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거하라
본문: 고린도전서 7장 8-24절
설교자: 조정의
계속해서 고린도 교회가 “쓴 문제” 중 결혼에 관한 질문에 바울이 답하고 있다(고전 7:1). 복음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영혼뿐만 아니라 결혼에도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들은 홀아비와 과부일 때, 신자끼리 결혼한 상태에서 혹은 둘 다 비신자였는데 한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인 경우, 각각 어떻게 하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것인지 바울이 답해주길 원했다. 각각의 상황에 관한 오해를 불식해야 했고, 모든 상황을 관통하는 하나의 원칙이 필요했다. 그 원칙은 바로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는 것이다(17, 20, 24절).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라서 함부로 조언할 수 없는 일로 취급되는 각각의 상황에 복음이 무엇을 담대하게 요구하는지 귀 기울여 보자. 그리고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에 굴복하고 기쁨으로 순종하자. 그렇게 복음의 지혜와 능력으로 각 사람이 든든하게 세워지고, 함께 교회로서 지어져 가자.
1. 원칙: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17-24절)
먼저, 이 복음의 원칙은 고린도 교회에만 적용되는 원칙이 아니다: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17b절). 복음으로 세워진 모든 교회는 이 명령에 따라야 한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17a절). 나눠 주신 대로는 은사를, 부르신 그대로는 구원을 떠올리게 하지만, 문맥 안에서는 구원받을 때, 신자가 처한 각각의 상황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18절), 종으로 있을 때 부르심을 받았거나 자유인으로 있을 때 부르심을 받은 자(21, 22절). 참고로 독신은 은사로 취급되기도 하고, 부르심은 성경에서 구원하심과 동의어로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같은 구원의 부르심을 받은 서로 다른 상황에 집중한다. 특별히 결혼과 관련된 상황(7:8-16).
원칙은 그대로 행하는 것이다(현재형). 무슨 말인가? 상황 자체를 바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20절). 바울은 두 가지 예시를 들었다. 첫째로 민족적 배경이다.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18절). 할례자가 무할례자가 되거나 그 반대가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할례 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19절). 할례의 유무는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다.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두 번째 예시는 사회적 신분이다.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21a절).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23절). 각각의 말씀에서 종으로 있을 때에 구원받은 사람은 종의 신분을 벗어나기 힘든 상황이라고 해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하고,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 명령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억지로 벗어나려고 애쓸 필요가 없고, 때로는 그렇게 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으라는 것이다. 왜?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22절).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을 때, 사회적 신분이 덜 중요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성경이 노예 제도를 지지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21b절). 복음은 우리가 사회적으로 자유롭게 되는 것을 가로막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다(24절). ‘종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더라도, 염려하지 말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유인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을 최우선 순위로 여기라. 혹시 자유인이 될 수 있거든 그렇게 하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자유인이라면 절대로 사람들의 종이 되지 않기 위해 힘쓰라. 오직 당신을 값으로 사신 주님의 종이 돼라. 그렇게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면서 그분과 항상 함께 거하라.’
요컨대, 복음은 신자가 처한 상황 자체를 바꾸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각자 처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동행할 것인지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본다. 자유로운 선택의 권한이 주어지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은 각각의 결혼 관련 사례에 어떻게 적용될까?
2. 사례1: 홀아비와 과부일 때 부르심을 받았다면(8-9절)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남성형 복수), 과부들(여성형 복수)은 배우자의 사망이나 성경에서 허용하는 이혼의 경우를 통하여 독신이 된 자들을 가리킨다(미혼은 2절과 25절에서 다룸). 우선순위는 상황을 바꾸지 않고 그냥 지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8절). 하지만, 결혼(재혼) 또한 그들의 선택이 될 수 있다: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9절). 이것은 절제력을 시험해 보라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절제가 잘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 경우 결혼하는 것이 낫다.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9절). 단, 39절에 나오는 것처럼 결혼은 주 안에서만 허용된다(he must belong to the Lord, NIV). 성경은 믿지 않는 자와의 결혼을 금한다(고후 6:14).
3. 사례2: 결혼한 자로서 부르심을 받았다면(10-11절)
두 번째 사례는 그리스도인 부부의 경우다. 당시 고린도 교회를 괴롭혔던 금욕주의 사상으로 영이 거룩하게 된 부부가 육을 섞는 것은 더럽고 부정한 것이라고 여기는 잘못된 현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심지어 이혼을 권장하거나 묵인하는 경우도 발생했던 것 같다. 바울은 주님이 직접 주신 명령을 가지고(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10절) 부부가 이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분명히 선언한다: 결혼한 자들에게(완료형) 내가 명하노니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10-11절).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예수님은 이혼에 관하여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 한다고 확언하셨고(마 19:6),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라”라고 말씀하셨다(마 5:32). 이것은 이혼에 관한 진실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하는 말씀이다. 먼저, 음행이라는 예외 조항이 언급된다(두 개 조항 추가). 하지만, 그 외 다른 이유로 아내 혹은 남편을 버리면 그 버린 배우자가 다른 사람과 재혼할 때, 그 둘이 간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억지로 나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여전히 한 몸으로 짝지어 주신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인 부부가 이혼한 경우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명령한다: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11절).
