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릴 때 어떻게 할까요?
본문 : 골로새서 1장 21-23절
설교자 : 조정의
러셀 무어는 “입양의 마음”이라는 책을 통해 두 아들을 러시아에서 입양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차갑고 음침한 고아원, 아무리 울어도 누구도 오지 않는 걸 알기에 아기도 울지 않는 그곳에서 무어는 자기가 싼 배설물 속에 누워있던 두 아기를 입양했습니다.
아기는 집에 와서 잘 적응했지만, 아이를 양육하면서 흥미로운 두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뭔가 잘못을 하면 버림받을까 두려워한다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자꾸 전 부모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 부모를 궁금해하고 만나기 원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아이가 부모가 원하는 것을 거역하고 싶을 때,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을 때 내 전 부모라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었을 터라고 생각하며 찾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의 삶도 이와 유사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차갑고 음침한 세상에서 자기 죄 속에 살다가 빛이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습니다. 처음엔 기뻐하고 잘 적응하지만 자라면서 계속해서 위기를 맞이합니다.
자주 반복해서 죄를 범하고 넘어지면 행여나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면 어떻게 하나 염려합니다. 버리지 않더라도 예전과 같지 않게 나를 대하실까 두려워합니다. 반대로 세상의 유혹에 심히 흔들립니다. 특히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하고 싶을 때, 하나님 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살고 싶을 때, 내가 원하는 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는 세상의 자녀로 살고 싶다는 유혹을 강하게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복음의 소망에서 크게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믿음의 비행에 난기류를 여러 번 만납니다. 여러분도 흔들린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혹시 지금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흔들고 있습니까?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릴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방법을 통해 우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1. 과거를 기억하라(21)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릴 때, 첫째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과거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 우리 안에 양자의 영이신 성령이 거하시기 전, 우리가 어떤 상태였는지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에서 건짐 받았는지 기억할 때, 우리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과거를 기억할 때 우리는 세상의 유혹이 아무리 강력해도 결코 그 유혹을 좇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절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우리의 과거가 어땠습니까?
21절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1절 본문을 보십시오. “전에”는 과거를 가리킵니다. 과거 우리의 상태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 멀리 떠나 있었고, 둘째, 마음으로 원수가 되어 악한 일을 행하였습니다(악한 행실).
이 두 가지 특징 모두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멀리 떠났다’는 말은 거리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말이기보다는 관계가 아주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단절되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에베소 교회를 향해 사용할 때,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라는 말에 사용했습니다(엡 2:12).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고 말할 때 사용했습니다(엡 4:18).
그러므로 과거 우리는 하나님과 단지 멀리 떨어진 상태가 아니라 관계 밖에 있었던 상태, 생명의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절된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죄는 단지 살인이나 도둑질처럼 나쁜 일을 행하는 것만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원수가 된 것 그리고 그에 따라 악한 행실을 낳는 것, 둘 다 문제입니다(동기+행위).
마음 혹은 사상, 의도 자체가 원수가 되었습니다. 누구의 원수가 된 것이죠? 하나님의 원수가 된 것입니다. 과거 우리는 하나님을 대항하고 거스르고 반대하는 마음 상태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어느 정도 존경합니다. 다만 내 삶을 내가 원하는 대로 남에게 피해 끼치지 않고 잘 살고 싶을 뿐입니다.’ 죄송하지만, 그게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갖는 생각입니다. 왜 그럴까요?
지난주에 우리가 함께 배운 골로새서의 핵심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만물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만물은 생존할 수 없습니다. 만물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만물이 존재하는 이유, 존재하는 목적, 철저히 의존하고 있는 대상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 만물의 영장인 당신이 예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영광 돌릴 생각도 없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피조물인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아닙니까? 성경은 그런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난다고 경고합니다(롬 1:18).
과거 우리가 그랬습니다. 우리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하나님의 법을 듣고도 굴복하지 않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었습니다(롬 8:7). 마음부터 하나님의 원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그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셨고, 우리는 속에 있는 악한 마음이 원하는 대로 악한 행실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은 행위 곧 모든 불의를 행했습니다.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하는 것, 비방, 능욕, 교만, 자랑, 부모를 거역,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 등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온갖 악한 일을 행했습니다(롬 1:29-31).
