하셨다. 그래서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지 각각의 가족 구성원, 자신, 소유를 점검할 수 있게 하셨다. 사람마다 약한 부분이 있다. 더 마음을 빼앗기는 대상이 있다.
주님이 말씀하신 가족과 소유와 자신을 더 아끼는 마음이 커질수록,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줄어든다. 자식을 너무 사랑하다 못해 주님이 미워지는 것이다. 배우자를 너무 아끼다 못해 예수님을 덜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예로 자녀가 영적으로 방황하면 부모는 가슴이 아프다. 어떻게든 자녀가 올바로 서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것이 여러 번 반복되면, 주님이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지 알 수가 없고, 그런 주님이 덜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자녀가 없어도 자녀 때문에 주님을 미워할 수 있다. “남자에게 최악의 운명은 ‘씨가 없어 자신의 ‘이름’이 소멸되는 것이었다”라는 문구를 읽고 좌절감에 빠지면, 주님을 더 사랑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사실 뭐든지 그 이유가 될 수 있다. 자기 목숨과 소유가 위협을 받을 때(오랜 질병, 파산),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2. 계산
그래서 주님은 두 가지 비유를(28-30절, 31-32절) 통하여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남는 일인지, 결국 승리하는 일인지 계산해 보고 따져보라고 요구하셨다. 하나는 건축 비유, 또 다른 하나는 전쟁 비유인데, 우리 삶이 완성된 건축물을 쌓는 것과 같고, 영적인 전쟁을 치르는 것과 같기 때문에 참으로 적합한 비유이다.
먼저, 망대를 세우고자 하는 자는 그것을 준공하기까지 충분한 비용이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한다(28절). 만일 계산도 안 해보고 무턱대고 공사를 시작했는데, 기초만 쌓고 다 이루지 못하면 비웃음만 받을 게 뻔하다(29-30절). 국가 간 전쟁 할 때,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는 것이 맞다(31절). 우리 편은 일만 명이고, 상대편은 이만 명인데, 이렇게 저렇게 전략과 방편을 궁리하여 이길 수 있는 길이 있으면 모를까, 싸워서 이기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는 것이 지혜롭다(32절). 이 일반적인 비유들을 통하여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일까?
둘 중 하나의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첫째, 섣불리 제자가 될 생각하지 말고, 제대로 각오한 후에 제자가 되라는 것이다. 앉아서 차분히 계산해 보고 헤아려 보라는 것이다. 정말 부모, 처자, 형제, 자매, 자기, 모든 소유를 예수님보다 덜 사랑할 수 있을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확신이 드는 사람만 제자가 되라고 하신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비용보다 훨씬 더 큰 것을 얻을 것을 기대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이다. 전자는 내가 예수님을 따르는 데 요구되는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지 계산해 보는 거라면, 후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의 가치와 그 외 모든 것의 가치를 비교하여 훨씬 더 가치 있는 예수님을 좇으라는 것이다. 전자가 맞다면, 망대를 지을 돈이 없거나 군사 숫자가 부족하면 시작하지도 말라는 말이고, 후자가 맞다면, 그리스도 안에 건물을 지을 자원이 충분하고,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누구든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믿고 따르라는 말이다. 둘 중 무엇이 맞을까?
이어지는 33절의 시작 “이와 같이”가 해답을 준다. 계산하고 헤아려 보라는 두 비유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한다고 하셨다. 무슨 말인가? 자기의 모든 소유보다 예수님을 얻는 것이 이득이란 계산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한 부자 청년에게 직접 이렇게 요구하신 적이 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막 10:21). 나에게 있는 모든 것보다(가족과 목숨보다) 하늘의 보화가 더 귀하고 영구적이고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예수님을 따를 것이다. 예수님은 그래서 밭을 사는 자의 비유를 통하여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라고 설명하셨다(마 13:44). 그래서 예수의 제자는 그분의 무한한 가치를 아는 자다.
예수의 제자인 우리는 항상 앉아서 계산해야 한다. 앉아서 헤아려 봐야 한다. 특별히 우리가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 때문에 주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지 못할 때, 믿음의 눈을 떠서 감추인 보화를 바라봐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골 2:3). 그리스도의 제자가 모인 교회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다(엡 1:23).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우리의 선을 이루게 하신다(롬 8:28). 우리가 예수님을 덜 사랑하게 하거나 심지어 밉게 만드는 모든 상황과 환경 또한 사실은 우리 안에 더 큰 믿음과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만들어 내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예수님이 덜 사랑스럽고 미워지려고 할 때, 이 말씀을 생각하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가장 값진 것을 내어주신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전심으로 사랑하도록 돕는 귀한 말씀이다.
3. 적용
세상은 예수의 가치를 진정으로 알고 그분을 최고로 사랑하는 제자가 필요하다. 그들이 진정으로 맛을 내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34-35절). 우리가 예수의 제자라는 것을 더 분명히 드러낼 때는 바로 세상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우리가 누리지 못할 때, 갖지 못할 때, 어려움을 겪을 때, 그 가운데 그들에게 없는 가치, 그들이 세상에서 절대로 발견할 수 없는 기쁨,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만족과 평안을 자랑하는 것이다.
바울은 말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이것은 예수의 참 제자, 그 맛을 잃지 않은 자가 할 수 있는 고백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에게 상실감을 주거나 수치심을 안길 수 없다. 그리스도가 내게 그만큼 존귀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이유는 더 그분을 얻기 위함이고, 내가 죽는 것도 오히려 유익하다고 여기는 이유는 그분을 온전히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을 더욱 사랑할 것인가의 싸움이다. 자기 자신과 모든 소유와 사랑하는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한 투쟁. 날마다, 매 순간, 예수를 더 사랑하고, 그 외의 모든 것을 덜 사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