그대로 지내라는 것은 다른 사람과 재혼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혼했어도 여전히 한 몸이기 때문이다. 다시 합하려면 원래 한 몸인 “그 남편” 또는 아내와 화합할 것을 요구한다. 성경은 한 몸이 된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우를 1) 배우자의 사망 2) 배우자의 간음 3) 믿지 않는 배우자가 갈라서기를 원하는 경우로(15절) 제한한다. 이 경우가 아니라면 이혼한 신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은 다시 배우자와 화합을 이루거나 그럴 수 없는 경우 독신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다. 위의 세 가지 경우라면, 신자는 8-9절의 명령에 적용을 받는다.
4. 사례3: 비신자와 결혼한 성도로서 부르심을 받았다면(12-16절)
12-16절의 명령은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라는 말 때문에 바울 개인의 조언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이 또한 성령의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임에 틀림이 없고, 바울은 여기서 사도들을 통하여 전수된 주님의 명령과 자신이 받은 계시를 구분하는 것뿐이다. 마지막 사례는 그 나머지 사람들에 관한 것인데(12절), 이는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는 형제나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는 자매를 가리킨다(12-13절). 부부 중 한 사람만 회심한 경우 금욕주의 영향을 받은 고린도 성도는 믿지 않는 배우자가 거룩하게 된 자신을 더럽힐 것을 염려했던 것 같다. 그래서 배우자와 갈라서는 것까지 각오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만일 믿지 않는 배우자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버리지 말라고 명령했다(12, 13절). 아무리 배우자가 믿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믿는 남편이나 아내를 통하여 그 가정 안에 거룩한 일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14절). ‘믿지 않는 배우자가 믿는 너희를 더럽힐까 두려워하지 말라. 오히려 믿는 너희를 통하여 믿지 않는 배우자와 자녀를 내가 거룩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반드시 구원하시겠다는 절대적 약속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신자와 맺으신 새 언약의 은혜를 그 신자와 한 가족이 된 구성원들에까지(그들이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려주신다는 약속이다. 마치 바울이 옛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의 나음을 말할 때,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라는 거룩한 복이 주어졌다고 말한 것처럼(롬 9:4), 그리스도의 보혈로 새 언약의 백성이 된 남편 또는 아내와 함께 사는 믿지 않는 가족에게 새 언약의 은혜와 축복이 임한다. 폴 가드너는 “언약의 주가 다스리시고, 언약의 주를 경배하며, 주의 말씀을 배우고 깨달으며, 주의 약속을 설명해 주는 가정에서 믿음과 예배의 필요성을 알게 된다”라고 말했다(ZECNT, 344p). 어쩌면 이를 통해 믿지 않는 가족이 구원받을 수도 있다: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16절). 그러므로 믿지 않는 배우자가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그들과 함께 살면서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 은혜를 가정 안에서 누리게 하는 것이 믿는 남편과 아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이다.
만일, 믿지 않는 배우자가 갈라서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15절). 대부분 종교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믿지 않는 자는 내가 결혼했던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와 배우자가 자기 권위와 필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권과 요구 아래 순종하며 사는 것에 반발심을 느껴 갈라서기를 원한다. 바울은 이럴 때 갈리게 하라고 명령했다. 그들이 원하는 걸 들어주라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갈라서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허용하는 것이다(수동태). 왜 그런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을 화평 중에 부르셨기 때문에 먼저는 화평을 추구하기 위해 애써야 하기 때문이다(롬 12:18). 하지만 믿지 않는 배우자가 적극적으로 원할 때, 그것을 허용하여 갈라서고, 더 이상 구애될 것이 없는 상태, 배우자에게 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독신의 상태로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다. 이것은 주께서 허락하신 자유이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것이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라면 결혼(재혼) 할 수 있다. 오직 주 안에서만(39절).
결혼 관련 사례에 바울이 답하는 것을 들으면서, ‘왜 이렇게 어렵고 복잡한가?’ 탄식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부부 관계를 힘들게 하고 복잡하게 만든 건 하나님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다. 죄가 사망을 가져왔고(홀아비, 과부), 죄가 갈등과 관계의 단절을 가져왔다(간음, 이혼). 그러나 복음은 이 어렵고 복잡하게 얽힌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단순하고 분명한 길을 제시한다.
우리는 자주 결혼하지 못하는 것을 불행으로 여긴다. 고통과 상처만 남기는 결혼을 끝까지 왜 유지해야 하는지 원망하며 따진다. 믿지 않는 배우자와 함께 사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타인의 죄와 적극적인 의지로 이혼당한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하지만 복음은 그 상황 자체를 판단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우리를 용납한다. 심지어 우리가 선택한 죄도 하나님은 십자가 복음으로 다 용서하셨다.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어떤 상황이든 우리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는 것,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는 것,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는 것이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불평, 불만, 죄책감, 수치심, 원망 등을 모두 복음의 은혜 아래 내어버리고,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시게 할 수 있을지에만 전념하라고 요구한다.
복음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기 때문이다(롬 14:8). 결혼해도 주를 위하여, 하지 않아도 주를 위하여, 갈라서지 않는 것도 주를 위하여, 갈라서는 것도 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오직 주를 위하여, 주를 기쁘시게 하고, 주와 함께 살아가기 위하여 한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과 지혜대로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