과거 우리의 상태를 좀 더 쉽게 이해하려면 몸속에 있는 암세포를 생각해보면 됩니다. 암세포는 온몸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머리와 단절되어 존재합니다. 머리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거스릅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퍼져나가고 자랍니다. 결국 온갖 악한 것으로 몸을 더럽히고 파괴하고 죽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그랬습니다. 만물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거역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살았습니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스도가 미워하는 온갖 더러운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을 가졌고, 실제로 악한 일을 행하며 살았습니다. 우리가 바로 거기서 구원받았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다시 과거의 자리에 가보지 않겠냐고 유혹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진짜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친구로 살면서 세상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속입니다. 하나님이 NO라고 말한 것에 WELL(글쎄)라고 의문을 남깁니다. 하나님이 진짜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을 시시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지 않는 것을 세상은 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과거로 다시 돌아가라고 우리를 흔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의 유혹이 아무리 강해도, 매혹적이어도, 그럴듯해 보이고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워도 결코 과거로 회귀할 수 없습니다. 절대 그쪽으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과거에서 건져내신 것이 복된 소식 곧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암 환자가 완치되고 나서 생각조차 하기 싫은 것이 재발인 것처럼, 다시 세상과 벗 되고 싶은 마음을 과감히 뿌리치십시오.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된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약 4:4). 세상의 유혹은 결국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 원수 된 관계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과거의 매혹적인 향수를 불러일으켜 끔찍한 과거의 상태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 유혹이 우리가 가진 복음의 소망을 흔들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기 위해 과거를 똑똑히 기억하십시오.
2. 현재를 생각하라(22)
우리가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릴 때, 둘째로 우리는 현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현재 우리에게 어떤 복을 주고 계시는지,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내가 어떤 상태가 되었는지 묵상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은혜)을 잊지 말지어다”(시 103:2).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은택을 줍니까?
22절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2절 시작을 보십시오. “이제는”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현재 우리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제는 우리가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누구와 화목하게 된 것입니까? 과거에 우리가 원수 되었던 분, 곧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 사이에 원수 된 관계를 화목하게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린 죽을 때까지 원한을 풀지 못하고 심지어 대를 이어 원수가 된 사람들을 적지 않게 봅니다(로미오와 줄리엣). 그런데 어떻게 죄가 조금도 없으신 하나님과 죄 많은 사람 사이에 영원한 화목이 이뤄진 것일까요? 누가 이 화목을 만들어낸 것일까요?
22절 본문을 보시면 “화목하게 하사”라고 말합니다. 화목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누리는 현재의 화목은 누군가가 만들어준 것이라는 말입니다. 누가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화목을 이루셨습니다.
왜 육체의 죽음이 필요했던 것일까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삯이 사망이었기 때문입니다(롬 6:23).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죗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롬 5:10). 원수 된 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소멸하셨습니다(엡 2:16)
하나님은 우리와 화목을 이루기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주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지난주 살펴봤던 골로새서 1장 20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로 만물과 자기 사이에 화목을 이루시기를 기뻐하셨다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 10절에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우리가 원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럴 만한 아름다움이나 가치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진리는 우리가 복음의 소망을 가지고 살다가 우리 죄 때문에 흔들릴 때,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은 우리의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열심이나 거룩한 삶의 수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누구도 하나님과 화목을 지켜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한 관계를 영원히 가지시는 이유는 오직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사랑하시는 만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사랑스러우신 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고결하고 숭고하며 충분히 아버지 하나님께 만족스러운 만큼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화목은 견고하고 안전합니다.
물론 죄는 절대 가볍게 볼 수 없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원수 된 마음에서 시작되어 악한 행실을 낳습니다. 모든 관계를 망가뜨리고 파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된 소식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죄보다 더 크다는 사실입니다.
반복적으로 죄를 짓고, 죄 때문에 고통받고, 그래서 죄책감과 낙심으로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릴 때,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은 견고합니다. 그 견고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안심하십시오.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주님의 평안을 충분히 누리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 무엇도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죄와 허물도 말입니다.
그러니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께 나와 자백하고 미쁘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여러분에게 허락하시는 죄 사함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시기 바랍니다(요일 1:9).
여기서 어떤 분은 이런 질문을 속으로 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죄짓는 것을 가볍게 여겨도 되겠군요?’ 로마서 6장에서 바울에게 물었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내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가 더해진다면, 죄를 더 많이 지어도 상관없겠군요. 더 큰 은혜가 더해질 것이니 말이죠.”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럴 수 없다”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골로새서 본문에서도 분명히 말합니다.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을 이루신 것에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단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졌다고 선포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복음은 이제 우리가 더 이상 죄에 노예가 아니라고 선포합니다.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이제 우리가 의의 종이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우리는 죄를 벗어버린 것뿐만 아니라 의의 옷을 입었습니다.
복음의 목적은 22절 본문에도 분명히 나옵니다.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현재 우리 안에 맺고 있는 열매이자 미래에 완성될 소망입니다.
개인파산신청이란 제도가 있습니다. 개인이 자신의 능력이나 재산으로 모든 채무를 감당할 수 없을 때 신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인 회생 절차를 통해 그 사람을 구원해줍니다. 여기서 구원은 단지 채무를 다 갚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더 이상 채무를 만들지 않도록 건강하고 성실하게 일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화목을 이루신 목적은 단지 우리 죄의 빚을 다 갚아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않고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지금 그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우리가 만나는 날 미래에 우리는 그 일의 완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면 사실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보면 분명히 달라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내 안에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처럼 나를 거룩하게 빚어가시고, 하나님 보시기에 흠이 되는 것, 책망받을 것이 없도록 나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비유에서 “아버지께서…무릇 열매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말했습니다(빌 1:6).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그러므로 여러분, 흔들리지 마십시오. 성장통이 심할지라도, 성장이 더디게 느껴질지라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자라게 하십니다. 지금도 여러분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빚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죄를 반드시 드러내시고 다루실 것입니다. 모든 죄를 제거하시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형상을 닮게 하실 것입니다.
3. 미래를 바라보라(23)
이제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미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복음이 약속하는 미래의 소망을 붙드는 것입니다.
23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여러분, 이 마지막 구절에서 “만일”이라는 표현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23절이 조건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조금 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세우실 것이라는 복음의 소망을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보는 미래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만일”이라는 조건을 우리가 바라보는 미래에 걸었습니다. 조건문을 한 번 더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말은 어떻게 할 때 우리가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워질 것이라는 말입니까? 우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우리가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할 때 이뤄진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미래가 우리 손에 달려 있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22절의 주체는 모두 하나님이십니다(“화목하게 하사”, “너희를…세우고자 하셨다”).
그럼 23절에 조건문은 무슨 의미일까요? 미래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져다주실 복음의 소망을 바라보며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흠이나 책망할 것들을 제거하실 때, 우리가 함께 그 일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은 복음의 소망에서 절대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믿음을 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반석으로 삼아 굳게 서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외에 다른 것에 우리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미래에 주어질 복음의 소망을 지금 바라보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구원에 이르도록 자랍니다(벧전 2:2). 하나님의 은혜는 의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영생에 이르게 합니다(롬 5:21).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것, 그것이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는 미래로 우리를 인도합니다(벧전 1:8-9).
여러분, 바울은 오늘 말씀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천하 만민 앞에 선포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모든 사람의 귀에 복음이 들려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감춰두었던 복음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만민에게 마침내 나타났다는 말입니다(딤전 3:16; 벧전 1:10-12). 천하 만민에게 은혜받을 만한 때와 구원의 날이 그리스도로 인해 마침내 시작된 것입니다(고후 6:2).
그리스도의 제자가 하는 일은 실제로 가서 만민이 복음을 듣게 하는 것입니다(막 16:15). 바울처럼 말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어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 일을 합니다. 우리는 천하 만민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는 일꾼입니다.
저는 지하철에서 1,000원짜리 볼펜을 파는 아저씨의 설명을 듣고 크게 놀란 적이 있습니다. 목소리에 제품에 대한 확신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실확인을 해봐야겠지만(팩트체크), 특허를 받았다고 대단한 제품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진짜 대단한 제품이라고 믿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짜리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예수님은 얼마큼 중요한 분입니까? 예수님이 우리 삶에 진정 충분히 만족스러운 분입니까? 그리스도가 진정 여러분의 복된 소망이 되십니까?
과거를 기억하십시오. 어디서부터 구원을 받았는지 생각하십시오. 현재를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어 그 안에서 거룩함을 입고 있는 그 은택을 잊지 마십시오. 미래를 바라보십시오.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 오직 그리스도를 내 삶의 터로 삼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복음의 소망 가운데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